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FIFA U-20 월드컵 특집]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을 관광하다
[2017 FIFA U-20 월드컵 특집]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을 관광하다
  • 수도권 강의석 기자
  • 입력 2017-04-03 15:39
  • 승인 2017.04.03 15: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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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서울 | 수원 강의석 기자] 수원화성은 조선왕조 제22대 정조대왕이 남긴 세계적인 걸작 문화재다. 잘 알려졌다시피 정조의 아버지는 당쟁에 휘말려 뒤주 속에서 생을 마감한 사도세자이다. 효심 깊은 정조는 아버지의 묘를 조선 최대 명당인 수원 화산으로 옮기며, 수원화성을 축성했다.

정조의 효심이 수원화성 축성의 배경이지만 수원화성은 정조의 더 많은 이상과 의지를 담고 있다. 즉,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서의 비전이 내포돼 있었다. 아울러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복안도 숨어 있다.

수원화성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해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해, 재상을 지낸 채제공의 총괄 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했다.

축성시 거중기 등 최신 발명품과 신기술이 총동원 된 사실이 눈에 띈다. 수원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물을 건립했으나 전란으로 소멸,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수원화성은 축조 이후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됐으나, 1970년대 후반 '화성성역의궤'를 참고로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복원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화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 지형은 평지를 이루지만,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고지대의 형태를 보인다.

화성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砲)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 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이루고 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일부 시설물을 복원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있다.

수원화성은 축성시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돼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 역시 현재까지 그대로 흐르고 있다.

또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년 전 화성의 골격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수원화성은 중국, 일본 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평지 산성의 형태로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시설의 기능이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돼 있는 동양 성곽의 백미라 할 수 있다.

특히 당대학자들이 충분한 연구와 치밀한 계획에 의해 동서양 축성술을 집약해 축성했기 때문에 그 건축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축성 후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계산, 시공기계, 재료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돼 있어 성곽축성 등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료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현재 수원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호), 화서문(보물 제403호), 장안문, 공심돈 등이 있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며, 세계인이 찾는 우리의 자랑스런 문화재가 됐다.

18세기에 완공된 짧은 역사의 유산이지만 동서양의 군사시설이론을 잘 배합시킨 독특한 성으로서 방어적 기능이 뛰어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약 6km에 달하는 성벽 안에는 4개의 성문이 있으며 모든 건조물이 각기 모양과 디자인이 다른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

세계문화유산 기준 (Ⅱ)와 (Ⅲ)을 충족시키며,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됐다. 기준(Ⅱ)는 일정한 시간에 걸쳐 혹은 세계의 한 문화권내에서 건축, 기념물조각, 정원 및 조경디자인, 관련예술 또는 인간정주 등의 결과로서 일어난 발전사항들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유산 기준(Ⅲ)은 독특하거나 지극히 희귀하거나 혹은 아주 오래된 유산이다.

이에 일요서울은 'FIFA U-20 월드컵 코리아 2017' 수원 개최를 축하하고, 수원화성을 방문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수원화성이 담고 있는 역사와 아름다움 그리고 효를 소개함으로써 수원화성 관광의 효율성을 안겨주고자 한다.

신풍루

▲ 화성행궁

사적 제478호 화성행궁은 1789년(정조 13년) 수원 신읍치 건설 후 팔달산 동쪽 기슭에 건립 됐다. 행궁(行宮)은 왕이 지방에 거동할 때 임시로 머물거나 전란(戰亂), 휴양, 능원(陵園)참배 등으로 지방에 별도의 궁궐을 마련해 임시 거처하는 곳을 말하며 그 용도에 따라서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전쟁과 같은 비상시에 위급함을 피하고 국사(國事)를 계속 하기 위해 마련된 행궁으로는 강화행궁, 의주행궁, 남한산성 내의 광주부행궁 등이 있고, 온양행궁은 휴양을 목적으로 설치된 행궁으로 조선 세종이래 역대 왕이 즐겨 찾던 곳이다. 그리고 왕이 지방의 능원(陵園)에 참배할 때 머물던 행궁이 바로 화성행궁이라 할 수 있다.

화령전 정조어진

화성행궁은 평상시에는 화성부 유수(留守)가 집무하는 내아(內衙)로도 활용했다. 정조는 1789년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 이후 이듬해 2월부터 1800년(정조 24년) 1월까지 11년간 12차에 걸친 능행(陵幸)을 거행했다.

이 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했다. 뿐만 아니라 정조가 승하한 뒤 순조(純祖) 1년(1801) 행궁 옆에 화령전(華寧殿)을 건립해 정조의 진영(眞影)을 봉안 했고 그 뒤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이곳에서 머물렀다.

화성행궁은 576칸으로 정궁(正宮) 형태를 이루며 국내 행궁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낙남헌을 제외한 시설이 일제의 민족문화와 역사 말살 정책으로 사라졌다.

봉수당 뒤편

1980년대 말, 뜻있는 지역 시민들이 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해 꾸준하고 적극적인 복원운동을 펼친 결과 1996년 복원공사가 시작돼 마침내 482칸으로 1단계 복원이 완료돼 2003년 10월, 일반에게 공개 됐다.

