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 ㅣ이범희 기자] 홍라희 삼성미술관 관장이 지난 6일 일신상의 이유로 삼성미술관 리움과 호암미술관 관장직을 사퇴한다고 밝혔다.
후임은 정해지지 않았다. 홍 관장은 지난달 17일 장남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구속되자 “참담한 심정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다”는 뜻을 주위에 밝힌 것으로 전해진다.
홍 관장은 1995년 호암미술관의 수장이 됐고, 2004년 리움 개관 이래 관장을 맡아오며 한국 미술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로 꼽혀 왔다. 안목과 재력을 모두 갖춘 ‘슈퍼컬렉터’의 퇴장에 미술계는 물론 재계까지 술렁이고 있다.

삼성미술관 측은 지난 6일 오전 “홍라희 관장이 일신상의 이유로 삼성미술관 리움과 호암미술관 관장직을 사퇴하기로 결정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사퇴 이유를 일신상의 이유라고 밝혔을 뿐 구체적인 이유는 밝히지 않고, 미술관 측도 말을 아끼고 있다. 자세한 이유는 재단 쪽 관계자들도 모른다고 했다. 삼성문화재단은 리움과 호암미술관을 운영하는 주체다.
수년간 미술계 영향력 1위
서울대 응용미술학과 출신인 홍 관장은 이름난 고미술품 컬렉터기도 한 이병철 선대 회장의 눈에 들 만큼 예술적 감각이 뛰어났다.
시아버지가 매일 10만 원을 주며 “골동품을 사오라”며 홍 관장을 특별 훈련시킨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 국립대 등록금이 5만 원가량으로 지금 물가 수준으로 치면 매일 5백만 원씩 약 4억5000만 원가량의 거금으로 석 달 동안 골동품 사오라고 지시한 셈이다.
타고난 감각에 인맥과 재력을 더하며 미술계 영향력을 키워 오던 홍 관장은 1995년부터 호암미술관 관장을 맡았다. 호암미술관은 이병철 전 회장이 수집한 한국미술품 1200여 점을 바탕으로, 자신의 호 ‘호암(湖巖)’을 이름으로 붙여 1982년 개관한 미술관이다.
또 홍 관장은 2004년부터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개관한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직을 맡아 왔다. 리움은 개관 당시부터 소장품이 1만 5000여 점에 이를 만큼 큰 규모를 자랑했다.
홍 관장은 두 개 미술관의 관장직을 수행하면서 일약 미술계의 큰손으로 떠올렸다. 재력이 뒷받침된 덕분에 국내 최고이자 재계 유수의 컬럭터로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이다.
홍 관장은 미술전문지 아트프라이스, 미술시가감정협회 등이 매년 설문조사를 통해 선정하는 ‘한국 미술계를 움직이는 인물’에서 1위에 오르는 ‘단골’이다. 미술계에서 홍 관장을 단순한 ‘값비싼 구매자’가 아닌 안목 있는 컬렉터로 평가하고 있다는 의미다.
부침도 있었다. 2006~2007년 국내 미술시장 호황으로 미술품 가격이 고공행진할 때 역풍을 맞기도 했다. 2008년 삼성그룹 비자금으로 수백억 원대의 미술품을 구입했다는 의혹을 받고, 특별검사팀에 소환돼 조사받았다.
당시 90억 원 상당 ‘행복한 눈물’의 소장경위 등을 추궁당했는데, 이 그림은 오히려 로이 리히텐슈타인(1923~1997)의 주가를 더 올리는 작용을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앤디 워홀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작가였지만 비자금사건에 몰려 언론의 집중적인 주목을 받은 후 리히텐슈타인의 이름을 대중적으로 알리는 데 기여했다.
당시 미술품을 구입한 경위와 자금출처, 수많은 미술품으로 가득찼다는 에버랜드 창고 등이 발견돼 떠들썩했지만, 사건은 무혐의 처리됐다. 하지만 사회적인 파장과 충격으로 이건희 회장의 그룹 회장 퇴진과 함께 홍 관장도 리움 관장직을 떠났다. 이후 2년 9개월 만인 2011년 3월 리움 관장으로 복귀했다.
“모든 걸 내려놓고 싶다”
미술계는 이번 홍 관장의 관장직 사퇴에 안타깝다는 반응을 보이면서도 “아들까지 수감된 상황에서 대외적인 활동이 많은 관장직을 더 이상 유지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라는 분위기다.
또 호암미술관과 리움 관장 두 직함을 동시에 내려놓은 배경에는 남편인 이건희 회장의 와병이 길어진 상황과 지난달 17일 이재용 부회장이 구속 수감된 영향이 큰 것으로 분석된다. 홍 관장의 주변에서는 그가 최근 “모든 걸 내려놓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최진녕 변호사는 종편 패널로 참석해 “3~4년 전부터 남편인 이건희 회장은 삼성 병원에 심근경색으로 의식 불명이다. 장남 이재용은 최순실 사태에서 구속되지 않았느냐. 장녀 이부진은 사위 임우재와 계속 몇 년째 소송 중이다.
막내 이서현 남편인 김재열 제일기획 사장은 뇌물공여 혐의로 여러가지 조사를 받았다”며 “개인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을 겪었기에 공식적 직책을 수행하기도 어렵고 후문에 따르면 심리적으로 우울증도 겪고 있단 얘기가 나오는 것 같다”고 했다.
일각에서는 이재용 부회장의 구속으로 수사 과정에서 밝혀진 경영 승계권 ‘암투설’이 홍라희 관장에게 적잖은 부담감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지난해 말 검찰이 최순실 최측근인 박원오 전 대한승마협회 전무를 수사할 때 박원오 전 전무는 “홍라희 관장이 이재용 부회장의 승계를 원하지 않고 있다.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을 밀어주고 있다”며 “동생인 홍석현 중앙일보-JTBC 회장과 실권을 잡으려 계획하고 있다”고 폭로한 바 있다.
한편 홍 관장의 후임은 정해지지 않았다. 삼성미술관 리움의 경우 당분간 홍 관장의 동생인 홍라영(57) 총괄부관장이 맡아 운영할 것으로 보인다. 2008년 ‘삼성 특검’ 당시에도 홍 총괄부관장은 관장직을 공석으로 유지한 채 3년여간 미술관을 운영했다.
이범희 기자 skycros@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