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주(현재 광주)에서 일어난 견훤이 완주에 수도를 정하고 후백제를 세웠으며 원주에서 세력을 잡은 궁예는 철원에 수도를 정하고 태봉국을 세웠다. 고려를 세운 왕건도 궁예왕 막하에서 장군으로 있었지만 궁예왕을 도와 태봉국을 신라 후백제보다 더 강력하게 만든 인물 중에 역시 신숭겸 장군을 빼놓을 수 없다. 장군은 본래 전라도 곡성에서 태어났으나, 뒤에 춘천으로 옮겨 그곳에서 터전을 잡았다. 궁예가 후고구려를 건국하자 그 휘하에 들어갔다.태어나면서부터 몸이 장대(長大)하고 천성이 용맹스러웠으며 특히 백발백중의 활 쏘는 재주는 뛰어났다고 한다.전장에서 많은 공을 세워 마군 장군에 올랐다. 그러나 궁예는 신라를 멸도(滅都)라 일컫게 하고, 투항한 신라인을 모조리 죽이는 등 전제군주로서의 횡포가 심했다.
그리고 자신의 지위를 합리화하기 위해 자신은 미륵불, 두 아들은 보살이라고 칭하는등, 백성을 괴롭히고 많은 신하를 희생시키며 방탕한 생활을 했다. 또한 무고한 많은 양민들과 신료들을 철퇴로 쳐죽이며, 처자를 불로 지져 죽이는 등 학정이 계속되자 홍유, 배현경, 복지겸 등과 고려 태조 왕건을 추대 고려개국원훈 대장군에 올랐다.(918년) 신씨 성은 왕건에게서 받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고려 개국 1등 공신이 됐지만 안타깝게도 고려의 통일을 보지 못하고 전장에서 전사하고 만다.서기 927년 후백제 견훤이 국운이 기울어져가는 신라를 침공, 경애왕을 시해하고 도읍을 유린하였다는 급보를 받고 왕건은 신라를 돕고자 신숭겸장군과 군사 5천을 거느리고 출전, 공산무주(대구의 팔공산)에 진을 쳤고 이는 곧 지금의 동화사(桐華寺)이며, 여기서 견훤군과 대접전이 벌어졌다.처음에는 견훤군이 갈팡질팡하였으나 워낙 수가 많은 후백제군은 점차 수습되면서 형세가 역전되기 시작, 도리어 왕건군이 포위 속에 들게 되고 형세가 몹시 위급했다.
병력이 열세였던 고려군은 점점 대패했으며 태조와 장수들은 후백제군의 포위망을 뚫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으나 허사였다. 이 전투에서 가까스로 왕건이 목숨을 보전한 것은 잘 알려진 것처럼 신숭겸의 지략과 충심에서 비롯된 위왕대사(爲王代死) 덕분이었다. 이곳의 마을 이름이 지묘동(智妙洞)인 것도 신숭겸 장군의 지혜가 교묘했다는 데서 연유하고 있다.신숭겸의 얼굴이 태조와 흡사하였는데 그 전쟁의 형세가 막다른 지경에 이르렀음을 깨닫게 되자 장군은 몸으로써 대신 죽음을 할 것을 자청하면서 태조의 수래(御車)에 갈아타고 태조와 갑옷을 바꿔 입고 김락(金樂)과 더불어 힘껏 싸웠다.그러나 고려왕으로 착각한 적의 집중적인 공격으로 급기야 비장하게 전사(戰死)했다. 견훤의 군사는 장군을 태조로 여기고 그 머리를 잘라서 창에 꿰어 달아나니 포위했던 군사가 조금 풀리어 태조는 겨우 단신(單身)으로 위기를 모면했던 것이다. 본진에 돌아온 태조는 장군의 시신을 찾아내어 통곡하고 잃어버린 두상을 만들어 예장하였으니 이곳이 소양강이 굽어보이는 춘천 방동 묘소이다.
이 묘소는 원래 도선 국사가 태조의 묘소로 잡은 터였는데 태조는 생명을 대신한 장군의 예장지로 하고 봉분을 셋으로 만들고 원당(願堂)을 세우도록 했다.공산전투가 치러졌던 팔공산 일대에는 신숭겸과 왕건이 관련된 전설과 지명이 많다.지묘동과 팔공로 파군재는 공의 전적지로 유래되어 붙여진 지명이며 표충재(表忠齋)와 공의 영정을 모신 사우(祠宇)가 있다.팔공산도 공산이었던 것을 태조 왕건이 동수대전시(桐藪大戰時) 신숭겸(申崇謙) 김락(金樂) 전이갑(全以甲) 전의갑(全義甲) 등 팔장(八將)의 순사(殉死)로 인해 팔공산(八公山)이라 했다는 일설이 있다.장군의 위왕대사가 없었더라면 포위는 풀리지 않았을 것이요. 포위가 풀리지 않았더라면 싸움도 이기지 못하였기에 삼한(三韓)을 통일해 500년의 왕업(王業)을 이어받게 한 것은 장군의 충절의 공(功) 때문이라는데 이의가 없을 것이다.
대구 공산전투는 후삼국시대 통일전쟁에서 가장 격렬했던 전쟁으로 기록된다. 이후 우리나라 역사상 살신성인의 사례로 신숭겸 등의 전사를 첫손에 꼽는다. 최근 신숭겸의 생애와 관련이 있는 곡성 등 3곳에 동상이 세워졌다. 이번에 세워진 동상은 2년여전부터 평산신씨 종중에서 추진해 온 것으로서 동상은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최영희 박사가 고증한 영정을 토대로 홍익대 최승호 교수가 제작했다.한편 경북문경시 가은읍 전곡리에도 장군의 34대손인 신봉식(57) 대구표충제 부도유사가 영정을 모시고 있다. 신씨는 “신숭겸 장군은 세계사에도 보기 힘든 충성의 대명사”라며 “이번에 세워진 동상이 현손들과 국민들의 교육의 장이 됨은 물론 국내외 관광객들이 순례하는 역사적인 성역으로 거듭나길 바란다” 고 말했다.남북 분단시대에서 통일시대로 가는 길목에서 후삼국 통일시대를 열었던 신숭겸 장군의 이야기와 동상 건립은 역사의 교훈이 되고 있다.
고도현 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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