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vs박근혜 검증논쟁
<이명박 리포트> 초고 긴급 입수
김유찬씨가 들고나온 <이명박 리포트>가 정치권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정인봉 변호사의 1차 시도가 무위로 끝나면서 수그러들것 같던 분위기는 더욱 맹렬한 불꽃으로 재점화됐다. 김씨는 이르면 2월말 이 책을 시중에서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엄포도 놨다.
이에 대해 이명박 전시장측은 2002년 김씨가 출간하려던 일기 형식의 책을 재반박의 자료로 사용했다. 하지만 그 어느 쪽도 책의 내용을 전면 공개하지 않고 있다. 진실과 허위의 늪을 헤매고 있는 <이명박 리포트>를 긴급 입수했다. A4 용지 210쪽 분량의 문서 중 일부 내용은 아직까지 ‘집필 중’으로 표시돼 있다.
“이 전시장의 여자, 재산, 종교문제에 대해 자세하게 적어놓았다.”
김씨는 자신이 발간 준비 중인 <이명박 리포트>에서 이 전시장과 관련된 민감한 부분들을 언급하겠다고 공언했다.
본지가 입수한 <이명박 리포트> 초고는 크게 ▲이명박 사건 왜 일어났나 ▲나는 가난한 프롤레타리아 출신 ▲종로는 밥보다 정치가 중요해 ▲이명박과 얽힌 정치판 이야기 ▲이제야 진실을 밝힌다 ▲후기와 별첨 등으로 구성돼 있다.
현재 김씨와 이 전시장측이 맹렬한 공방을 벌이고 있으며 정치권에서 민감한 화두로 등장할 수 있는 주요 내용들을 요약, 소개한다.
■ 이종찬과의 ‘사우나 만남’
내부 인사 문제로 MB를 떠난 이후 이재창 의원실에 채용됐지만 실직했다. 이 때부터 내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옛 주군에 대한 ‘배반의 음모’가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1996년 9월 새정치국민회의 중앙당사로 이종찬 부총재를 찾았다. MB에 대한 ‘직격탄’을 날리기 위해서는 가장 적임자라는 생각에서였다. 당시 집권여당의 실세로 맹위를 떨치던 MB 아니던가?
그것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나 마찬가지였다. 보다 현실적으로 MB에게 직격탄을 날리는 경우 예상되는 역공에 대한 정치적 바람막이 역할이 절실히 필요했다. 나는 이 부총재에게 한 번 만났으면 한다고 면담을 요청했고 뉴서울호텔 커피숍으로 장소를 정했다.
하지만 나는 원래 약속 장소와 다르게 14층 사우나로 갔다. 노출 우려도 그랬지만 남자 대 남자로서 벌거벗고 숨김없이 이야기해 보고 싶었다. 이 부총재측에 의한 녹음 등 공작 위험성도 있었다.
사우나 휴게실에서 만난 이 부총재에게 만남의 이유를 차근차근 설명해 나갔다. 이 부총재도 불법선거와 관련한 각종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내게 말하는 도중 “김동지!”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으며 나와 같은 사람이 양심선언 같은 것을 해주면 좋겠다고 했다.
이 자리에서 MB에 대한 불편한 심정은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불법선거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이 때 이 부총재가 결국 자료만을 받아 챙기고 나에 대한 신변보장 등은 소홀히 할 인물이라고 직감적으로 느꼈다. 초면임에도 불구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겠다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나는 ‘폭로’가 가져올 엄청난 파장이 두려웠다. 우리시대의 신화적 인물을 내 손으로 추락시키고 싶질 않았다. 올라가 이 부총재에게 작별 인사라도 할 양으로 엘리베이터를 탔다.
■ DJ와의 심야만남
이 날 만남에서 이 부총재는 “이제사 이야기지만 이명박이 그 사람 우리 정치판에서 없어져야 할 사람이야. 그 사람 얼굴 좀 보라구. 그게 정치인 얼굴인가, 범죄형이지”라며 인신공격성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저런 이야기는 자신을 위해서라도 하지 않는게 좋을텐데’라는 생각을 했다.
이 부총재가 미덥지 않아 김대중 총재를 만나 확약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의 전격적인 제안에 이 부총재는 잠시 머뭇거리는 듯 하더니 일산으로 가자고 했고 밤 11시 30분경 김 총재 자택으로 들어가 만났다. 이 자리에서 김 총재는 ‘당 차원의 지원’을 지시했다.
이 날 약 10분간의 대화로 다음날 기자회견 일정 등 모든 것이 결정됐고 나는 ‘운명의 루비콘강’을 이미 넘었다고 생각했다.
