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과 여인은 묵을수록 값지다

몇 년 전이다. 유명한 ‘에로비안 나이트’의 작가 김재화 형과 함께 죽이는 섹스 코메디 영화를 한 편 만들어 볼 심산으로 시간을 같이 할 때가 있었다. 비록 죽이는 영화는 다음으로 미뤄졌지만, 그 형으로 인해 얻은 소중한 영화 한편은 남아있다.
어느 날, 형이 술자리에서 와인(한참을 설명했는데 아직도 이름을 모름)잔을 건네며 영화 <사이드웨이(Sadeway)> 이야기를 꺼냈다. ‘너무 좋고 재미있는 영화니 보라’는 것이다. 그리고 곧 지인들과 함께 와인 파티를 준비 할 것이니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재화 형은 지나친(내가 볼 때) 와인 마니아다. 그래서 그 방면엔 통무식인 내게 와인영화 운운(도무지 모름) 하는 바람에 사실 별 기대하지 않았지만, 페인 감독의 <어바웃 슈미트> 같은 전작이 있기에 설마 하는 마음으로 봤던 영화다.
2004년에 만들어진 알렉산더 페인감독의 <사이드웨이>는 전작 <어바웃 슈미트>에서처럼 유별나지 않는 평범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감동과 코미디가 있는 로드무비 형식을 띄고 있다. 결혼 생활에 실패를 하고 자신의 소설이 출판되길 바라는 소설가가 꿈인 영어교사 마일즈(폴 지아매티)와 늦은 결혼을 앞둔, 이젠 한물 간 B급 삼류배우인 그의 죽마고우 친구 잭(토마스 헤이든 처치)이 일상을 벗어나 함께 여행길에 오르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다.
여행은 잊기 위한 일상의 샛길이다. 무미건조하고 정체된 일상을 한번쯤 벗어나고 싶은 건 누구나의 소망이다. 따분한 현실의 굴레 속에서 해방되고, 앞만 보고 살아가는 자신을 한 번쯤은 측면에서 객관적으로 보고 싶은 것이다. 무언가를 잊는다는 건 새로운 무언가를 찾는다는 의미와 같다. 비운다는 건 또 다른 뭔가를 채우는 것이다. 비워진 공간은 빈 체 있는 게 아니라, 다른 걸 채움으로서 비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잊고 비워도 여전히 허전하고 답답한 건 그런 까닭이다.
이혼의 아픔을 와인으로 달래는 와인 애호가 마일즈, 그리고 결혼식을 앞두고 있는 타고난 바람둥이 삼류배우 잭의 샛길여행 탐방기. 둘은 각기 다른 소망을 가지고 샛길 여행을 출발한다. 최고의 와인을 가능한 많이 맛보고 싶어 하는 마일즈와 가능한 한 많은 여자를 맛보고 싶어하는 잭이다. 와인에도 귀하고 독특한 맛과 향이 있는 값 비산 명품이 있고, 또 많은 여자들 중에서도 멋과 맛을 겸비한 고품위의 명품여자가 있게 마련이다. 와인의 향에 마음껏 취하고 만나는 여자마다 뻐꾸기를 날린다.
마일즈는 레스토랑에서 만난 마야(버지니아 매디슨)라는 여자에 마음을 빼앗기고, 여자 사냥에 혈안인 잭도 양조장에서 일하는 동양계 여자 스테파니(산다라 오)를 유혹하는데 성공한다. 그 순간 일상에서 해방되고 샛길의 소망은 이루어지는 듯하지만, 샛길에 머무는 한 샛길은 샛길이 아닌 일상이 될 뿐이다. 일상을 잊고 소망을 찾아 떠나온 여행이지만 샛길위의 순간들은 또 다른 현실의 길이 되어 그들을 지질하게 옭아맨다.
감독은 이들의 삶을 통해, 이들의 샛길여행을 통해, 그리고 그들을 통해 만나는 와인과 여자를 통해서, 무엇이 진정한 명품이고 소중함인지를 깨닫게 한다. 어느 날, 레스토랑에서 만난 여자 마야에게 귀한 와인을 두고 마일즈는 이렇게 고백 한다. “특별한 날 소중한 사람과 함께 이 와인을 마시고 싶다” 그러나 마야의 대답은 달랐다. “특별한 날 이 와인을 마시는 게 아니라, 이 와인을 마시는 날이 바로 특별한 날이지요.”
그렇다. 그렇지 않은가? 맞는 말이다. 명품이 특별한 건 맞지만, 특별한 것이 곧 명품은 아닌 것이다. 명품와인 명품여자가 다 특별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감독은 말 한다. 여자나 와인은 잘못다루면 위험하니 항상 아끼고 보살펴야하며, 오래될수록 그 진가가 나타난다고. 그는 아직 덜 숙성된 이들 마일즈와 잭의 여행(만남)을 통해 ‘인생은 이런 것이다’라며 차츰 숙성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희노애락이 공존하는 인생사를 독백을 통해 전한다. “와인은 살아있는 거나 다름없어요. 끊임없이 진화하면서 오묘한 맛을 내니까요. 와인이 절정에 이르면 마치 우리가 61살이 되는 것처럼, 맛은 서서히, 어쩔 수 없이 기울기 시작하죠. 그럴 때, 그 맛은 끔찍할 정도로 아름다워요.”
마야의 말처럼 세상에 특별한 것은 없다. 사람들은 때로는 삶이 힘들고 재미없어 일탈을 꿈꾸기도 하지만, 그 곳에도 답은 없다. 집밖의 여자만 여자로 보이는 어리석은 환상은 버려야 한다. 오랜 기간 끊임없이 진화하며 오묘한 맛을 내는 와인처럼, 쓴맛 단맛 두루 맛보며 그동안 함께 뒹군 여자인 아내가 진정한 이상 속의 특별한 여자다. 비록 밥하랴 빨래하랴 화사한 화장은 못하지만, 온 종일 애 키우랴 집안 살림 걱정하랴 밤무대(잠자리)가 설레이진 않지만 숙성된 최고의 특별한 여자가 바로 아내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렉스 피켓 원작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사이드웨이>는 골든 글로브 코메디 부문 최우수상을 비롯해 많은 상을 수상한 수작이다. 알렉산더 페인 감독은 늘 작품을 통해 진한 감동의 메시지를 남긴다. 영화 마지막에 두 주인공은 꿈과 사랑의 참모습을 깨닫고 샛길을 떠나 원래의 삶으로 돌아온다. 방황의 끝은 언제나 벼랑이다. 유부녀와 잠자리를 하다 남편에게 들켜 알몸으로 쫓겨나 줄행랑을 쳤던 잭은 기다리는 약혼녀에게 돌아와 결혼식을 올린다. 잭의 결혼을 먼발치서 보던 마일즈 역시 재혼하여 임신까지 한 전 부인을 만난다. 그리고 회한의 눈물을 삼킨다. 자동차 보닛은 찌그러지고 코뼈가 주저앉아 콧등에 커다란 반창고는 붙였지만 그들은 다시 돌아왔다. 우여곡절 끝에 되찾은 결혼반지가 잭의 손에서 반짝이고, 소설출판 ‘불가’라는 통지를 받은 마일즈는 다시 선생의 자리로 돌아가 아이들 앞에 선다.
이상은 없다. 인생의 샛길은 없다. 아니 인생의 다른 가능성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늘 그 길을 염원하고 바라본다. 그리고 소리친다.
“우리 다시 젊어지진 않잖아?”
“다시 오지 않을 오늘 밤을 뜨겁게 불태워보자.”
★이 영화를 준 와인을 사랑하는 김재화 형께 감사드린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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