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문신구 스크린 속 에로스 만나다 37

사람의 신경에는 뇌가 지배하는 뇌신경과 오장육부가 관장하는 자율신경이 있다. 그 자율신경에는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이 있고, 자율신경을 중추하는 신체의 각부에도 뇌 못지않은 사고력과 판단기능이 있다. 배고프면 밥 먹고 싶다는 건 교감신경이고, 배부르면 위가 열심히 소화시키는 게 부교감신경이다. 그리고 덥다고 느끼는 게 교감신경이며 더우면 땀을 배출시키는 게 부교감신경이고, 깊은 수면 중에도 순환계기관이 멈추지 않는 것이나, 인간이 성욕을 느끼는 것 또한 뇌신경이 아닌 자율신경이다. 생성 축적된 호르몬의 배출과 필요한 호르몬의 영입을 위한 자율신경의 자연반응인 것이다. 남자의 교감신경은 발기케 하며 자율신경은 사정하게 하여 진정을 시키고, 여자의 교감신경은 받아들이기 좋게 분비물을 만들고 자율신경은 오르가즘에 오르게 한다. 여자가 원하지 않는 성관계에도 분비물이 나오는 성적반응이 일어나는 것이나, 강간을 당하는 순간에도 몸이 느끼는 것은 뇌와는 상관없는 자율신경 때문이다. 분비액을 배출하지 않으면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아는 교감신경의 명령인 것이다.
불륜을 저지르고 남편을 살해하는 여자의 이야기를 담은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의 원래의 제목은 <우편배달부는 벨을 두 번 울린다>다. 1981년 영화가 우리나라에 개봉할 당시 제목으로 인한 웃지 못 할 해프닝이 벌어 졌고, 배급사는 우여곡절 끝에 어쩔 수없이 영화의 제목을 ‘우편배달부’에서 원어 그대로 ‘포스트맨(postman)’으로 바꿔 개봉 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 속에 우편배달부가 등장하지도 않는데 왜 이미지 나빠지게 제목에다 집배원이라는 말을 쓰느냐?”는 집배원들의 집단 항의였던 것이다.
그런다고 달라 질 것도 다른 것도 아닌, 그게 그거고 거기서 거긴데도 그때는 그랬다. 당시 사회 분위기는 그런 것들이 그렇게 통하던 시절이었고, 말 한마디 잘 못 했다간 언제고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 갈 수 있는 살벌했던 군사독재 시절 때다. 창녀 이야기 하면 창녀들이 데모를 하고, 버스 안내양 이야기하면 차장들이 극장 앞에 몰려와 데모를 했다. 그런 안팎으로 철저히 막힌 답답한 사회를 살던 때에 이 영화 한편이 우리 사회에 던져 준 영향은 실로 컸다.
이 영화를 만든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은 1940년대 <무방비 도시>를 만든 로베르토 로셀리니와 함께 이탈리아 영화운동 신사실주의, 네오리얼리즘의 선두주자다. 그리고 비스콘티 감독의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는 여러 면에 있어서 그 대표적인 영화라 할 수 있다. 그는 제한 없는 표현의 자유를 내세우며 거칠고 자연적이며 다큐적인 기법으로 인물과 내용을 만들어냈고, 꾸미지 않아 그래서 더 리얼한 영화는 보는 이로 하여금 충격 그 자체였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영화의 잔영이 가시지 않고, 전혀 노출도 없는 섹스 장면이 <감각의 제국>이나 데미지>, <색계> 같은 강한 충격적인 정사장면으로 기억되는 것은 바로 네오리얼리즘을 추구하던 비스콘티 감독 영화의 힘이자 상징이다.
1946년에 동명의 소설을 이미 영화화했었음에도 다시 만들만큼 값있는 작품이고, 금세기 걸출한 명배우 잭 니컬슨을 있게 한 작품이기도 하다. 또 무엇보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감동적인 명장면이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대 공황기, 거리에는 실업자와 범죄자들로 메워져 폭력이 난무한 시대를 배경으로, 어느 날 떠돌이 부랑자 프랑크(잭 니컬슨 분)는 그리스인 파파두기스가 운영하는 간이음식점이 있는 주유소에서 주린 배를 채우게 되고, 부인 코라(제시카 랭 분)에 마음이 끌린 그는 거짓말로 일자리까지 얻어 그곳에 머물게 된다. 어느 날 남편이 자리를 비우게 되자, 주방에서 일하던 그녀를 덮친다. 갑자기 강간당할 위기에 처한 코라는 테이블위의 식칼을 발견한다. 남자를 향해 찔러야 할 순간. 날카로운 칼을 움켜쥐고 돌아누운 코라는 놀랍게도 잡고 있던 칼을 저 멀리 던져버린다. 그리고 이제 됐다는 얼굴로 남자가 다가오기를 기다린다. 그런 그녀를 프랭크는 거칠게, 거칠게 범해간다. 식당의 문은 열린 채로...
식칼로 남자를 찔러 위기를 모년할 거라는 예상은 보기 좋게 깨져버린다. 여자는 섹스를 원했고, 본능과 욕망을 따랐다. 도덕이나 윤리 따위의 인간의 이성적 사고는 없었다. 대공황의 상실감은 프랭크를 찔러야할 식칼 본연의 의무를 잊어버리게 하듯, 두 사람의 이성은 제 역할을 잃어 정체성마저 해체돼버린 것이다.
오로지 본능과 욕망이라는 이름으로 두 사람은 더욱 열정적인 사랑을 한다. 식칼을 던져버리듯 자신들 욕망의 장애물인 남편을 사고로 가장해 죽이고, 그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자 자기들에겐 사명이라 믿는다.
계속되는 살인, 난무하는 섹스와 폭력 등 영화는 대공황의 암울함을 두 사람의 빗나간 욕망을 통해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좋지 않은 환경은 사회를 병들게 할 뿐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 개개인의 정체성도 무너뜨린다. 사람이 이성을 잃으면 본능의 욕망이 나를 지배하듯, 생각하는 뇌신경이 제 기능을 상실하면 자율신경이 득세를 하기마련이다. 국가가 통제기능을 잃으면 대혼란이 오듯, 만일 이성으로 행동해야 할 우리 몸이 뇌신경이 아닌 자율신경에다 맡겨져야 할 순간이 온다면 아마도 ‘남편들은 다 죽어야 하는 통제 불가’의 대혼란을 격어야 할 것이다.
내가 나 되는 것은 이성 가운데 나의 정체성이 확실하게 살아 있을 때만 가능하다. 유독 자율신경이 예민하고 연기력까지 풍부한 마누라를 이참에 다시 한 번 유심히 살펴볼 필요는 있다. 그리고 마누라 손에 들린 식칼의 칼끝이 어디로 향해 있는지 확실하게 확인해봐야 한다.
‘강남 철새’는 노래한다. “여자는 몇 분만 부비부비 하면 모조리 뒤로 자빠지게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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