슈퍼옥수수로 유명한 김순권(61) 농학박사가 마침내 그동안 굳게 다물어 왔던 입을 열었다. DJ정권 시절 대북사업과 관련, 정치권과 깊은 관계를 맺어왔던 김 박사는 본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DJ정권의 대북사업과 자신의 북한 옥수수심기 사업에 얽힌 모든 내막을 밝히고 나섰다. 김 박사가 이같이 언론에 직접 밝히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사실 그는 지난 1998년 당시 DJ의 대북 커넥션 핵심인물로 지목된 이후 지금까지 ‘순수하지 못한 정치적인 학자’, ‘양의 탈을 쓴 이중정치스파이’라는 비난을 등에 업고 살아 왔다. 이 때문인지 그는 이번 기회를 통해 ‘슈퍼옥수수의 실체’, ‘DJ의 대북밀사’ 등 자신을 둘러싼 많은 의혹들에 대해 마치 울분을 토로하듯 입장을 밝혔다. 특히 DJ의 노벨평화상 수상 과정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김 박사는 “DJ에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며 치를 떨었다.
김 박사에 따르면 DJ가 대북사업에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을 끌어들여 정치적 목적으로 실컷 이용한 뒤 노벨평화상 수상 이후 ‘용도패기처분’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그가 밝힌 모든 내용들은 지금까지 언론에 단 한 번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은 것들이어서 더욱 귀를 솔깃하게 하고 있다.
지난 17일 서울 홍대 부근에 위치한 국제옥수수제단 사무실에서 김 박사를 만날 수 있었다.
이 자리에서 김 박사는 북한 땅에 심은 슈퍼옥수수 관련 이야기 외에 다른 사안에 대한 언급은 가급적 피하려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하지만 북한 방문과 슈퍼옥수수 사업에 관한 이야기가 계속되면서 조심스럽게 자신을 둘러싼 각종 의혹들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김 박사는 굶주린 동포를 구하겠다는 자신의 순수한 의도를 의심스런 눈으로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또 과거 정치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자신을 철저히 이용했던 정치인들에 대해서는 격한 표현을 써가며 경멸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시간이 지나면 역사적 평가가 진실을 가려줄 것이라 말했다. 그가 말하는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지금부터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대북밀사의 시작
김 박사는 1997년 대선 당시 DJ 지지선언을 한데 이어 2002년 대선 때는 이와 반대로 한나라당을 지지해 세간으로부터 무수한 비난의 화살을 한 몸에 받았던 인물이다.
그는 북한의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기존의 옥수수에 비해 두 배 가량 크고 수확량이 많은 옥수수 종자를 개발해 이를 북한에 제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박사는 80~90년대 당시 아프리카에서 현지 기후에 적응할 수 있는 옥수수를 개발하는 데 성공해 아프리카에서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김 박사는 자신의 이러한 경력을 살려 북한의 식량난을 해결하고자 했고, 북한도 이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북한을 방문한다는 것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는 95~97년까지 꾸준히 방북을 시도했지만 매번 실패했다. 그러던 97년 4월 어느날 누군가가 그에게 전화를 걸어와 북한에 갈 수 있도록 해 주겠다며 접근해 왔다. 그는 바로 대북사업가로 알려진 장석중(56)씨였다.
이어 97년 9월 대선에서 DJ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김 박사의 북한행 프로젝트는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98년 2월초 김 박사는 장씨의 주선으로 마침내 북한을 방문하는데 성공했다. 이때부터 김 박사와 DJ의 ‘위험한 관계’는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김 박사의 위험한 줄타기
김 박사는 “내가 북한에 가려했던 목적은 굶주린 동포들을 구하기 위해서였지만 DJ와 북한 당국이 전해 달라는 소식들을 하나 둘 씩 전달해 주다보니 밀사 노릇을 하게 됐다”며 “하지만 나는 공식적인 밀사는 아니었다. 공식밀사는 따로 있었겠지만 어쨌건 내가 밀사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라고 밝혔다.
김 박사는 방북에 앞서 마포에서 임동원 전국정원장을 만났다고 전했다.
그에 따르면 방북문제와 옥수수사업 문제를 놓고 임 전원장과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는 것이다. 임 전원장과 만난 자리에서 오간 이야기는 주로 대북프로젝트에 관한 김 박사의 역할 문제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 김 박사에 따르면 DJ에게 있어 가장 안전하고 신뢰할 만한 대북 창구는 바로 김 박사였다. 학자라는 위치와 대북식량증산지원이라는 명분은 북한에 접근하는데 있어 더 없이 좋은 조건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김 박사는 “이것은 조금만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문제다”며 “북한과 남한의 관계는 갑자기 좋아지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남북한 양쪽 모두 가장 매끄러운 연결고리를 마련코자 했는데, 그게 바로 나였다”고 말했다.
또 그는 “DJ는 그런 점에서 내가 밀사로 적임자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면서 “그 어떤 사람보다 내가 밀사 역할에 적절하다는 것은 서해교전 사건 직후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당시 금강산 관광마저 중단될 정도로 남북 관계는 최악이었지만 그때도 나는 별다른 장애 없이 남북을 쉽게 오갔다”고 말했다.