현재는 한류열풍을 이끌고 있는 다양한 사극의 촬영 명소이다.

▲ 수원화성의 성문, 수문, 암문 

서울로 통하는 장안문은 수원화성의 북문으로 정문에 속하고, 충청 전라 경상도로 통하는 팔달문은 수원화성의 남문이다. 그리고 동문인 창룡문과 서문인 화서문도 확인할 수 있다.

장안문은 화성의 북문으로 사실상 정문이라 할 수 있다. ‘장안’이라는 말은 수도를 상징하는 말이자, 나라의 백성들이 행복하게 산다는 의미를 사진다. 정조는 장안이라는 말을 화성의 정문으로 삼으면서 수원의 백성들을 기쁘게 해 주고자 했다.

장안문

장안문 누각의 지붕은 우진각 지붕이라고 해 웅장한 위엄을 뽐내고 있으며, 서울의 굮보 1호 숭례문보다 큰 문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성문이다.

한국전쟁 당시 문루가 불타 훼손된 것을 1975년 ‘화성성역의궤’에 의거 복원했다.

창룡문(동문)은 화성의 동쪽문으로 규모와 특징이 화서문과 거의 동일한 형태이다. 무지개처럼 쌓은 석축 위에 1층 누각을 만들었으며, 장안문과 팔달문에 비하면 그 규모가 매우 작은 편이다.

그리고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옹성을 반달 모양을 쌓아두고, 옹성 안 홍예문 좌측 석벽에 성문 공사를 맡은 사람들과 책임자들을 기록한 공사실명판이 있다.

팔달문(남문) 팔달문은 화성 남쪽의 충정, 전라, 경상도 사람들이 이 문을 통과해서 들어오기에 사통팔달 통한다는 의미로 만든 이름이다.

팔달문

팔달문은 축성 당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보물 제402호로 지정돼 있다. 성문의 바깥쪽에는 벽돌로 옹성을 ᄊᆞᇂ았는데 옹성의 출입문이 중앙에 난 것이 특징이다. 팔달문과 장안문은 원활한 사람과 물자의 유통을 위해 일반적인 방식과는 달리 중앙에 문을 내었다.

옹성문 위에는 옹성문에 붙은 화재를 막기 위해 오성지를 설치했다. 그리고 성문은 오른쪽 석벽에는 팔달문 공사에 참여한 책임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공사실명판이 아직도 또렷하게 남아있다.

화서문(서문)은 서쪽 대문으로 편액은 초대 화성유수였던 채제공이 썼다. 그리고 화서문은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보물 제403호로 지정됐다.

창룡문과 거의 같은 모양하고 옹성 안 홍예문 좌측 석벽에 역시 성문 공사를 맡은 사람들과 책임자들을 기록한 공사실명판이 있다.

수문(水門)은 북쪽(장안문) 근처에 있는 북수문과 남쪽(팔달문) 근처에 있는 남수문을 말한다.

북수문(화홍문)은 북쪽에 있는 수문으로 흔히 화홍문이라 부른다. 아름다운 무지개 문이라는 뜻이며, 동북각루(방화수류정)과 어우러져 성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관을 보여주는 곳이다.

북수문(화홍문)

남수문은 화홍문과 마주 서서 물줄기의 흐름을 인도하도록 설계돼 있고 석축으로 9칸의 홍예를 틀고 쇠창살을 설치해 잠가두는 것이 화홍문의 설계 방식과 동일하다.

암문(暗門)은 어두울 ‘암’자를 사용하는 숨은 문이라는 뜻이다. 적군들 모르게 아군들만 성 안팎을 오가는 비밀 통로였다. 즉 전쟁이 발생할 경우, 사람, 가축, 수레, 양식 등 모두 이문을 통해 성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수원의 4대 성문의 경우 적에게 쉽게 노출될 위험이 컸던 반면 암문은 성벽의 후미진 곳에 설치해 두었기 때문에 적들이 그 길을 잘 알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성이 위험해졌을 때 암문으로 전령을 보내도, 증원군을 받으며 비상식량을 공급받기 위한 기능을 가진 곳이다. 그러다가 최후로 암문이 발각되면 흙과 돌로 암문을 막아 통로를 폐쇄해 성과 같게 만들었다. 암문은 북암문, 서암문, 서남암문, 동암문, 남암문이 있다.

서장대

▲ 수원화성속의 장대, 노대, 공신돈, 각루

서장대(화성장대)는 팔달산 정상에 자리 잡고 있는 서장대는 화성의 총지휘소랍니다. ‘화성장대(華城將臺)’란 편액은 정조가 친히 썼다. 이곳은 성의 안팎이 모두 한눈에 들어와 화성 일대는 물론 이 산을 둘러싸고 있는 백리 안쪽의 모든 곳을 볼 수 있다.

1795년 윤 2월 12일, 정조는 현륭원(융릉)에서 아버지 사도세자의 참배를 마시고 서장대에 올라 성을 수비하고 공격하는 주간훈련과 야간훈련을 직접 지위했다.

