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 | 수원 강의석 기자] 수원시의 역사고찰을 통해 수원의 우수성과 수원만이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을 널리 알림으로써 수원시민임을 자부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수원시의 역사를 담았다.
수원시는 757년(경덕왕 16)에 전국의 지명을 한문식으로 바꿀 때 수원 지역은 ‘수성군’으로 됐다.
고려시대에는 수주라 했고 고려 1271년(원종 12)에 수원도호부가 돼 수원이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했다.
이후 수원부→수원군→수원부 등으로 변화를 거듭하다가 조선조에 와서 수원도호부→수원군→수원부→화성유수부→수원군→ 등으로 바뀌면서 1949년에 수원시로 정착하게 됐다.
▲ 고대의 수원지역
수원 지역에서는 수십만 년 전인 구석기 시대부터 인류가 정착하여 살아왔다. 수원의 파장동과 옛 수원 지역인 대야미동에서 구석기 유물인 곧은날 긁개와 주먹 도끼 등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수원 지역에서 구석기(8000년 전) 인류가 존재했다는 것이 확인된다.
또 수원 지역에 다수의 고인돌이 존재하고 수원시 서둔동 여기산에 집자리 유적까지 발견된 것으로 보아 청동기 시대(3000~5000년전)에서 초기 철기시대(2000-3000년전)에 사람들이 집단을 형성해 거주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마한 54개국 중에서 현재 수원 지역에 위치했던 것으로 비정된 나라는 원양국·모수국·상외국 세 나라이다. 모수국은 구읍치 시대의 수원 지역으로 비정할 수 있으며, 특히 모수국은 광개토태왕비문의 백제 정벌 58성에 나오는 모수성으로 추정된다.
▲ 전성기를 이룬 삼국시대
삼국 시대에 수원 지역을 최초로 차지했던 국가는 백제였다. 백제는 3세기 중엽 고이왕 대에 이르러 급격히 발전해 고대 국가 체제를 완성했으며 지금의 경기도 지역 대부분이 당시에 백제의 영토에 포함돼 있었다.
이후 고구려의 남하 정책을 통해 수원은 백제로부터 고구려의 영토에 편입돼 그 관할 하에 들어갔다. 고구려는 압록강 유역에서 건국해 4세기 중엽에서 6세기 초에 걸치는 시기에 전성기를 이루었다.
이 때 고구려는 한강 유역과 그 주변인 수원 지역을 확보해 고구려의 영토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각 지역의 이름을 고구려식으로 바꾸었는데, 이 때 수원 지역의 이름은 ‘매홀’이라고 했다. 이는 ‘물골’을 뜻한다.
이후 수원지역은 백제·신라 가 번갈아 점령하였고 신라가 통일한 후 한주에 속했다.
▲ 고려시대 형성과정
태조가 후백제를 치기 위해 남정할 때 군인 김칠 · 최승규 등 200여 인이 귀순해 왔다. 그 공으로 940년(태조 23)수주로 승격됐다. 그 뒤 995년(성종 14)에는 도단련사를 두었다가 1005년(목종 8)에 혁파했다. 이 때 이름을 한남 또는 수성이라 했다.
1018년(현종 9) 지수주사를 두었고, 안산 · 정송 · 용성 · 영신 · 쌍부 등의 현이 내속하였다. 1271년(원종 12) 몽고병이 대부도에 쳐들어왔을 때 섬사람들이 몽고병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니 부사 안열이 이를 평정하였다. 그 공으로 수원도호부로 승격되었다.
뒤에 인주(지금의 인천)에 붙였다가 곧 수주목으로 고쳤다. 1310년(충선왕 2) 목의 지위에 있는 모든 고을을 폐할 때 수원부로 강등됐다. 그 뒤 1362년(공민왕 11)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고을사람들이 이를 맞아들여 양광도에서 가장 먼저 항복했다. 그래서 다시 군으로 강등됐다. 이에 고을사람들은 재신 김용에게 뇌물을 바쳐 다시 부로 승격됐다.
▲ 르네상스를 이룩한 조선시대
1395년(태조 4)에 수원부가 양광도에서 경기도로 편입됐으며, 1413년(태종 13) 도호부가 됐다. 1456년(세조 2) 진을 설치하고 판관을 두어 서울의 수호를 튼튼하게 하는 보제도의 한 곳이 됐다.
1526년(중종 21) 고을사람이 부모를 죽인 사건이 일어나서 군으로 강등됐다. 그리고 진이 혁파돼 인천으로 옮겨졌다가 1535년에 다시 진으로 복구됐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1789년(정조 13)양주 배봉산에서 수원 읍치의 진산인 화산으로 옮겼다. 그런 다음 이곳에 있던 읍치를 모두 지금의 팔달산 밑으로 옮겼다.
이 때 수원향교도 봉담면 와우리에서 옮겨 왔다. 그리고 1793년에는 수원부를 화성유수부로 승격시키고 유수로 하여금 장용외사행궁정리사를 겸하게 했다. 또한 정약용이 활차(도르래)로 거중기를 만들고 녹로를 사용해 각종 시설을 고루 갖춘 수원성을 쌓았다.
