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 속 에로스를 만나다 35 조건 없는 사랑 <페어러브>
스크린 속 에로스를 만나다 35 조건 없는 사랑 <페어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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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01-26 15:40
  • 승인 2010.01.26 15:40
  • 호수 822
  • 59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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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가 알몸을 핥아 거친 숨소리를…”

영화감독 문신구 스크린 속 에로스를 만나다 35 조건 없는 사랑〈페어러브〉


세상 남녀 간에는 자고로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는 불문율이 하나 있다. 남자는 지금 이 여자가 첫사랑이길 바라고, 여자는 이 남자가 마지막 사랑이길 바란다는 것이다. 웃기는 이야기지만 사랑을 하면 누구나 그렇게 된다.

알 듯 모를 듯 어설프게 시작되는 첫사랑에서부터 간절함이 배어있는 농익은 사랑까지 그 시작은 모두가 가슴 조이는 설렘부터다. 그러나 마음속에 사랑하는 내 남자, 내 여자로 자리하는 순간부터 모든 경계는 무너지고 내외의 숱한 적들을 맞아 생존과 쟁취를 위한 치열한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거기에 옳고 그름은 문제가 안 되고 더럽고 수치스러운 것도 상관없다. 내 안의 본능과 싸우고 자아와 싸워 나를 죽여야 하고, 변덕 심하고 아슬아슬한 연인의 마음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아야하고, 호시탐탐 노리는 수많은 연적들과 장애물을 물리치기 위해 항상 경계하고 늘 긴장해야 한다. 그것이 사랑의 속성이다. 사랑은 사람을 변하게 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그 변함 앞에 조건 없이 순종 한다. 그래서 사랑엔 국경도 없고, 부모도 없고, 나아가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것이다.

최근 개봉한 신예 신연식 감독의〈페어러브〉속 형만(안성기 분)과 남은(이하나 분)의 힘겨운 사랑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친구의 딸, 아빠의 친구와 사랑.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사진기 고치는 것밖에 없는 노총각 형만이 친구의 유언으로 그의 딸 남은을 돌봐주게 되면서 둘 사이에 생기는 이야기다.

오십이 넘도록 연애 한번 못해본 형만은 몰라보게 부쩍 커버린 남은의 모습에 당황해하지만, 외롭게 큰 남은은 그런 형만이 마냥 신기하기만하다. 빨래를 핑계 삼아 잦은 만남을 갖던 어느 날 남은은 당돌하게도 사랑을 고백한다. 50대 노총각 형만에게도, 여대생 남은에게도 첫사랑이 시작되고, 갑자기 찾아온 첫사랑의 설렘을 형만은 이렇게 고백한다.

“나이 먹는다고 뭐든지 다 잘 할 수 있는 거 아니거든. 너 나이엔 실수해도 괜찮지만 아저씬 실수 같은 거 하면 안 될 나이야. 뭘 다시 시작할 나이도 아니고...”

신인답지 않은 노련한 연출력과 함께 작품 속에 녹여낸 사랑의 정의는 평단이나 관객으로부터 찬사 받아 마땅하다.

무엇보다 형만과 남은, 아빠 친구와 친구의 딸이 벌이는 유일한 키스신은 영화의 손꼽을 수 있는 명장면 중 하나다. 성기나 헤어를 노출 시키는 노골적인 섹스신보다 훨씬 더 진한 에로스로 다가온다.

〈페어러브〉를 보노라면 오래전 프랑스 클로드 를르슈 감독의〈남과 여〉의 감동이 그대로 전해지는 느낌이다. 1966년에 만들어져 아카데미 외국영화상을 수상하며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흥행을 이룩한 를르슈 감독의〈남과 여〉는 여러모로〈페어러브〉와 겹쳐져 통하는 면이 있다. 얼핏 단순한듯하지만 그러나 흔하지 않은 특이한 경우의 러브스토리가 그렇고, 철없는 20대들이 아닌 사랑의 절실함을 아는 삶의 흔적인 과거의 상처와 함께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남자 ‘장’과 여자 ‘안’은 아내와 남편을 잃고 홀로 살며, 주말이면 언제나 아이가 있는 도빌의 학교로 찾아 간다. 어느 겨울날, 파리로 돌아가는 기차를 놓친 ‘안’은 우연히 같은 학교 학부모인 ‘장’의 차에 동승하게 되고, 다음 주에 아이들과 함께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면서 그들의 사랑은 그렇게 시작이 된다.

30대 중반의 아픈 과거가 있는 그들이었기에 상처의 기억들은 언제나 현재를 괴롭게 하고, 그러기에 한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던 두 사람은 사랑한다는 고백과 함께 어쩔 수 없는 이별을 고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두 영화 속 두 커플은 극적인 재결합을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만나게 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을 찾는 ‘페어러버’로 거듭난다는 것이다.

감독은 또, 가장 평범한 장면으로 가장 충격적이고 쇼킹한 애로 장면을 연출했다. 신음소리가 귓전을 어지럽히고 카메라가 알몸을 핥아 거친 숨소리를 토해내며 흉물스런 성기를 노출하지 않고도, 두 천재 감독은 심장이 멎을 것 같은 차원 다른 애로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그 밖에도 신예 감독으로 각본, 감독, 제작, 편집까지 혼자 원맨쇼 하는 것이나, 실험적인 전작〈좋은 배우〉,〈Les Grand Moments〉를 거친 후의 사실상 처녀작으로 전세금을 빼고 빗을 얻어 직접 제작한 저예산 영화라는 것도 비슷하다.

그리고〈페어러브〉의 시나리오를 일주일 만에 써낸 신연식 감독이나, 도빌 여행 중에 아침 일찍 아이와 함께 해변을 산책하는 여인에 영감을 얻어 순식간에 시나리오를 써낸 를르슈 감독의 천재적 재능이 닮았다.

“도대체 여자의 마음은 알 수가 없군. 어떻게 하면 그녀를 붙잡을 수 있을까?” 정사 도중에 죽은 남편 생각에 괴로워하며 다시 돌아가겠다며 기차를 타고 떠나는 ‘안’을 향해 하는 ‘장’의 독백이다.

사랑은 돈이나 총으로 얻을 수 없다. 오로지 그 하나만을 위해 모든 경계를 허물고 나 자신을 내려놓을 때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사랑엔 어떠한 조건도 조건이 될 수 없으며, 사랑에는 조건이란 단어 자체가 없다. 사랑은 ‘페어’해야 하고, ‘페어’한 것이 사랑이다.

우리 모두 사랑하는 사람을 놓치기 싫다면 ‘페어러버’가 되자. 헤어진다는 건 사랑을 다 한 것이 아니다. 사랑의 끝은 이별이 아닌 재회의 가슴 저린 환희에 있다.

망설이지 마라. 놓치지 마라. 그녀를 잡을 수 있는 순간은 바로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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