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요서울|장휘경 기자] 지난 2012년 이른바 정치계에 핵폭탄과도 같은 바람을 일으키며 ‘안풍’의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줬던 안철수 국민의당 전 대표. 자신의 정치적 명분이자 슬로건으로 삼은 ‘새정치’를 전면에 내세우며 정치에 입문한 그는 18대 대선에서 야권 후보의 자리를 내주는 것을 시작으로 지난 5년 동안 숱한 정치적 부침을 겪어왔다.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를 거쳐 국민의당을 창당, 20대 총선에서 호남을 제패하면서 야권의 유력한 대권 후보로 떠올랐지만 2017년 1월 현재 문재인, 반기문 후보는 물론 이재명 성남시장에게까지 밀리며 지지부진한 지지율을 보이고 있다. 기득권과 구태정치 타파 등 그가 내세웠던 ‘새정치’는 국민적 기대감에 적극 부응하지 못했고 제시하는 정치 이념 기준이나 노선, 메시지 등도 모호하다는 지적이 그동안 끊임없이 제기되기도 했다. 색깔이 불분명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인 안철수 전 대표, 그는 과연 차기 대통령감으로 적합한 것일까?
지난 2012년, 18대 대선을 약 7개월여 앞둔 5월의 어느 날. ‘오마이뉴스’가 여론조사기관인 ‘케이스파트너스’와 함께 패널리서치 전문기관 ‘패널인사이트’에 의뢰해 실시한 ‘정치지도자 이미지조사’가 발표됐다. 당시 유력한 후보였던 한나라당의 박근혜 전 대표와 민주통합당의 문재인 상임고문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차기 대권자로 거론되던 때였다.
여론조사 결과는 뜻밖이었다. 응답자들이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대통령 후보는 박 대표나 문 고문이 아닌, 안철수 당시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었다.
또한 18대 대선에서 당선되기를 희망하는 정치인으로 응답자들의 39.2%가 안철수 원장을 뽑았다. 당시 야권의 경쟁자였던 문재인 고문을 뽑은 응답자는 12.8%였고 실제 대통령으로 당선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도 27.8%에 불과했다.
2012년 5월까지만 해도 제18대 대통령 당선에 가장 가까운 고지를 점했던 것은, 12월 실제로 경합을 벌였던 박근혜 대통령이나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아닌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였던 것이다.
안철수의 몰락, 그 원인은?
이처럼 안철수 전 대표가 정치권에 등장하면서 큰 주목을 받는 동시에 기대치가 높았던 것은 기성 정치권의 지리멸렬함에 대한 유권자들의 실망이 매우 컸기 때문이었다. 당시 ‘안풍’으로 회자되던 안 전 대표의 돌풍은 새로운 정치에 대한 대중의 갈증과 염원을 그대로 반증해주는 상징에 다름 아니었다.
애플 신화의 주인공인 스티브 잡스와 비견되며 성공한 기업인이라는 참신한 이미지로 정치권의 러브콜을 받아 최고의 주가를 올렸던 안철수 전 대표는, 그러나 2017년 1월 현재 대권주자 가운데 4위권에 머무는 등 추락하고 있는 중이다.
여론조사기관인 ‘리얼미터’가 지난 1월 23일 발표한 1월 3주차 여론조사에 의하면 안 전 대표는 7.4%의 지지율로, 문재인 전 민주당 대표(29.1%), 반기문 전 유엔총장(19.8%), 이재명 성남시장(10.1%)에 이어 4위를 나타냈다.
문제는 지난 20대 총선에서 전체 28석 가운데 23석을 석권, 자신이 창당한 국민의당 텃밭으로 인식된 광주·호남에서조차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인 전 대표에 더블스코어 수준으로 밀리고 있다는 사실.
‘오마이뉴스’가 지난 1월 21~22일 양일 간 여론조사 전문업체인 ‘타임리서치’에 의뢰해 광주와 전남·북 등 호남지역을 대상으로 주요 대선 주자에 대한 선호도를 물은 결과 다자구도에서 안 전 대표는 18.3%로, 39%의 지지를 얻은 문재인 전 대표에 20.7%포인트의 큰 격차로 밀렸다. 양자대결에서도 안 전 대표는 39.2%의 지지율을 보여, 50.4%의 지지율을 얻은 문 대표에 10%포인트 이상 뒤진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불과 4~5년 전 선풍적인 인기를 구가했던 정치초년생 안철수의 바람은 왜 그토록 짧은 시간에 잦아들었을까?
