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지, 이지아 이혼소송 ‘전말’
서태지, 이지아 이혼소송 ‘전말’
  • 이창환 기자
  • 입력 2011-04-26 10:44
  • 승인 2011.04.26 10:44
  • 호수 886
  • 52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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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수록 나오는 서-이 부부 설·설·설

[이창환기자] = 서태지의 이혼 사실로 대한민국이 들썩였다. 지난 4월 21일 오후 잠적해 있던 서태지가 돌연 검색어 1위를 차지한 것도 잠시, 연예계가 패닉 상태에 빠진 것이다. 이후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관련 소식에 대중들은 어안이 벙벙했고 사건의 진실 여부를 믿지 못하는 이들도 많았다. 이번 이슈로 그동안 철저한 신비주를 고수했던 ‘문화대통령’ 서태지의 비밀은 만천하에 알려졌다. 일요서울은 서태지-이지아 사건에 관련된 수많은 이야기 중 이혼관련소송에 둘러싼 진실, 이혼 당시 서태지의 심경, 서태지와 이지아의 데뷔 비화를 조명해봤다.

지난 4월 21일 오후의 충격에서 벗어난 대중들은 이제 이들의 만남과 결혼 생활, 현 애인 정우성의 입장, 서태지의 입장발표 등의 가능성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그중 가장 먼저 부각되고 있는 사건은 이지아가 제기한 위자료 및 재산분할 청구 소송 진행상황이다.

앞으로 소송과정을 통한 둘을 둘러싼 진실들은 속속 들어날 것이고, 누가 승리하느냐에 따라 향후 향방이 크게 바뀔 것이기 때문이다.

이지아는 지난 1월 19일 서태지에게 위자료 및 재산분할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액수는 위자료 5억 원에 재산분할 50억 원까지 총 55억 원이었다. 당시만 해도 이지아가 서태지에게 제기한 소송은 대중에 알려지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개인신상정보를 철저히 비밀로 한 채 재판을 진행했기 때문이다. 소송은 양측에 각각 4명, 3명의 변호사가 배당된, 가정법원 소송으로는 매우 큰 규모로 진행됐다.

A 신문사가 처음 보도한 ‘특종’에 따르면 이혼관련 소송이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한 시점은 지난 18일 이었다. 판사의 요청으로 2차 변론 준비 기일에 출두한 이지아를 법원 관계자들이 알아보면서 비밀이 새나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그보다 10일 빠른 지난 4월 8일 서태지 이지아의 소송전이 트위터를 통해 은밀히 전달됐다”고 주장했다. 당시 순식간에 수많은 댓글들이 달렸지만 서태지 팬클럽에 의해 철저히 차단됐다는 것이다. 이들은 “글을 올리고 공유한 이들에 대한 서태지 팬클럽의 협박은 살벌했다”고 말했다.


근거 없는 추측인가, 또 다른 비밀인가

서태지와 이지아는 지난 3월과 이어 4월 두 차례 공판을 마친 상태며 다음 변론준비기일은 5월 23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이들의 이혼관련 소송이 보도된 후 불과 몇 시간 만에 B 신문사는 “이들 부부에게 2명의 딸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는 기사를 실었다. 소송전의 최대 쟁점으로 떠오를 수 있는 양육권과 연관되는 내용이었다. 이는 인터넷을 통해 빠르게 퍼져나갔지만 B 신문사는 다음날 기사를 삭제했다. 같은 날 이지아의 소속사는 ‘둘 사이엔 자녀가 없다’는 입장을 밝히며 언론 보도를 자제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를 두고 익명을 요청한 한 법원 관계자는 “둘 사이에 제기된 자녀설이 여전히 심상치 않다”는 의견을 제기했다.

위자료 청구는 재산증식 기여도, 가사분담책임을 척도로 삼는다. 모든 이혼소송이 위자료로 연결되진 않는 것이다.

관계자는 “이지아의 경우 부부일 당시 재산증식의 기여가 크지 않기 때문에 가사분담책임을 통한 소송을 진행할 것 같다”고 말했다. 때문에 관계자는 “이 점이 서태지-이지아 부부 사이의 자녀 설에 무게가 가는 이유”라고 말했다. 거액의 위자료 청구는 자녀 양육에 대한 전제조건을 달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이지아 소속사는 이들 사이에 자녀는 없다고 거듭 주장하고 있는 상태다.

이지아 또한 “견디기 힘든 추측성 기사들은 본인은 물론 가족들에게 상처가 된다”며 “자녀가 있다는 보도는 사실 무근임을 명백히 말씀 드린다”고 발표했다.


#서태지가 정현철이던 시절의 비화

서태지가 록그룹 시나위의 베이시스트 출신이었다는 사실은 서태지의 팬들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다. 하지만 시나위 이전의 정현철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음악에 대한 감각이 타고났던 정현철은 락 페스티발에서 우연히 전설적인 기타리스트 이중산을 만나게 되고 그의 밑으로 들어가 생활을 시작한다. 이중산 밴드의 베이시스트로 지내 던 정현철은 어느 날 연습실을 찾아온 신대철(시나위 리더)의 눈에 띄인다. 신대철은 한 눈에 정현철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그 자리에서 “이 친구를 데려가고 싶다”고 말한다. 17살의 정현철이 80년대를 주름잡던 시나위에 들어간 순간이었다.

신대철은 당시 정현철을 마음에 들 때까지 연습시키는 등 혹독하게 조련했다. 정현철에게 “너는 리듬감은 좋지만 필은 엉망”이라는 처참한 평가도 서슴지 않았다.

정현철 또한 지지 않았다. “신대철 선배의 음악관은 자신과 맞지 않으며 너무 권위적”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그렇게 점점 사이가 멀어지던 차, 정현철은 신대철의 담배 심부름을 받아 나간 이후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 후 미디 음악을 공부한 정현철은 당시 최고의 춤꾼 양현석과 이주노를 만나 ‘서태지와 아이들’을 결성하게 된다. 신대철과의 대립이 없었다면 서태지도 탄생할 수 없을 뻔했다.

hojj@dailypot.co.kr

이창환 기자 hojj@dailypo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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