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력 잃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야

최근 모 언론사 기자와 기사를 두고 약간의 언쟁을 한 적이 있다. 사연인즉 오래전에 올렸던〈미란다〉연극에 관한 기사 때문이었는데, 기자가 올린 기사 중에 당사자로서 용인하기 힘든 표현이 있었다.
다행히 기자가 잘못을 인정하고 정정기사를 내기로 합의하고 좋게 끝이 났다.
당시 예술이니 외설이니 워낙 말도 많았던 작품이라 진위를 떠나 수많은 자료들이 무작위로 태어났고, 실제로는 보지도 못한 이들에 의해 소문에 소문을 타며 실체와는 거리가 먼 전혀 다른 ‘외설포르노’로 비춰지기도 했다.
기자는 그 중 ‘맘에 드는’ 자료를 기사에 인용을 했고, 나는 그 인용 자료가 사실이 아니고 적절한 표현이 아니니 거두어 달란 것이었다.
전쟁(戰爭)에 있어서 피아(彼我)는 서로가 적이다. 彼엔 我가 적이고, 我에게는 彼가 적이다. 상호 관계의 위치가 다르면 그에 따라 입장도 달라진다.
우리 눈이 앞만 보게 달렸으므로 상대만 보이게 마련이다. 내 입장, 내 관점, 내 생각, 내 주장만 있을 뿐이다. 서로가 적으로 적일뿐이지 누가 옳고 그른 건 별 의미를 안 둔다.
남녀의 사랑도 예외는 아니다. 1965년 작 연극〈미란다〉의 원전인 존 파울즈의〈콜렉터(The Collector)〉를 영화화한 거장 윌리엄 와일러의〈편집광〉속 주인공 ‘프레디 클렉’과 ‘미란다 그레이’ 간의 사랑이 그랬다.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건 상호 애정의 관계가 유지된다는 것이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강요한다고 해서 사랑의 감정이 생기는 건 아니다.
조용하고 소심한 나비 채집이 취미인 평범한 은행원 프레드릭(테렌스 스템프분)은 유복한 가정의 밝고 활달한 미모의 미술학도 미란다(사만다 에가분)를 혼자 좋아하지만 다가가지는 못한다.
어느 날, 복권으로 거금을 거머쥐게 되는 프레드릭은 한적한 곳의 저택을 마련하고 미란다를 납치해 감금한다. 미란다는 프레드릭에게 애원도 해보고 탈출도 시도해 보지만 여의치 않다.
그런 미란다에게 프레드릭은 4주만 같이 있으면 풀어줄 거라 약속하지만, 손꼽아 기다리던 약속한 4주가 되자 프레드릭은 미란다에게 풀어주기는커녕 청혼을 한다. 미란다가 청혼을 거절하자 프레드릭은 다시 강제로 지하실에다 감금한다.
미란다는 자신이 프레드릭의 수집품으로 살아선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다는 생각에 프레드릭의 머리를 삽으로 치고 탈출을 시도하지만 실패를 하게 되고, 머리를 심하게 다친 프레드릭이 병원에 머물게 되자 지하방에서 꼼짝 못하고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는 미란다는 급기야 프레드릭이 살아서 돌아오길 기다린다.
하지만 프레드릭이 병원에서 돌아왔을 땐 이미 미란다는 숨을 거둔 뒤다. 죽은 미란다를 저택 나무아래에다 정성스레 묻어주는 프레드릭은 또 다른 미란다를 찾아 거리를 나선다.
그는 나비 수집하는 편집광이다. 박제(剝製)된 나비더러 여전히 나비로의 관계를 원하듯이, 납치되어 감금된 미란다가 여전히 미란다이길 바라며 사랑의 감정마저도 박제되길 바란다.
납치된 미란다가 원하는 게 뭐냐고 물으면 그는 “그냥 나를 알아주기만 바랄뿐이다”라고 한다. 나비를 수집하듯이 사랑하는 여자를 수집했다.
4주 동안만 같이 지내며 그녀에게 정성을 다하면 자신이 미란다를 사랑하는 것처럼 미란다도 자기를 사랑해 줄줄 알았다.
강간이나 학대는커녕 조그만 완력을 사용해야할 때도 미안해하고, 예쁜 옷과 맛있는 음식하며 그녀가 좋아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게까지 미란다를 위한 정성을 다하지만, 박제된 나비가 아름다울 수는 있겠지만 행복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런 그의 잘못된 사랑은 결국 생명력 잃은 나비처럼 미란다를 슬픈 박제로 만들었고, 자신 또한 사랑을 잃고 만다.
연인의 관계는 서로 사랑이라는 감정이 존재하고 있을 때까지만 성립되는 관계다. 얼마나 많이 사랑하고 오랜 기간을 사랑했건 상관없다. 어느 한 사람이라도 사랑의 약효가 사라지는 순간, 그 관계의 생명력은 다한다.
부부도 마찬가지다. 몇 십 년을 살았건 애가 몇이건 문제가 안 된다. 돈 많이 버는 능력도, 밤일 잘하는 능력도 일단은 사랑이 전재되고 난 뒤다.
돈만 많이 준다고 사랑이라는 감정이 생기는 게 아니다. 내 입장이 상대의 입장은 아니다. 여자의 자지러지는 교성을 사랑의 소리로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존 파울즈의 원작 소설은 절묘하게도 똑같은 한 이야기를 두개의 이야기 구조로 쓰여 있다. 동일 사건 안에서 프레드릭과 미란다의 두 관점에서 본, 서로 같지만 다른 한 이야기다.
관점이 다르면 입장도 다르다. 싸우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으면 둘 다가 죽일 놈이고, 전장에서의 적은 무조건 섬멸 되어 없어져야할 대상일 뿐이다.
내가 널 사랑하니 너도 날 사랑해야 한다는 등식은 안 통한다. 돈 잘 벌고, 밤일 잘 한다고 좋을 수는 있겠지만 사랑하곤 관계없다. 세상 모든 관계는 언제나 유한(有限)할 뿐이다.
연극〈미란다〉는 잡혀온 미란다의 관점에서 본 프레드릭의 이야기지만,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영화〈편집광〉은 납치 감금한 프레드릭의 관점에서 바라본 미란다 이야기다. 비록 느낌은 다르지만 두 이야기 다 완벽하다. 그리고 영화는 거장 감독의 섬세한 연출로 원작을 더욱 빛나게 했다.
끝으로 필자는 본 작품을 통해 묘하게도 서로 다른 유형의 진한 이상 에로티즘을 경험 했다. 훗날, 기회가 되면 그에 관한 이야기를 꼭 하고 싶다.
문신구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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