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문신구 스크린 속 에로스를 만나다 [25] 떻게 해야 한 방울의 물이 마르지 않을까?
성교는 번식을 위한 활동이긴 하지만 사람들은 임신기간과는 상관없이 수시로 관계를 가진다. 남자는 여자만 보면 본능적으로 반응을 하고, 여자 또한 아닌 것 같지만 그를 받아들이는데 그다지 인색하지 않다. 섭리다. 원래 그렇게 만들어 졌다. 그래서 틈만 나면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들이댄다. 뿐만 아니라 단 한 번의 사정에도 수억 마리의 정자가 난자를 차지하기 위해 전력투구하는 반면, 난자 또한 수억의 정자무리들을 상대로 맞이할 태세를 한다. 사랑(파트너)도 마찬가지다. 이 여자, 이 남자 아니면 죽어도 못 살고 사랑 없는 성관계는 절대 가질 수 없다는 건 빈말이다. 이 모든 현상이 섭리 가운데 진화하며 생사(生死)를 반복하는 인간생존의 ‘삼사라(samsara)’, 즉 윤회전생(輪廻轉生)이다. 2001년 인도 출신 판 나린(Nalin Pan) 감독의 <삼사라>는 티벳 불교를 무대로 인간의 윤회설을 다룬 보기드믄 수작이다. 감독이 오랜 기간 현지에 머물며 시나리오를 구성하고 독일, 프랑스, 인도, 이탈리아 등 여러 국가가 참여한 영화는 인간의 성(性)을 통해 ‘生死의 흐름’을, 즉 윤회를 이야기 한다. 장대한 산하와 거칠고 메마른 해발 1500미터의 척박한 고원대지 라닥을 배경으로 하며, ‘잔다라’와 ‘이연걸의 보디가드’로 알려진 종려시(Cristy Chung)를 제외하곤 대부분 현지 사람들을 배우로 기용해서 티벳 원어를 그대로 쓰게 해 사실감을 더했다.
영화는 서두에 ‘어떻게 해야 한 방울의 물이 마르지 않을까?’라는 의미 있는 화두를 관객에게 던지며 시작한다. 5살 어린나이에 불교에 귀의해 훌륭한 수도승으로 자란 타쉬(숀 쿠)가 3년 3개월 3주 3일 동안의 고된 수행을 마치고 나와 사원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발견한 돌 위에 새겨진 문구다. ‘어떻게 하면 한 방울의 물이 마르지 않을까?’ 긴 고난의 수도를 막 끝내고난 타쉬에게 주어진 첫 번째 메시지이자 앞으로 전개될 영화의 예고 메시지다.
사원으로 돌아온 타쉬는 3년간 수도의 공로로 고위직을 받는다. 그를 위한 축제행사가 벌어지고 그 곳에서 그는 우연히 한 여인이 아이에게 젖먹이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그 후, 그는 수도(금욕)를 마친 수도승으로서의 자유와 평안은 사라져 매사에 의욕이 없고, 잠자리에서는 몽정을 한다. 이를 눈치챈 도반의 염려 가운데 마을에서 벌어지는 축제에 참여하게 되고, 그곳에서 그는 운명의 여인 페마(종려시)를 만나게 된다. 여인에 마음을 빼앗긴 타쉬를 위해 스승은 정진중인 고승을 만나게 한다. 고승은 타쉬에게 남녀가 교합하는 그림 한 장을 내미는데 그림을 기울어 보면 남녀가 해골로 변한다. 금욕의 수도승에게 섹스는 섹스가 아니다? 순간 타쉬는 혼란을 겪는다. 고승은 또 다른 액자 하나를 보여주는데 거기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다. ‘세상 모든 곳에는 도가 있다.’
도(道)란 것은 수도 사원 기도굴이나 세상 밖 이상세계 먼 곳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 가운데 어느 곳(추하고 더럽다고 생각하는 곳까지)에도 도는 존재한다는 거다. 고로 우리가 아는 건 아는 게 아니고, 우리가 보는 것도 사실 본질은 아니니 교접의 쾌락도 현상일 뿐이란다.
