푼돈 훔치고, 먹고 튀고 ‘현대판 장발장’ 늘어나는 까닭
푼돈 훔치고, 먹고 튀고 ‘현대판 장발장’ 늘어나는 까닭
  • 권녕찬 기자
  • 입력 2017-02-03 20:28
  • 승인 2017.02.03 20:28
  • 호수 1188
  • 27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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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 불황으로 먹고살기 힘들다 보니…
<뉴시스>
경제 사정 악화·노인 빈곤층 증가 등 사회 구조적 문제
전문가들, “처벌 규정 강화와 함께 사회적 안전망 필요”
 
[일요서울 | 권녕찬 기자] ‘푼돈’을 훔치거나 무전취식, 무임승차 등 생계형 범죄가 급증하고 있다. 경찰청에 따르면 무전취식·무임승차에 대한 즉결심판·통고 처분 건수가 2012년 대비 지난해 2배 이상 증가했다. 배고픔을 못 이겨 1만 원 내외의 금품을 훔친 경우도 증가 추세로 나타났다. 삶이 어려워 생계형 경범죄를 저지르는 ‘현대판 장발장’이 사회 곳곳에 잠재해 있는 것이다.
 
# 70대 할머니 A씨는 지난해 12월 충북 청주시에 있는 한 마트에서 빵을 훔치다 주인에게 적발됐다. 이 할머니가 훔친 빵은 크림빵과 팥빵 3개였다. 할머니는 주인 B씨가 배달차량에서 빵을 내리는 사이 상자 안에서 빵을 훔쳤다. B씨는 빵이 감쪽같이 없어지자 CCTV를 돌려봤고 할머니가 빵을 훔쳐가는 장면을 찾았다. 얼마 후 할머니를 붙잡은 B씨가 “왜 훔쳤냐”고 묻자 할머니는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 폐지를 수집하는 C(75)씨는 지난해 3월 서울 서초구 주택가를 지나다가 문 앞에 놓여 있는 택배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값비싼 물건 같아 순간의 유혹으로 훔쳤지만, 뜯고 보니 2만 원 가량의 생활용품이었다. 집주인의 신고로 붙잡힌 C씨는 잘못했다고 지문이 닳도록 빌어야 했다. 다행히 경찰은 C씨가 범죄 전력이 없다는 점을 감안해 형사 입건하지 않기로 했다.
 
생계형 절도죄를 저지르는 현대판 장발장이 큰 폭으로 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금태섭 의원이 지난해 경찰청 자료를 토대로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2011년 1만563건이던 1만 원 이하 절도범 검거는 지난해 4000건 이상(1만4810건) 증가했다. 같은 기간 1만원 초과∼10만 원 이하 절도범 검거는 3만9566건에서 5만1551건으로 1만2000여 건, 10만원 초과∼100만 원 이하 절도범 검거는 11만2486건에서 12만3225건으로 1만 건 이상 증가했다.
 
즉결처분 4년 새 2배 ↑
警, ‘장발장’ 구제 기구 운영

 
빈곤층에 의한 무전취식이나 무임승차도 늘었다. 이 생계형 범죄에 대한 즉결심판·통고 처분 건수는 2012년 9889건에 불과했지만 매년 가파르게 늘어 지난해에는 2만5383건으로 4년 새 2.56배로 급증했다.

무전취식과 무임승차는 현행법상 경범죄처벌법에 따른 처벌 대상이다. 하지만 특히 무전취식은 죄를 판단하기 어려운 범죄로 꼽힌다. 피해금액이 몇천 원에 불과한 사례가 많고 범인이 실제 형편이 어려운 경우도 많아 일일이 형사처벌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경찰은 이 같은 생계형 범죄를 저지른 ‘장발장’들을 구제해주기 위해 ‘경미범죄심사위원회’라는 기구를 운영하고 있다. 지난해 3월 설치돼 전국 142곳 경찰서에서 운영 중이다. 단순 절도나 무전취식 등 가벼운 범죄를 저지른 경범죄 사범을 심사해 피해 정도와 죄질 등 사유에 따라 처분을 감경해준다. 순간 실수로 죄를 짓게 됐을 때 처벌해서 전과자를 만드는 대신 반성의 기회를 주자는 취지다.

하지만 피해 금액이 크거나 의도를 가지고 상습적으로 무전취식이나 무임승차를 저지를 경우에는 실형을 선고받기도 한다. 2015년 7월부터 지난해 4월까지 부산 지역 병원과 술집, 다방 등에서 40여 차례 이상 무전취식을 일삼은 D씨는 지난달 31일 실형을 선고받았다.

지난달 24일엔 서울 은평구 응암시장 동네조폭 ‘공포의 빡빡이 2인조’가 상습 무전취식을 하다가 경찰에 구속됐다. 이들은 지난해 8월부터 여성 혼자 운영하는 식당만 골라 13차례에 걸쳐 150만 원 상당의 무전취식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경기 악화로 얇아진 주머니
취약 계층 지원 늘려야

 
전문가들은 현대판 장발장이 급증하고 있는 데 대해 장기 불황으로 인한 주머니 사정을 주요 원인으로 꼽았다.

실제 실물 경기, 부동산 경기 등 각종 경제 지표에 대한 전망은 갈수록 어두워지고 있다. 특히 소비자 심리는 ‘금융 위기’ 때만큼 악화된 것으로 나타났는데, 한국은행의 ‘2017년 1월 소비자동향조사 결과’를 보면 1월 중 소비자심리지수(93.3)가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가 한창이던 2009년 3월(75.0) 이후 최저 수준인 것으로 조사됐다.

이윤호 동국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경제 사정이 악화돼 먹고살기가 힘들다 보니 특히 빈곤층은 (생계를 위한) 합법적인 수단이 마땅치 않아 도둑질을 하게 된다”며 “전국 교도소 평균 수용 인원은 5만 명 정돈데, ‘IMF 시절’에는 2배 많은 10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수용됐다”고 말했다.

생계형 범죄를 줄이기 위해 악질 상습범에 대해서는 처벌 규정을 강화하는 한편 취약계층에 대한 지원을 늘려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강조했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한 매체에서 “생계형 범죄의 배경엔 장기 경기 침체와 노인 빈곤층 증가 등 사회 구조적 문제가 있다”며 “동네조폭 등 악질 사범에 대한 처벌 규정은 구체화하되 생계형 범죄자에 대해선 이들이 범죄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는 게 중요하다”고 밝혔다.

이윤호 교수도 “(생계형 범죄자들이) 훔치지 않아도 살 수 있도록 지원하는 국가의 사회적 안전망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권녕찬 기자 kwoness7738@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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