2006년 우연하게 정주영가의 종손인 국제경제학 박사(편의상 정 박사)를 만나게 됐다. 정 박사와의 인연은 교회 한 장로의 소개로 이뤄졌다.
정 박사는 어느 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MB와 현대와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가 말한 요지는 대충 이렇다.
■정주영 회장과의 결별이유
정주영 회장이 생전 시 청구동 자택에서 자주 조찬회의를 열었는데 정 박사도 가끔 그 자리에 참석했던 던 것 같다. 정 회장의 동생인 정세영 회장과 정몽구 정몽헌 회장 등이 주 참석자들이었고 이명박 당시 사장도 참석하곤 했는데 정 박사는 그 바로 옆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곤 했다.
왕회장이 현실 정치에 뜻을 두고 있을 무렵인 것으로 기억했다. MB가 작심한 듯 인천제철을 자신에게 떼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정 회장은 회의가 끝난 직후 “별 미친 놈 다보겠다. 인천제철을 달라니 가당치 않다”고 매우 화를 냈다고 한다.
MB가 현대를 떠나며 빅딜을 시도했는데 이것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것. 이후 MB는 결국 30년 정을 끊고 당시 여당인 민자당의 전국구 의원으로 발 빠른 변신을 했다. 이때 이후 정주영 일가와 MB간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형성됐음에 틀림없다.
■기자접대비 천만원의 진실
이번 사건을 놓고 미정산 금액 1천여만원에 대한 MB측의 미결제가 원인이라고 주간조선에 보도된 적이 있었다. 이에 대한 진상은 다음과 같다. 재력가인 MB는 30여년간 경제계에서 활약해왔던 만큼 매사에 계산적이고 치밀하며 매우 꼼꼼하다는 세평을 들었다.
선거기간 내내 기획단에서 활동하던 이들은 꽤 풍족한 활동비를 여유있게 썼다. 다양한 형태의 경비지출은 영수증 처리만 제대로 처리하면 결제됐다. MB 자신이 수리에 매우 밝아 자금부분은 꼼꼼하게 살폈다.
MB는 재력가라는 유명세로 인해 비교적 풍부한 자금 지출에도 불구하고 항상 주위로부터 ‘짜다’는 비평을 들었다.
내가 캠프에서 담당했던 업무 중 하나는 언론대책의 일환인 ‘기자관리’였다. 수시로 기자들에게 전하는 ‘촌지’는 거의 대부분 C비서관이 늘상 준비하고 다니며 회식시 MB를 대신해 전달했다.
총선 이후 나는 그간 친하게 지내던 몇몇 기자들로부터 ‘당선사례’에 시달려야만 했다. ‘술한잔 사라’는 주문이 쇄도했다. (하지만) 선거기간 중 비교적 풍요롭던 자금이 선거 종료와 함께 갑자기 메마르기 시작했다.
선거직후 국회로 돌아온 나는 고갈된 자금으로 뒤풀이를 해대느라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주머니에 돈이라고는 집에서 받는 1만원의 용돈이 전부였기에 이런 제의가 무서웠다. 사정을 C비서관에게 말했지만 그 역시 구체적인 도움을 줄 수 없다는 답변뿐이었다.
결국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외상거래’ 뿐이었다. 1차로 밥을 먹이고 2차로는 술집에서 마무리를 했다. 선거직후 연일 새벽 2~3시가 돼서야 퇴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주군을 위해서라면’이라는 자세로 이를 악물고 버티었다.
매일 반복되는 술자리로 몸은 만신창이가 됐다. 선거 후 근 두 달 가까이 지내는 동안 외상이 쌓여 1,000여만원이 다 됐고 이 사실을 C비서관에게 알렸다.
하지만 황당한 답변을 들어야만 했다. ‘내가 내 친구들과 같이 먹은 술값을 왜 MB가 갚아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한마디로 기가 막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아마도 정치초년생인 MB가 당연히 내릴 수 있는 결론이었을 것이다. 사건 이후 주간조선에서 이 문제를 집중 다뤘으나 나는 이를 만류했다. 이후 캠프에서 탈퇴한 뒤 퇴직금과 일부 개인 비용으로 이 부분에 대한 결제를 했다. 이 문제는 세인으로부터 평가되길 바란다.
■MB의 재산 축적 의혹
14대 국회의원 재산 등록 때도 그 축재 과정을 놓고 이러쿵 저러쿵 말들이 많았다. 본인은 자신이 몇 배나 고생해 땀흘려 번 돈이라고 한사코 주장했으나 이를 믿는 사람은 별로 없는 분위기였다.