동장대(연무대)는 평상시 군사를 훈련하고 지휘했던 곳이다. 때문에 무예를 수련한다는 연무대라는 별칭이 붙었다. 동장대 왼편 담 밖은 넓은 조련장을 마련해 말타기와 활쏘기 훈련을 할 수 있게 했다. 이곳의 지형은 높진 않지만 사방이 트여있고 등성이가 솟아 있어 화성의 동쪽에서 성안을 살펴보기에 좋은 군사요충지라고 할 수 있다.

동장대

서노대는 서장대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으며 벽돌로 쌓은 정 8각형의 높은 대이다. 이곳은 화성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적의 동태를 살피고 멀리 적을 공격할 수 있게 돼 있다.

동북노대는 창룡문과 동북공심돈 중간에 위치해 있으며 반달 모습의 담장이 노대를 보로하고 있다. 이 역시 서노대와 같이 적의 동태를 살피고 적을 공격하는 군사 시설물 중에 하나이다.

공심돈은 화서문 옆에 위치한 서북공심돈, 연무대에 있는 동복공심돈, 남암문 부근에 위치한 남공심돈이며, 군사들이 이 안에 들어가서 작은 구명으로 백자총, 큰 구멍으로 불랑기포를 쏘게 한 시설물이다.

동북공심돈

각루는 수원화성의 다양한 시설물 중 ‘각루’라 이름 붙여진 곳은 쉽게 정자라고 생각하면 된다. 동북각루(방화수류정), 서북각루, 서남각루, 동남각루가 있다.

이 중 동북각루는 주위의 아름다운 경관과 어우러진 곳으로 화성의 여러 시설물 중에서 가장 빼어난 곳이다. 동북각루는 '방화수류정'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꽃을 쫓고 버드나무를 따라가는 아름다운 정자라는 뜻이다. 용머리 바위 위에 있는 누각으로 원래는 서장대의 다음 전투지휘용보다는 쉼터로서 더욱 많이 사용됐다.

▲ 수원화성의 군사시설 포루, 봉돈, 치성, 적대, 포사

 

포루는 아랫부분 3~6단은 화강석의 돌을 쌓고 그 윗부분은 벽돌로 쌓았으며 맨 위의 건물은 나무로 만든 형태의 건축물이다. 동포루, 북동포루, 북서포루, 서포루, 남포루 등 모두 5개소에 포루를 설치했다.

윗부분에는 양쪽 3문씩 6문의 대포를 설치해 성벽을 향해 기어오르는 적을 공격할 수 있게 했는데, 화성에서 한 번도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기에 실제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봉수대는 성밖 산봉우리에 있으나 화성의 봉돈은 성 안에 있다는 점이 매우 특별한 점이다. 또한 벽돌로 쌓아올려 그 규모나 외관이 정교하고 위엄이 넘친다. 5개의 연기 구멍을 갖추어 신호를 보낼 수 있도록 마련돼 있는데 5개의 화두 가운데 평상시에는 남쪽의 첫 번째 기둥만 사용했다.

매일 저녁마다 남쪽의 첫째 화두에서 횃불을 올리면 동쪽으로 용인 석성산에서 봉화로 응하고 서쪽으로는 수원부의 흥천대에 있는 바다 봉화대와 신호를 했으며, 나머지 4개의 불구명은 긴급한 일이 없으면 횃불을 들지 못하게 돼 있다.

봉돈

치성은 치는 성곽의 요소에 성벽 밖으로 돌출시켜 좌우 방향에서 접근하는 적병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물이다. 이는 화성을 설계한 정약용이 기존의 성곽과 다른 새로운 시설물을 만들기 위한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치’란 말은 꿩을 뜻하는데 꿩은 제 몸은 숨기고 밖을 엿보기를 잘 한다고 한다. 군사들이 몸을 숨기고 밖을 엿보며 공격할 수 있는 기능을 하기에 ‘치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적대는 성문과 둥근 옹성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그 구조와 기능은 치와 거의 같다. 화성석곽 내의 적대는 장안문과 팔달문 좌우 각가 북동, 남동, 남서적대라고 불리는 4개의 적대가 있었지만 팔달문 좌우 적대는 시가지화와 더불어 사라졌다.

포사는 중포사, 내포사, 서남포사가 있으며, 중포사는 성 밖 비밀통로의 경로를 알리는 구실을 하는 건물로 동북포루 아래 320보(380m) 지점에 있다. 수원화성을 축성하며 그 과정을 세세히 기록한 ‘화성성역의궤’에 의하면 포사가 치 위에 있을 때는 포루가 되고 성내에 있으면 포사가 된다. 각각 자기가 맡은 성벽의 위기 상황을 대포를 쏘아 알리면 포사에 있는 군사가 또한 깃발을 휘두르거나 대포로 응하는 등 성을 지키는 약속 행위가 이루어졌다.

▲ 1시간 코스
 


▲ 1시간 30분 코스

▲ 2시간 코스

▲ 3시간 코스



 

수도권 강의석 기자 kasa59@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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