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 박매지 義軍 전국 최대 규모 확인
하동 박매지 義軍 전국 최대 규모 확인
  • 경남 이도균 기자
  • 입력 2017-02-27 20:08
  • 승인 2017.02.27 20: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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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병탄 직전 영․호남 의병 400인 지휘 맹활약…정재상 향토사학자 문건 공개
[일요서울ㅣ하동 이도균 기자] 구한말 호남의병장 고광순 의진과 박동의 경남창의군에서 사격의 명수로 이름을 날리며 지리산 일대를 종횡무진한 하동 악양면 출신 박매지(朴每之·朴仁煥 1882∼1909) 의병부대 규모가 한일병탄 직전인 1909년 전국에서 가장 컸음을 밝히는 문건이 한 향토사학자에 의해 세상에 처음 드러났다.
 
  지금까지는 박매지(박마야지·박인환) 의군 규모가 30∼40명 안팎에 불과하다고 알려졌으나 이번 문건에서는 기존 통설을 뒤엎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400명 규모의 의병진이였음이 확인됐다.
 
또한 1908년 10월 박동의 경남창의대장이 산청에서 전사한 이후에는 박매지 의병장이 경남창의군 최고지도자로 활약했음이 이번 문건을 통해 입증됐다.
 
  문건을 공개한 정재상 경남독립운동연구소장은 “국가기록원이 소장한 일본군 헌병대 보고서 ‘폭도수령조서’(1909년 3월)에서 그동안 주목 받지 못했던 박매지 의병장의 부대 규모를 확인, 당시 전국에서 가장 많은 의병을 지휘했던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문건에는 전국 각 지역별 의병장의 성명·신분·출생지·부하수·활동지역 등이 기록돼 있다.
  기록에 의하면 1909년 3월 현재 국내·외에서 활동한 의병장은 304명(국내 291명·국외 13명)이며 의병의 수는 1만 1863명이다.
 
그리고 200명 이상을 거느린 의병장은 총 10명으로, 경기도 출신 3명, 황해도 2명, 평안도 2명, 경상도가 3명이다. 이중 황해도 출신 강효순(박정빈), 평안도 오기언은 300인 의병장이다.
 
특히 경남의 박매지와 경성 출신 윤승지(尹承旨·승지는 벼슬임)는 400명 이상을 거느리고 지리산 일대에서 활약하고 있다고 밝혔다.
 
당시 400명 이상을 지휘한 의병장은 전국에 단 2명에 불과하다. 나머지 의병부대는 대부분 20~80명 전후의 중·소규모 부대인 것으로 문건에 나타났다.
 
문건을 분석한 정재상 소장은 “당시 일제는 1907년 8월∼1909년 8월 2년간에 걸쳐 의병토벌 작전을 벌여 대부분 의병이 전사 혹은 체포되고 해산해 전국의 의병들은 대폭 감소하는 추세였으나 박매지 의병진은 한일병탄 직전까지도 그 세력을 유지하며 지리산 일대에서 맹활약한 것을 볼 때 그의 뛰어난 용병술을 가히 짐작하고도 남을 것 같다”고 말했다.
 
‘사격의 명수’ 일본군 공포의 대상…박동의 경남창의대장 전사 후 총대장 추대
 
일제는 박매지(박인환)를 ‘박마야지(朴馬也只) 또는 박매야(朴買也)’라 불렀으며 지리산 주변에서는 호랑이처럼 용맹스럽고 범 잡는 평민 포수라 해서 박호포(朴虎砲)라 불렀다.
 
박매지는 15∼6세에 지리산에서 호랑이를 사냥했는데 총알 한방으로 급소에 명중시켜 범의 숨통을 끊어 놓았다고 전해진다.
 
박매지 의병장은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된 1907년 8월초 당시 26세의 젊은 나이에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힘을 길러 일제를 몰아내야한다”며 지리산 기슭 전남 구례 연곡사에서 의병을 모으고 있던 호남의병장 고광순(담양 출신)과 김동신(충남 회덕) 의진에 참여해 대일 항전의 기치를 올렸다.
 
박매지는 경상도 일대에서 이미 백발백중 사격의 명수로 정평이 나있어 고광순 의진에서 중군장 역할을 수행하며 순천·구례·곡성·광양·남원·하동 등지에서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을 치렀다.
 
박매지는 1907년 10월 14일 고광순 의병장을 비롯한 300명과 함께 일제치하에 있던 하동경찰서를 습격해 큰 타격을 가했다. 그러던 중 17일 고광순 의병장은 구례 연곡사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다 전사했고 이후 많은 의병들이 흔들리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박매지는 동지들을 재규합했다.

그리고는 집안 재산을 다 처분해 군자금을 마련한 후 권석도·임봉구·우수보·박홍지·정맹도·손몽상 등 50명과 함께 산청으로 넘어가 박동의 경남창의군에 합류해 군수참모장으로 활약했다.
 
박매지는 1908년 3월 박동의 대장을 비롯한 이학로(경북 영천)·권석도(함양)·황내청(산청)·우수보(하동)·조인환(산청 삼장면)·정치수(진주 대평면)·손기혁(하동)·정승유(하동) 등과 함께 산청경찰서와 군청, 하동군 일신일어학교를 습격해 불태웠다.
 
이어 4~8월 합천우체국, 남원 일본군 입석수비대, 하동수비대를 공격해 큰 타격을 가했다. 그러던 중 박매지는 1908년 7월 권석도와 함께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돼 하동경찰서에 투옥됐으나 탈옥했다.
 
한편 박동의 경남창의대장은 10월 17일 산청군 시천면 동당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다 전사했다. 이후 경남창의군 각 지역 의병장 19명은 야전회의를 거쳐 박매지를 경남창의군 총대장으로 만장일치 추대했다.
 
박매지 대장은 권석도·이학로 등과 함께 1909년 2월과 6월 함안군 일본인 집과 함안 칠원경찰서를 습격하고 진주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며 일제와 격전을 벌였다. 하지만 1909년 7월 22일 진주시 대평면 신풍에서 일본군과 조우 격전을 벌이다 전사했다.

경남 이도균 기자 news2580@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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