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뒤엔 민초가 있다

이준익(51) 감독의 영화는 색깔이 분명하다. 그런 그가 <황산벌> <왕의 남자> <라디오 스타>등에 이은 신작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영화사 아침 제작)을 내놓았다. 이번 작품은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반란을 꿈꾸는 인물과 그 주변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감독은 웃음의 해학을 통해 당시 역사적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는데 중점을 두었다. 그의 영화연출 세계를 알아봤다.
“나이가 쉰을 넘었다. 성장통을 앓고 있는 견자라는 인물이 어쩜 나와 이렇게 같은지 모르겠다. 어린 시절 읽었던 <어린왕자>, <갈매기의 꿈>과 같이 가슴을 벌렁거리게 한 책들에서 느꼈던 감정들이 견자라는 인물에 투영돼 있었다.”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을 연출한 이준익 감독의 영화평이다.
그는 지난 4월 17일 서울 강남 삼성전자 홍보관에서 열린 제작발표회를 통해 연출세계와 극중에서 드러난 인물들에 평가를 했다.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1592년 임진왜란 직전, 혼돈의 시대를 틈 타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하는 반란군 수뇌 이몽학, 그에 맞서 세상을 지키려는 맹인검객 황정학, 아버지를 죽인 이몽학에게 복수하기 위해 황정학의 제자가 된 한견자, 정인을 향한 일편단심으로 이몽학을 찾아나서는 길에 합류하는 기생 백지 등이 영화 속 인물로 등장한다.
영화는 조선 중기 문신인 사상가 정여립(1546~1589)이 만든 대동계로 시작한다. 정여립은 역적으로 몰려 죽는다. 정여립의 죽음을 놓고 공방을 벌이는 대동계원들은 흐릿하고 뿌옇게 처리된다.
동인과 서인의 대립이 극에 달한 시대다. 왜구를 척결하려고 결성됐다는 대동계를 서인은 역도로 칭하고, 동인은 모른 척한다. 평등세상을 꿈꾸는 대동계의 멤버인 황정학과 이몽학은 정여립의 죽음 이후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게 된다. 남은 것은 상호 대립과 대치다.
이 감독은 극중 인물 ‘견자’에 강한 애착을 드러냈다. ‘견자’는 어린이 탤런트 출신 백성현(21)이 연기했다. 당대 최고 권력자의 아들이지만 서자인 신분 탓에 아무런 꿈도 갖지 못한 채 세상을 향한 울분으로 가득 차 있다. ‘이몽학’(차승원·40)에 의해 아버지가 죽자 복수를 위해 맹인 검객 ‘황정학’(황정민·40)을 스승으로 삼고 길을 떠난다.
이 감독은 “죽는 그날까지 성장을 멈추면 살아있는 시체, 좀비”라며 “‘좀비로 살지 말아야지’하며 견자라는 인물에 푹 빠지기로 했다”고 고백했다. 또 “원작의 견자가 태생 조건에서 탈피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자신으로 돌아온 것을 두 시간 안에 그려내는 것은 불가능했다”며 “현재 젊은이들이 보는 세계관이나 사회관이 어우러지게 해야 했는데, 소통이 될지는 모르겠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원작은 ‘견자’의 이야기가 중심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몽학과 황정학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 감독은 “본질적으로는 견자의 이야기지만, 견자 하나로만은 상업영화로 만들기에 협소한 면이 있어 원작의 배경에 있는 인물을 중심으로 끌어들였다”고 밝혔다. 그래도 “견자의 이야기가 영화 끝에 잘 보이도록 심혈을 기울였다”는 귀띔이다.
이 감독은 백성현에 대해서는 “영화 <왕의 남자> 등에서 만나려다가 항상 비켜가는 배우였다”면서 “하지만 어차피 만날 사람은 만나게 된다는 것이 있지 않나. 이번에 그렇게 됐다”고 만족해했다.
그는 “백성현은 견자가 가진 성장통을 눈 안에 가득히 가지고 있는 배우”라며 “현장에서 견자를 연기하는데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배우로서 강력한 자기 성장, 한계를 넘어서려는 내면이 이미 충만했다”고 극찬했다.
영화 속 무술 또한 시선을 압도한다. 홍콩의 화려한 액션이나, 일본 사무라이식 액션은 기대할 수는 없지만 사실적 리얼리티에 중점을 뒀다.
이 감독은 “무술 감독한테 멋지고 화려한 액션은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며 “치열하게 부딪히는 인간들의 몸부림이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주문한대로 위험한 순간에 잘 대처하면서 촬영해 멋진 장면을 구현했다”고 자부했다.
만화가 박흥용(51)씨의 1995년 작 동명작품이 원작인 영화는 원소스 멀티유스 장르적 결합의 형태다.
이 감독은 “원소스멀티유스는 각 장르의 고유 가치가 다 마모되고 소홀히 되는 단점이 있다”면서도 “한 장르에 머물러있던 개인의 창의적 결과물이 대중적으로 다량 소비돼 그 시대에 폭발력 넘치는 파워를 갖는다”고 강조했다.
이 감독은 “필연적으로 원소스멀티유스로 가야한다. 그러나 한 장르에 있던 고유 가치를 폄훼하거나 소홀히 하는 자세를 가지지 않아야 한다. 그러면 원소스멀티유스는 계속 활성화 될 것이다.”
<황산벌>(2003), <왕의 남자>(2005)에서 풍자와 해학으로 권력에 접근한 감독이 바라본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선 어떤 권력자와 민초가 등장할지에 영화팬들의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박태정 기자] tjp79@dailypot.co.kr
박태정 기자 tjp79@dailypot.co.kr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