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주회사 규제, 금산분리 강화, 기업분할명령제, 감사위원 분리선출, 집중투표제 의무화, 다중대표소송제 등이 대표적이다. 공정거래법과 상법상의 제도들로 재벌의 구조, 즉 기업집단의 소유구조와 지배구조를 규제하는 것들이다. 대부분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규제들이다. 이러한 규제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기업집단 총수의 권한남용 위험성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함이다.
재벌이라는 기업집단 구조에 대한 비판의 핵심은 지배주주인 총수가 적은 지분만을 실제로 보유한 상태에서 계열사 지분을 이용해 그 이상의 지배권을 행사하며 기업집단 전체를 지배한다는 것이다. 즉 소유한 만큼 권한을 행사하는 ‘소유-지배 비례원칙’ 또는 ‘1주1의결권 원칙’을 지키는 소유지배구조가 가장 이상적이고 바람직 한데 재벌 구조는 그렇지 못해 총수의 권한 남용 위험성이 크므로 애초에 재벌의 소유지배구조 자체를 규제하자는 것이다.
물론 총수의 권한남용 행위를 규제해야 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그러나 사후적으로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사전적, 그것도 기업집단의 소유지배구조 자체를 규제할 경우에는 신중해야만 한다.
지배주주가 실질적으로 보유한 지분 이상의 권한을 행사하는 소유지배구조가 단점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안정된 지배권을 바탕으로 장기적 관점에서 기업가치를 추구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이러한 장점은 회사 경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단기적 이익추구에 주력하는 행동주의 헤지펀드가 최근 급격히 확산됨에 따라 더욱 중요해 지고 있다.
헤지펀드들은 최소지분만을 확보하고 다양한 수단을 동원해 기업경영에 관여하며 회사의 주요 자산이나 사업을 매각하도록 해 주가를 상승시켜 단기차익을 취득하는 전략을 주로 사용한다. 이러한 헤지펀드의 공격 대상이 된 기업들은 연구개발(R&D) 분야에 대한 비용 지출을 줄이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2009년 헤지펀드의 공격 대상이 된 기업을 대상으로 한 미국 연구에 의하면 이들 기업들은 공격받기 전보다 R&D투자를 50% 이상 줄였다고 한다. 미국경제에서 오랫동안 혁신을 주도해 온 듀폰(Dupont)도 최근 헤지펀드의 공격을 받은 후 비용절감을 통해 단기주가를 상승시켜 주주이익을 증대시킨다는 이유로 R&D 투자를 급격히 줄이고 기술연구소를 폐쇄하여 작년에 수천 명의 일자리를 없애버렸다.
헤지펀드의 공격을 직접적으로 받은 회사들만 단기적 이익을 위해 고용을 축소하고 R&D와 같은 장기투자를 줄이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은 기업들도 공격 받을 것을 우려해 장기투자를 줄이고 단기이익을 추구하는 경향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
최근 미국의 연구개발 분야에 대한 투자가 계속 줄고 있는데 그 원인을 지나치게 단기주가 상승에만 몰두하는 헤지펀드의 행동주의에서 찾는 견해도 있다.
이러한 헤지펀드의 행동주의는 최근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 등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계 각국은 지나친 단기실적을 추구하는 자본시장의 한계를 극복하고 자국 기업의 장기적 성장을 위해 ‘소유-지배 비례원칙’에서 벗어나 경영권을 안정화하기 위한 제도 도입 논의에 적극적이다. 자국 기업의 성장동력을 확보하고 장기적 경제 성장을 이끌기 위해 자국 기업의 경영권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노력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2014년 이탈리아 정부는 자국의 대표기업인 피아트 크라이슬러(Fiat Chrysler)가 차등의결권 주식(Dual-class Stock), 즉 보유한 주식 수보다 더 많은 의결권을 부여하는 주식 발행이 법적으로 허용되는 네델란드로 이전한 후 바로 차등의결권 주식을 도입하였다. 차등의결권 주식을 허용하지 않는 자국의 법 때문에 자국의 대표기업을 잃은 충격 때문에 바로 법을 개정한 것이다. 이탈리아 외에도 프랑스, 덴마크, 룩셈부르크 등이 차등의결권 주식 발행 요건을 완화하거나 새로 도입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재벌개혁 논쟁의 출발은 실질적으로 소유한 주식보다 더 많은 권한을 행사하는 ‘소유-지배 괴리’구조를 비정상적인 것으로 보고 이러한 구조를 규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식회사제도의 본질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반드시 그렇지 만도 않다.
주식회사제도는 ‘주식’을 매개로 불특정 다수로부터 대규모의 자금을 끌어 모으는 자본조달 방식이고 이렇게 주식을 발행해 외부로부터 자금을 조달할 경우 기업가의 지배권은 줄어들기 마련이다. 그러나 자신의 경영권과 경영철학이 보장되지 않는데도 투자를 확대하며 사업을 확장하려는 기업가는 흔치 않을 것이다. 따라서 기업가는 자신의 경영권을 유지하면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더욱 많은 자금을 끌어모으려 할 것이고 이것은 어찌 보면 기업가의 당연한 속성이다.
사업을 확장하면서도 경영권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 즉 소유한 주식보다 더 많은 지배권을 행사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방법(소유-지배 괴리)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1주1의결권 원칙에서 벗어나는 차등의결권 주식을 발행하는 것으로 독립된 하나의 회사에서 지배력을 확장하는 수단이다.
다른 하나는 1주1의결권 원칙을 유지하고 기업집단을 활용하는 방법으로 피라미드(Pyramids)구조, 상호출자(Cross Control), 순환출자(Circular Control) 등 계열사 간 출자를 통한 지배력 확장 수단이다. 현재 우리나라 상법과 공정거래법에서는 이러한 수단들을 금지 또는 제한하고 있고 그 수준도 전 세계에서 가장 강하다. 그러나 이것으로도 부족하다며 다양한 재벌개혁 수단들이 계속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의 주도권을 선점해 새로운 미래 먹거리 산업과 청년 일자리 산업을 만들어 내야만 하는 우리의 경제 현실에서 기업들의 장기적 투자는 절실하다. 우리 기업들이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제품을 만들어 내는 방법밖에 없다.
연구·개발(R&D)과 신사업에 더 많이 투자해야 한다.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제품화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투자를 위해서는 많은 자금이 소요된다. 그뿐만 아니라 수익이 나기까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단기적 수익에 집착하는 자본으로는 어렵다.
기업집단 오너의 권한남용을 사전에 억제하겠다는 좋은 의도의 재벌정책들이 오히려 단기적 수익에만 집착하는 해외 투기자본에게 힘을 실어주어 국내기업들의 장기적 성장동력을 훼손시키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필요하다. 차기 정부의 재벌정책은 이러한 논의에서부터 출발돼야 할 것이다.
<약력> 신석훈 한국경제연구원 기업연구실장
■ 법학박사, 연세대학교 대학원 법학과 졸업
■ 경제석사, 연세대학교 경제대학원 졸업
■ 경제학사, 중앙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 (현) 보건복지부 국민연금 기금운용 실무평가위원회 위원
■ (전) 전국경제인연합회 기업정책팀장 (파견, 2014-2015)
■ (전) 법무부 제조물책임법 개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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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훈 한국경제연구원 기업연구실장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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