정치입문 뒤 ‘모호’해진 행적
안철수 전 대표가 걸어온 길은 그야말로 ‘입지전적’이라고 할 정도로 파격적이었다. 1962년 부산에서 출생한 그는 서울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땄다. 27세라는 어린 나이에 단국대 의예과 학과장에 올라 이미 세인들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의대 재학 중에 컴퓨터에 관심을 가져 우리나라 최초의 백신 프로그램인 V1, V2, V3를 만들었고 이후 7년간 낮에는 의사로, 밤에는 프로그래머로 종횡무진 활동하며 ‘바이러스 백신’계의 ‘전설’로 군림하기도 했다.
의사라는 우리 사회의 ‘기득권’의 길을 버리고 ‘안철수연구소’를 세워 본격적인 바이러스 프로그램 개발과 연구에 투신하게 된 점도 주목할 만하다. 연구소에서 10년 간 백신 프로그램을 개발하던 그는 돌연 미국으로 떠나 펜실베니아대 와튼스쿨에서 경영학 석사과정을 밟는다. 예상하지 못한 행보였다.
“중요한 결정을 할 때는 과거를 잊고 주위의 평가에도 연연하지 않으며, 미래 다가올 결과에도 욕심내지 않는다”는 그의 경영철학처럼 정치 입문 전까지 안 전 대표가 걸어온 길은, 그 자체로 도전과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청년정신이 원동력이 됐다.
그런 안 전 대표가 정치에 입문하면서 그에 대한 대중의 시각은 조금씩 바뀌었다. 출발은 나쁘지 않았다. 우선 자신의 브랜드인 ‘새정치’는 기존 정치판에 염증을 느낀 대중들에게 청량감 있게 다가왔다.
금태섭 변호사를 측근으로 기용해 검찰 개혁의 의지를 대선 캠프 단계에서 피력했고 한나라당 의원이었던 정책통 김성식 의원을 등용해 개혁 보수로의 외연 확장을 꾀하기도 했다.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에서 ‘아름다운 양보’를 이끌며 현실 정치에서 새로운 대안이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도 보여줬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게 다였다.
누리꾼들, ‘새정치’ 비아냥
안 전 대표의 트레이드마크인 ‘새정치’는 지금도 인터넷상에서 누리꾼들에게 종종 비아냥거림의 대상이 되곤 한다. 정치판에 발을 들인 지 5년이 다 돼가지만 그 실체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고 점점 더 모호해지는 것이 그 이유다.
그가 강조해 온 ‘새정치’는 ‘정치 혁신’, ‘합리적 개혁주의’ 등 정략적 슬로건만 난무하고 대안이 확실히 드러나지 않는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더욱이 기초의원선거 무공천과 국회의원 정수를 줄이자는 등의 현실성 없는 주장은 안 전 대표의 ‘새정치’가 무책임한 구호로 비쳐질 수밖에 없게 한다.
“대한민국 국방부에 군 인사권을 돌려주겠다”거나 “교육부를 없애자”는 그야말로 황당무계한 발언은, 이 부분들에 대한 고민이나 이해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사례이기도 했다.
안철수식 ‘새정치’에 대한 의혹과 더불어 그의 예견치 못한 행보도 논란이 됐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2012년 18대 대선 후보단일화 이후 행동 논란이었다.
당시 민주통합당의 문재인 후보와 야권단일화 협상을 벌이던 중 여론조사 룰에 합의하지 못하다가 안 전 대표는 스스로 후보직을 사퇴했다. 공정한 룰에 의한 단일화 후보 선출과 결과에 대한 승복을 통해 시너지를 일으켜 여권 후보에 승리하기를 바랐던 야권 지지자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결과였다.
협상 실패에 대해 양쪽 진영 모두의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 안 전 대표의 일방적인 후보 사퇴는 야권의 선거운동 동력을 떨어뜨렸고 부동층의 이탈을 가져왔다.
사퇴 이후에도 안 전 대표는 상당기간 칩거하면서 문 후보의 지원에 소극적이었고 급기야 선거 당일 미국으로 출국하는 등 ‘뒤끝(?)’있는 행보를 보임으로써 야권 지지자들의 빈축을 사기도 했다. 결국 그해 대선에서는 박근혜 대표가 51.6%의 지지율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 외에도 김수민 의원 리베이트 사건을 비롯, 신학용 의원 영입 논란과 박지원 의원 공천배제 제외 논란 등 이른바 ‘새정치’와는 전혀 무관한 스탠스도 많은 이들의 입길에 올랐었다.
