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여성’이라는 프레임에 가둔 여성 정치인들

17대 총선을 목전에 둔 2003년 겨울, 여성계는 극히 낮은 여성 의원 비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전체 의원의 30%에 해당하는 100인을 국회로 보내기 위한 운동을 전개했다.
그 결과 제16대 국회에서는 5.9%에 불과했던 여성 국회의원이 17대 국회서부터는 급격히 증가해 20대 국회에서 17%에 이르렀다. 그러나 한국사회의 성불평등 수준은 세계 116위(144개국, 2016년), 여성정치참여 수준도 세계 112위(193개국, 2016년)로 여전히 저조하다.
이런 우리나라의 수준은 여성 국회의원 비율이 30%를 넘는 국가가 지난 10년 사이 19개국에서 46개국으로 늘어난 것과 대비된다.
우리나라 여성 정치인은 과거보다 증가했지만 선진국에 비해서는 턱없이 적은 수준이고 민주주의 지표인 양성 평등의 측면에서 보면 아직 갈 길이 멀다.
특히 이런 여성의 ‘정치적 과소 대표’ 현상은 우리나라 민주주의 수준에 대한 국제적 평가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실제로 영국의 대표적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가 매년 발표하는 민주주의 지수(Democracy Index)를 살펴보면 우리나라의 ‘정치참여’ 영역의 점수는 10점 만점에 7.22점으로 매우 낮은 수준에서 정체돼 있는데 이 ‘정치참여’를 평가하는 세부지표 중에는 ‘여성의원 비율’이 포함돼 있다.
여성 정치는 깨끗하다?
“우리 정치가 부패의 악순환을 되풀이한 건 남성 중심 문화 때문이다. 여성이 맑은 정치의 새판을 짜야 한다.”
여성계가 여성의 정치 참여와 정치 역량 강화를 위해 강조한 내용이다. 여성계는 “현재 정치는 쉽게 부정·부패에 노출되는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다”며 “이는 지금까

이에 따라 여성 정치인은 기존의 남성 정치인들과는 다르게 양심과 정의를 바탕으로 한 정치의 도덕성 회복 및 건전한 정치문화 정착에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됐다. ‘기존의 남성 기득권에 저항하고 도전할 힘이 있는 여성’, ‘기존의 여성들이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힘이 있는 여성’이라는 이미지를 스스로 구축한 것이다.
그러나 국회에 입성한 이후 여성 정치인이 과연 여성정책을 위해 얼마나 힘껏 뛰어다녔는지, 권력에 줄서기하며 제 밥그릇 찾는 데 급급하지는 않았는지 의구심이 든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여성 정치’ 성과는?
국회입법조사처에 따르면, 여성 관련 법안에 대한 개정을 두고 남성의원과 여성의원 간 입법활동은 큰 차이가 없다. 19대 국회 동안 정당 구분 없이 남성과 여성의원의 발의안 수를 살펴보면 남성 의원은 133개, 여성 의원은 139개를 발의했다. 이중 여성관련 법안과 관련해 여성의원이 6개 정도의 발의안을 더 제출했다.
19대 국회는 헌정사상 처음으로 행정부 수반이 여성인 상황에서 구성됐고, 17대 국회 이후 여성 국회의원이 급격히 증가해 47명이나 당선된 국회이다. 여성 의원의 수가 많아졌다는 것은 여성의 삶의 질을 개선시키는 입법활동이 더욱 활발해지는 전제조건이 된다.
그러나 국회 입법조사처 보건복지여성팀 조주은 입법조사관이 쓴 ‘19대 국회 여성분야 입법 현황과 과제’ 보고서에 따르면 19대 국회의 여성법안 처리 성적표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19대 국회 동안 여성발전기본법과 성매매방지법 등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소관 여성 관련 8개 법률에 대해 172건의 법안이 발의됐다. 그러나 이 중 고작 18건만 통과됐을 뿐이고 62건은 국회에 계류 중이다. 12건은 폐기됐고 80건은 비슷한 성격의 법안과 합쳐져 폐기 처리됐다. 여성 의원 수의 증가는 남성이 해결하지 못한 차별적인 이슈를 국회에서 논의하고 해결해갈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 정치권 내에서 여성 정치인은 여성 대중을 적극적으로 대변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컸는데 결과가 이에 못 미치자 실망의 목소리가 작지 않다.