▲ 근대 수원역사 이야기
1895년(고종 32)에 지방관제가 바뀌어 군이 됐다. 이듬해 경기도관찰부의 소재지가 되었다가 1910년에 서울로 이전됐다. 이 때 화령전에 모셨던 정조의 진영도 서울로 옮겨가니 군민들은 땅을 치며 통곡했다.
'수원군읍지'에 따르면 1899년의 호구 수는 1만2579호, 4만9708명(성내 956호)에 40면 449리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섬을 제외한 남양군을 폐합해 수원면이 됐다가 1931년 읍으로 승격됐다.
근대 인물로는 3·1독립운동에 앞장서서 활약했던 교육가 김세환(金世煥)과 3·1독립운동과 항일민족운동에 몸바쳐 일하다 붙잡혀 복역한 이선경이 있다. 또한 서양화가·여류문학인이었던 나혜석도 이 고장 출신이다.
▲ 수원시의 현대사
1949년 8월 15일에 시로 승격됨에 따라 수원군의 다른 지역은 화성군으로 개칭됐다. 1963년 1월 1일화성군의 20개 리를 편입했다. 같은 해 서울에 있던 경기도청의 이전이 결정돼 1964년 10월 15일 도 청사를 신축에 들어가 1967년 6월 23일 완공했다.
기공 당시에 ‘수원시민의 날’을 제정하고, 이를 경축하는 화홍문화제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정조의 지극한 효성을 기리는 효의 상징도시로서 전국 시·도에서 추천된 효행자를 표창하고 있다.
1983년 2월 15일 용인군 수지면 이의리와 하리를, 1987년 1월 1일화성군 매송면 금곡리와 호매실리를 편입했다. 1988년 7월 1일 권선구와 장안구를 설치했으며, 1993년 2월 1일에는 팔달구가 신설됐다.
1994년 12월 26일 화성군 반월면 일부와 태안읍 일부, 그리고 용인군 기흥읍 일부를 편입했다. 1995년 4월 20일에는 화성군 태안읍 신리·망포리 일원을 편입했다. 도청의 이전과 함께 각종 기관·단체의 이전으로 도 행정의 중심도시가 됐다. 2003년 11월 24일 영통구가 신설됐다.
따라서 많은 교육기관과 산업체를 유치하는 등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그리고 농업과학의 중심이 되었다. 또한 동수원에 신도시를 형성, 개발해 나가는 등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 수원의 위치와 지형
수원시는 수도 서울에서 남쪽으로 40.7km가 되는 경기도 중남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은 용인시 수지면 및 기흥읍에, 서쪽은 안산시와 화성군 매송면, 남쪽은 화성군 태안읍과 북쪽으로 의왕시에 접해 있다.
수원시의 동단의 극점은 동경 127도 05분인 팔달구 하동이고, 서단의 극점은 동경 126도 56분인 권선구 금곡동으로서 동서간 14.3km를 이루며, 남단의 극점은 북위 37도 13분인 권선구 대황교동이고 북간의 극점은 북위 37도 21분인 장안구 상광교동으로 남북간 거리는 13.9km를 이룬다.
수원의 지형을 살펴보면 대체로 동북에서 서남 방향으로 향해서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북, 동 및 서 3면이 광교산맥에 에워싸이고 남쪽만이 넓은 평야지대로 열려 있어 일종의 계곡 위에 펼쳐진 도시라고 할 수 있다.
광교산맥의 주봉인 광교산은 수원시의 북쪽에 위치에 있으며 광교산 정상의 높이는 해발 582m로서 북쪽의 관악산보가는 47m 정도가 낮지만 산의 용태나 규모를 볼 때 한강 이남 경기도에서는 제일가는 명산이라 할 수 있다.
광교산맥은 동으로는 성남시를 거쳐 과천의 청계산에 이어지고, 북으로는 백운산을 이어 광주의 고분현에, 동남으로는 용신이 수지면 일대에, 서쪽으로는 의왕시 일대의 지맥과 닿아 있다. 또 남으로는 광교산 바로 턱밑에 형제봉을 구고 상광교, 하광교의 두 골짜기를 이루면서 마치 양팔로 수원시를 감싸안은 듯한 형국을 이루고 있다.
민선6기 염태영 수원시장의 등극은 수원시를 재도약의 도시로 만들어 놓았다. 수많은 그의 업적은 시민들로부터 갈채를 받았고, 수원인임을 자랑할 수 있게 했다.
또 2016년 수원화성 방문의 해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2017년 수원시의 6개 대주제로 또 다른 도약을 향해 증진하고 있다.
염태영 수원시장은 “할 수 없다를 할 수 있다”로 바꾸어 놓았고, 수원을 찾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파했다. 그리고 정조대왕의 얼을 받들어 고도 수원을 빛나는 삶의 터전으로 발전시키고 있는 중이다.
수도권 강의석 기자 kasa59@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