모호한 ‘새정치’와 함께 정치인으로서 안 전 대표의 자질을 의심케 하는 부분이 바로 ‘소통부재’다. 한 때 그의 최측근이었던 금태섭 의원은 자신의 회고록인 <이기는 야당을 갖고 싶다>에서 안 전 대표의 ‘소통부재’를 꼬집었다.
특히 2014년 3월 26일, 민주당과 합당해 새정치민주연합을 출범시킬 당시 새정치추진위원회 사람들과 별다른 논의 없이 덜컥 합당을 발표해 논란을 빚기도 했다. 위원회 구성원들은 그야말로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 꼴이었다. 결국 그 때문에 위원회에 몸담았던 사람들 거의 전부가 안 전 대표와 결별해야 했다.
국민의당 창당 시 영입인사 소개 3시간 뒤 영입을 취소한 사례나 ‘일요일의 남자’라는 별명처럼 매번 일요일에 기자회견을 하고 또 기자들의 질의응답도 잘 받지 않는 사례 역시 ‘소통부재’의 전형적인 행태라는 견해가 많다.
‘우유부단’한 리더십, 사람을 잃다
‘간잽이’, ‘간철수’ 등 안철수 전 대표에게 붙은 별명의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우유부단’에 있다. 안 전 대표가 “카리스마가 없고 주저주저한다”거나 “이번에도 중간에 철수할 것 아니냐” 등의 쓴소리를 지속적으로 듣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소통부재’에 ‘우유부단’한 리더십은 안 전 대표가 대표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당의 행보에 대놓고 비판도 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지지율도 깎아먹는 결과를 초래했다. 더욱이 ‘우유부단’ 리더십은 지지자들은 물론 핵심 참모들이 그를 떠나게 되는 결과를 빚기도 했다.
안 전 대표의 멘토로 알려진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을 비롯해 장하성 고려대 교수, 이헌재 전 부총리, 최장집 고려대 교수, 금태섭 의원, 송호창 전 의원, 류근찬 전 의원 같은, 내로라하는 정치인, 학자 등 인재들이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거쳐 그를 떠나갔다. 정치 입문 전부터 각별한 사이로 알려진 박경철 원장과도 지금은 결별한 상태다.
3년간의 국회의원 생활 동안 교체된 보좌관만 무려 23명이나 된다는 사실은 그의 ‘우유부단’ 리더십에 기인한 용인술에 얼마나 큰 허점이 있는지를 여실히 증명하고 있는 사례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안 전 대표는 최근 최순실게이트 정국에서 자신의 ‘우유부단’ 이미지를 벗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을 향해 강한 어조로 ‘하야’를 외치는 등 이른바 ‘강(强)철수’로의 대변신을 꾀하고 있는 것. 더불어 ‘자강론’을 외치며 꿋꿋이 제 갈 길을 가는 정치인으로서의 면모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안 전 대표는 탄핵정국의 와중에서 당과 지지자들을 하나로 묶어내지 못한 채 오락가락 ‘갈지 자’ 행보를 보여 지지율 정체를 초래했다는 평가도 동시에 받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의 이철희 의원은 D정치연구소 소장 시절 “한반도 3대 미스터리가 있는데 박근혜의 창조경제와 김정은의 생각 그리고 안철수의 새정치”라고 꼬집은 적이 있다.
또 역사학자 전우용 박사도 창조경제와 새정치의 공통점으로 “이 말을 쓰는 사람조차 무슨 뜻인지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이라며 “무슨 뜻인지 알아듣는 척하는 문화는 한국에서 가장 발달했을 것”이라고 씁쓸해 했다. 안철수식 새정치의 실체 없는 모호성에 대한 뼈아픈 지적이다.
정치 입문 전 안 전 대표는 기존 정치인들이 갖고 있지 못한 참신성과 합리성, 스티브 잡스에 비견되는 창조성 등이 강점으로 인식됐었다. 여기에 진보진영의 지지자들뿐만 아니라 보수와 중도를 아우르는 넓은 스펙트럼의 지지자들을 보유했다는 이점도 있었다.
즉, 이념적 제한성이 거의 없어 지지층의 분포가 훨씬 넓었다는 것. 하지만 지난 5년간 현실정치에 녹아든 그의 실체는 다양한 한계를 노출시키며 ‘지지율 정체’라는 장막에 갇혀 있는 상태다.
제19대 대통령 후보로서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정치에 발을 들이기 전 보여줬던 참신한 도전과 결기, 그리고 그가 지금껏 외쳤던 ‘새정치’의 모호성을 걷어내고 구체적인 비전을 제시하는 길 뿐이라고 말한다면 과한 것일까?
장휘경 기자 hwikj@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