‘섹스에도 도가 있노라.’ 감독은 한 수도승의 본능적 정욕을 통해 도를 말하고 윤회를 이야기 한다. 그리고 나아가 티벳 불교를 바탕으로 금기인 여타 종교의 교리까지 정면으로 들먹인다. 사원으로 돌아온 타쉬가 스승에게 따진다. 부처님도 29세까지 속세에서 사셨고, 깨우침도 속세의 경험에서 나왔다. 그런데 자기는 5살 때부터 속세를 떠나 부처님 가르침을 따라 살아왔지만 부처님 같은 깨달음은 얻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깨달음을 위해 몰라야 할 것도 있지만, 포기하기 위하여 알아둬야 할 것도 있죠.”란 말을 남기고는 사원을 떠나 환속을 한다.
속세로 나서면서 찾아간 곳은 마을 축제 때 눈이 마주쳤던 처녀의 집이다. 추수할 때까지만 일을 도와주기로 했지만, 결국 처녀와 결혼하게 되고 아이까지 낳아 행복한 환속의 삶을 누린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 그는 점점 수행자의 모습은 사라지고 세속 범부의 모습으로 변해간다. 욕심을 내고 남들과 다투고, 집안 여자일꾼과 붙어 정욕을 불태우기도 한다.
사람은 의지에 관계없이 환경에 적응하고 살기 마련이다. 세상 일이 원래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점철된 곳이 아닌가. 그렇게 세속사람으로 세속을 살고 있는 그에게 어느 날 사원의 도반이 찾아와 임종을 앞둔 스승의 편지를 전해 준다. ‘난 삼사라를 향해 귀의하게 되었구나… 수천가지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과 한 가지 욕망을 정복하는 것 중 어떤 것이 더 소중한지를 알게 되겠지.’ 편지를 읽은 타쉬는 지난날을 뒤돌아본다. 수천가지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살았지만 그 또한 어느 것 하나 만족하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그리고 그는 잠든 아내와 아이를 뒤로하고 다시 삭발을 하고 승복을 입는다.
‘깨달음은 어디에도 있지만, 어디에든 다 깨달을 수 있는 건 아니다.’ 결국 속세에서도 도를 얻지 못하고 떠나는 길에 타쉬는 전에 봤던 돌(글이 새겨져 있던)을 다시 보게 되고, 그땐 보지 못했던 돌 뒷면에 새겨진 ‘바다에 던지면 되느니’란 글귀를 보게 된다. 한 방울의 물이 마르지 않으려면 바다에 던져야 한다는 의미다. 한 방울의 물은 현상이고 바다는 본질이다. 한 방울 물은 마르지 않을 수가 없듯이, 현상은 현상일 뿐이지 본질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 영화에도 <삼사라>와 궤를 같이하는 작품이 있었다. 1974년 고 김기영 감독의 문제작 <파계>란 작품이다. 전쟁 고아인 침애(조재성)는 서상사 고승의 손에 키워져 불자의 길을 가게 되는데, 성장한 침애에게 법통을 잇기 위한 마지막 시험으로 미모의 묘향(이화시)을 가까이 둔다. 침애는 결국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이를 지켜보던 고승은 침애를 묘향과 함께 속세로 내려 보낸다는 이야기다.
영화 <삼사라>도 5살 어린나이에 사원에 들어와 장년이 되고 3년의 고행수행까지 한 자가 한 순간 파계를 하게 되는(마지막에 다시 돌아오지만)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지만, 하드코어 수준의 성행위 묘사 장면은 한국의 거장 감독을 왠지 외소하게 만든다.
떠나는 타쉬에게 아내 페마는 이렇게 말 한다. “아쇼다라. 이 이름을 아세요? 싯타르타, 고타마, 석가모니, 부처. 다들 그 이름은 알죠. 하지만 아쇼다라는 몰라요.” ‘아쇼다라’는 부처의 아내 이름이다. 부처는 아내도 아들도 있다. 부처의 깨달음이 속세에서 비롯되었다면, 그 속세엔 여자 아쇼다라가 있고, 금욕의 깨달음도 원천은 여자에 있다.
한 방울의 물이 모여 이뤄진 것이 바다다. 숲만 보고 작은 나뭇잎 하나를 보지 못한다면, 나뭇잎만 보고 숲을 못 보는 거나 무엇이 다른가? 세상 어디에도 도는 있다고 한다. 한 방울의 물이 바다를 이루듯 금욕은 정욕을 통해서만 참이룸을 얻을 수 있다. 나무에 열매도 땅위에 싹을 내밀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고로 한 방울의 물이 바다이듯 금욕은 곧 정욕이다.
금욕을 위해 아낌없는 정욕을!
<삼사라> 만세! 精子 만세!
문신구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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