19대 국회는 여성 분야에서 일부는 입법 성과를 거뒀다. 모든 성폭력 범죄에 대한 ‘친고죄’가 폐지됐다. 친고죄는 피해자가 피의자를 고소해야만 피의자를 처벌할 수 있는 죄다. 성범죄를 당한 것을 수치스러워하는 여성이 많아 오히려 성범죄의 사각지대를 만드는 법으로 간주돼 왔다. 그러나 이번에 친고제가 폐지됨으로써 피해자가 고소를 하지 않더라도 목격자의 진술로 피의자를 처벌할 수 있어 성범죄 고소·고발의 길이 확대됐다.
또한 ‘성매매’ 문제에 있어서 성매매피해자 보호 강화가 이뤄졌다. ‘성매매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전부개정법률안’이 통과돼 성매매 예방교육 강화, 성매매방지를 위한 홍보영상 제작, 지원시설 입소기간 연장 등이 제도화됐다.
19대 국회가 개원하면서 ‘국회 아동·여성 대상 성폭력 대책 특별위원회’가 설치된 것이 성과의 발판이 됐다.
또한 지난 1995년 여성에 대한 인식 및 관련 법·제도 등 사회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자 제정된 ‘여성발전기본법’이 20년 만에 ‘양성평등기본법’으로 변경되는 등 법안 내용이 시대에 맞게 전부 개정됐다. 이로써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경우 정책결정과정·공직·정치·경제활동 등 사회 전 분야에서 여성과 남성의 평등한 참여를 도모하기 위한 시책을 마련했다. 그리고 공공기관의 장은 관리직 목표제 등을 시행해 여성과 남성이 균형 있게 임원에 임명될 수 있도록 했다. 아울러 국가기관과 사업주 등은 자녀양육에 관해 엄마뿐만 아니라 아빠의 권리를 보장함을 물론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의 일 가정 양립을 위한 여건도 마련토록 했다.
그러나 경력 단절 여성이 큰 화두가 되었음에도 여성의 경력 단절 등의 내용을 포함한 법안은 단 한 건도 통과되지 못했다. 정부는 ‘재직 여성 등의 경력 단절 예방’을 주요 과제로 수립했지만 이를 뒷받침해줄 법은 상임위에서 계류 중인 상황이다.

특히 19대 국회가 ‘성차별금지법안’을 놓쳐 커다란 아쉬움을 남겼다. 성차별금지법안은 성차별과 성희롱 인정 범위를 확대·구체화하고 처벌 수위를 높여 피해자 보호를 강화하는 내용을 담았지만 19대 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했다.
앞서 언급한 ‘성매매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룰 전부개정법률안’을 성과로 볼 수 있지만 여전히 미흡하다. 성매매 방지는 예방, 피해자 보호뿐만이 아니라 가해자 처벌이 함께 이뤄져야 효과가 있는데 지금은 피해자 보호에만 초점을 맞춘 반쪽자리 법안만 통과됐기 때문이다. 현재 계류 중인 ‘성매매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 전부개정법률안’이 함께 통과돼야 성매매 방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여성계는 그 동안 여성의 권익과 참여를 증진시키기 위해서는 여성의 정치 참여율을 높이고 공공기관에 여성임원을 확대하는 법이 마련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한 의회와 공공기관 등의 영역에서 국민 중 50%에 해당하는 여성들의 대표성을 높이는 것이 우리나라의 선진민주국가로의 진입을 앞당기게 할 시금석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여성 정치인들의 ‘여성 관련 법안’ 발의 건수를 살펴보면 이러한 주장이 타당성이 있는지에 대해 의문이 든다.
새누리당 김을동 의원은 ‘여성의 정치 참여 확대’를 주장하며 출마해 당선됐지만 8년 동안 대표 발의한 법률안 중 ‘여성’과 관련된 법안은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개정안과 결혼중개업의 관리에 관한 개정안뿐이다.
장애인 딸을 둔 새누리당 나경원 의원은 사회·정치적 소수자에 대한 관심 때문에 정계에 입문했다고 늘 강조했다. 그럼에도 대표 발의 법안 중 ‘여성’과 관련된 법안은 호주제 폐지로 인한 관련 법 조항의 개정, 여성재소자의 처우개선을 위한 관련법으로 역시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하다.
여성계가 남성 중심의 정치에 문제점을 제기하며 목소리를 높였기에 여성 정치인에 대한 기대가 그만큼 컸고, 그에 따라 실망 또한 크다는 평가다.