그의 이러한 증언은 DJ정부의 물불가리지 않는 대북정책의 실태를 그대로 드러내는 대목이다. 김 박사의 말이 사실이라면 DJ는 북한의 식량난을 해결해 보겠다고 나서는 저명한 학자의 사회적 지위를 자신의 정치적 목적에 이용한 셈이다.
김 박사는 이어 “내가 북에 간다고 하면 국정원에서 나를 보내 주는 것이지 내 마음대로 들락날락하는 게 아니다”며 “내가 북을 오간 것은 옥수수 재배 때문이기도 했지만 DJ의 뜻을 전달하러 가는 목적도 있었다. 돌이켜 보건대 그런 이용가치가 없었다면 DJ는 애초 나를 북한에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털어 놓았다.
실제 서해교전 사건이 발발하고 남북 관계가 최악의 상태로 치달았을 무렵, DJ의 햇볕정책은 야당의 맹공에 시달려야 했다.
이런 상황에 DJ의 밀사파견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김 박사는 북에 다녀와도 아무런 문제도 불거지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김 박사는 공식밀사보다 더 훌륭한 비공식 밀사였던 것이다.
김 박사에 따르면 DJ정권 시절 이뤄진 남북정상회담, 이산가족상봉 등 대부분의 대북프로젝트 성과 뒤에는 그가 있었다.
김 박사 통해 DJ가 얻은 이익
그의 말을 전부 믿을 수는 없겠지만 김 박사가 방북한 시기를 살펴보면 각 사안별로 일정부분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김 박사는 “김정일과 의견을 조율하기 위해 DJ가 북에 보낸 밀사가 구체적으로 누구이고 몇 명이나 되는지는 모르겠다”며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도 DJ의 뜻을 북측에 전달했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김 박사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가 개입된 프로젝트는 남북정상회담, 남북국방장관회담, 이산가족상봉, 정주영 소떼 방문 등이다.
김 박사는 “이산가족상봉의 경우 내가 북한 측을 적극적으로 설득해서 이뤄진 결과물”이라며 “이는 DJ정권 당시 정치권 관계자들에게 물어봐도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김 박사는 지금까지 DJ의 북한밀사라는 의혹에 대해 한사코 부정해 왔다. 뿐만 아니라 이와 관련, 공식적인 언급은 한 번도 없었다. 98년부터 최근까지 끊임없이 김 박사가 DJ의 대북밀사라는 주장이 야권에서 제기됐으나 이는 제대로 증명되지 못했다.
밀사 의혹 베일 벗다
하지만 “북한에서 DJ의 밀사 노릇을 했다”는 이번 김 박사의 증언으로 이 의혹은 베일을 벗게 됐다. 하지만 당시 여권에서는 학자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는 비난을 피해가기 위해 김 박사의 밀사 의혹을 한사코 부정해 온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김 박사도 당시 정부로부터 슈퍼옥수수 연구개발 비용으로 연간 2억 8,000만원을 지원받고 있던 입장이었으므로 DJ에 누를 끼치는 발언을 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 지원금은 2004년 3월 이후로 지급이 중단된 상태다.
#“정주영 방북 때 밀사역할도 했다”
김순권 박사는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방북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98년 2월 3일 장석중씨와 함께 북한방문을 마치고 귀국한 김 박사는 이틀 뒤인 5일 DJ를 일산에 위치한 자택에서 만났다. 장씨는 갑작스런 정 명예회장 측의 연락을 받고 현대로 가는 바람에 이날 일산에 가지 않았다.
그러나 김 박사에 따르면 이는 사실과 다르다.
김 박사는 “정 명예회장은 내가 두 번이나 독대했다”며 “정 명예회장의 숙모가 북한에 살고 있는데 북한에서 숙모를 찍은 비디오테이프를 정 명예회장에게 보여줬다. 그때 몸이 많이 불편했던 정 명예회장이 그 비디오를 보면서 몹시도 울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장씨 혼자 현대에 간 것이 아니라 둘이 함께 갔으며 현대와는 장씨가 연결시켜줬다는 것이다.
김 박사는 “정 명예회장이 강력하게 방북의사를 밝혀 이를 DJ에게 전했다”면서 깜짝 놀랄 사실 하나를 전했다.
그는 “정 명예회장은 북한을 방문해 대북 사업을 하게 해 주면 전 재산의 10분의 1을 북한에 기부하겠다고 나에게 말했다”며 “나는 이 뜻을 북측에 그대로 전달했다. 그런데 북측은 남한 사업가들은 믿을 수 없다면서 김우중 회장도 비슷한 발언을 했으나 지키지 않았다고 말하더라”고 전했다.
김 박사는 또 하나의 에피소드를 전했다.
그는 “소떼 방북 당시 정 명예회장은 무게가 많이 나가고 튼튼한 소를 골라 놓았으나 김정일이 원한 것은 임신한 암소였다”며 “내가 방북을 앞둔 정 명예회장에게 이 소식을 전하자 급급하게 임신한 암소를 최대한 많이 구해 소 떼에 끼워 넣었다”고 말했다.
윤지환 jjh@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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