국회비서로 활동하던 1995년 말쯤으로 기억되는 어느 날 국회사무처 감사관실로부터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MB의 재산등록시 누락된 부분이 있으니 소명하라는 것이었다. 마산지역인가 소재하고 있는 다가구 주택 10여채가 MB 명의로 돼 있으나 재산등록시 누락됐다는 내용이었으며 등기부 등본까지 첨부돼 있었다.
나는 이 사실을 보좌관에게 보고했지만 그 뒤 어떻게 처리됐는지는 잘 모른다. MB는 유명세에 걸맞게 재산문제로도 여러차례 골머리를 썩힌 바 있어 이명박 대통령 선거기획단의 회의에서조차 이 문제가 거론되기도 했다.
이 외에도 김씨가 준비중인 <이명박 리포트>에는 이 전시장과 사생활 문제가 집중 거론됐다. 하지만 ‘정치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 ‘이명박의 공직자 재산등록과 연관된 뒷 이야기’ 등은 법적인 문제 자문 중이라며 공란으로 남겨져 있다. 당초 공언한 여자 문제나 종교 문제 등도 아직은 마무리가 되지 않았거나 법률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대해 권영옥 전사무국장은 “김씨가 계속 원고를 보내 가필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나는 협조할 이유가 없다”면서 “위증교사 주장은 거짓이다.
이 전시장은 이를 교사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고 오히려 돈을 받아내려고 요구했던 게 김씨다”라고 반박했다. 위증은 오히려 김씨가 자발적으로 했다는 게 권 전국장의 말.
권 전국장은 이어 “김씨는 당시 상황을 잘 알지도 못했다”면서 “가필을 요청하는 등 계속해서 책을 각색해 나가고 있다”고 덧붙였다. 진실게임은 이
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될 전망이다.
#“시간 약속 안 지키기로 유명”- MB의 ‘떡값 이야기’
김유찬씨는 <이명박 리포트>의 초고에서 무엇보다 그의 사람 경영을 문제 삼는다.
여기에는 이 전시장의 아랫사람 관리에 대한 이야기도 적지 않은데 대표적으로 소개된 것이 ‘이명박의 떡값 이야기’다.
김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선거운동 기간 중 명절을 맞이했다. 유권자들을 설득하느라 지구당 조직이 분주하게 움직이는데 여비서를 통해 당직자들에게 주는 떡값봉투가 준비됐다. 그러나 정작 떡값을 주는 MB가 지구당에 나타나질 않았다.
낮시간 지역을 뛰던 당직자들이 저녁 무렵 하나 둘 지구당으로 모여들었는데 이들의 마음 속 한구석에는 떡값봉투를 기대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오후 9시가 다 돼 가도록 MB는 나타나질 않았고 결국 고향길을 서둘러 떠나야 하는 참모들과 당직자들은 하나 둘 실망의 빛이 역력한 채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오후 9시 30분경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여비서가 받았는데 MB가 그 시간까지 남아있는 이들을 체크한 듯 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이들에게만 떡값 봉투가 건네졌는데 그 속에는 달랑 30만원이 들어있었다.
##“이대 출신은 OK 숙대는 안돼” - 사생활 집중거론
‘숙대 출신은 안 돼’.
김유찬씨가 이명박 전시장의 사생활을 집중거론한 <이명박 리포트>의 초고는 당초 예고된 제목에 비해 동떨어진 부분도 없지 않다.
특정 학교를 지칭해 관심을 모았던 ‘숙대 출신은 안 돼’ 부분도 MB가 직접 발언한 내용은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김씨가 설명한 요지는 이렇다.
MB 의원회관의 여직원은 ‘이대출신’이어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현재의 A(이대 불문과)도 그렇지만 그전의 B(이대 정외과)도 그랬다. 그러나 안 좋은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MB 사무실에서는 이대출신만 뽑는다는 이야기가 나돌기 시작했다.
소문의 근원은 A가 사의를 표명하고 그 후임을 뽑으면서부터다. 추천된 이들 중에는 14대 국회시절 다른 의원실에서 근무했다던 여직원도 끼여 있었는데 숙대 출신이었다. 현 윤보좌관이 소개를 받아 MB에게 천거했는데 퇴짜를 맞았다.
결국 이 사건으로 MB 사무실에서는 이대 출신만 뽑는다는 소문이 나돌게 됐고 MB가 학력에 대한 일종의 콤플렉스 같은 것이 있는 게 아닌가 의심하는 이들도 있었다.
김승현 okkdoll@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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