여전한 남성 주류 정치
20대 국회의원선거 때 새누리당, 더불어민주당은 비례대표 공천 문제로 내내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소수정당과 정당정치 활성화, 여성 등의 정치적 소수자를 보호하는 민주주의 실현의 장치인 비례대표제는 다른 선진국들이 국민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오랫동안 갖춰온 제도다.
그러나 20대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의 비례대표 후보 36명 중 여성은 19명밖에 되지 않았으며 그들은 매 홀수 번호에 여성을 추천해야 한다는 조항을 어기고 15번에 남성 후보를 선택했다. 새누리당은 당내 보수혁신위원회가 결의안을 발표해 여성을 비례대표에 60%로 할당하는 의무할당제를 시행하겠다고 약속했으나 형식만 지키고 여성을 후반부에 배치하는 등의 꼼수를 부렸다. 여야가 이 사실에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반응을 보이며 남성 주류의 정치프레임을 굳건히 유지한 데는 여성 정치인들의 침묵이 큰 몫을 했다.
특히 20대 총선에는 여성혐오 발언을 한 정치인들이 출마하기도 했다. 이런 발언에 아무런 사과나 제재 없이 출마한다는 것은 그만큼 현존하는 젠더 문제에 대한 보수적 시선과 무관심에 대해 여성 정치인마저 침묵한 데서 비롯됐다는 지적이다.
새누리당 의원 김무성은 “애 많이 낳는 순서대로 여성 비례 공천을 줘야 한다” “애기 안 낳으신 분들은 잘릴 것”, 김을동은 “여성이 너무 똑똑한 척을 하면 밉상이다” “약간 좀 모자란 듯 표정을 지으면 된다”고 여성 혐오 발언을 서슴없이 했다.
정의당도 결코 여성 혐오 논란을 피할 수 없었다. 청년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위해 인디 밴드인 중식이 밴드와 총선 테마송 ‘여기 사람 있어요’를 함께했으나 중식이 밴드는 연이은 여성 혐오 가사로 물의를 빚었고 작사, 작곡을 맡은 정중식 씨는 ‘나는 남자라서 여성의 입장을 잘 모른다, 죄송하다’는 다소 의미가 모호한 해명 글을 SNS에 게재해 더 큰 논란을 만들었다. 또한, 이 사태에 대해 당내 갈등이 일어났으나 몇몇 당원들은 사건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며 정의의 실현이라는 당의 기본 슬로건을 무색하게 했다.
한국 여성이 참정권을 얻게 된 지는 70년이 채 안 됐다. 아직 구조적으로 여성정치인이 설 자리가 부족하고 여성을 위한 정책도 부족한 상태다. 여전히 여성들의 정치 참여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정치는 남성의 몫이며, 정책은 남성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저변에 깔린 이상 한국 정치는 젠더 문제를 절대 극복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여성을 아는’ 진정한 여성 정치인이 필요한 때다. 이 사회에서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하며, 여성은 고질적인 젠더 문제 속에서 끊임없이 피해자의 역할을 감내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여성 정치인이 요구된다.
위기의 여성 정치
2016년은 여성 정치가 꽃망울을 터뜨리기도 전에 썩어 짓밟힐 수 있다는 위기감을 몰고 왔다. 늘어나는 여성 정치인 수는 그야말로 숫자일 뿐 과연 여성 정치가 남성 정치의 폐단을 막는 대안이 될 수 있는지 의구심이 들게 했다.

도덕성에서도 결코 우위에 있지 않았다. 2015년 한명숙 전 총리가 뇌물 수수로 구속된 데 이어 여성운동 산실이라는 이화여대에서 권력형 입학 비리가 터져 나왔다.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여성 지도자의 언행이 얼마나 천격(賤格)이 될 수 있는지 보여줬고, 이혜훈·나경원 의원과 조윤선 장관은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세간의 비아냥거림을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 공개 석상에서 볼썽사납게 맞부딪쳤다.
이 총체적 난국은 한국의 여성 정치가 걸음마 수준이란 걸 보여준다. ‘유리천장’은 뚫고 난 뒤가 더 위험한 법이다. 방심하는 순간 깨진 유리 조각들이 급소를 향해 날아든다. 얄팍한 양성 평등 의식 갖고는 어림없다. 여성의 정치 진출은 아직은 ‘개척기’인 데다가 ‘여성’이기에 남성의 몇 배에 해당하는 자기 관리와 철저함이 요구된다. 여성 정치인들은 ‘여성’이란 특혜를 업고 있다는 책무를 절박하게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장휘경 기자 hwikj@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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