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性解放의 기수 <엠마뉴엘>
여성 性解放의 기수 <엠마뉴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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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08-25 16:32
  • 승인 2009.08.25 16:32
  • 호수 800
  • 59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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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해방 추구 ‘여성도 섹스 자유 있다’

<목구멍 깊숙이>란 저예산 포르노 영화 한 편이 전세계 이목을 집중시키며 거대 미국사회를 흔들어 ‘워터게이트’와 함께 보수 닉슨정부를 무너뜨리고, 이탈리아에선 외설죄로 고발되어 감독과 배우가 법정에 서게 된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가 요란을 떨 즈음, 불란서에서도 그 바람에 힘입어 <엠마뉴엘(Emmanuelle)>이라는 본격적인 에로티즘 영화 한편이 만들어 졌다.

이 영화는 에로티즘의 대표적 감독 ‘저스트 젝킨’을, 또 불멸의 세계적 섹스 심볼 ‘실비아 크리스텔’을 탄생케 했고, 수 십편의 시리즈와 궤를 같이한 에로영화들을 낳게 했다. 뿐만 아니라 여성의 성해방이라는 이슈로 사회적 논란의 중심에 놓여 언론과 평단, 그리고 전 세계 관객들의 화두에 올랐었던 현대 영화사의 대표적인 성애영화다.

짧은 숏컷트 머리의 19세 외교관 부인, 아직 미소녀티를 지닌 젊고 아름다운 엠마뉴엘(실비아 크리스텔)이 외교관 남편 장(다니엘 샤키)이 머물고 있는 태국의 방콕으로 가는 시점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마중 나온 남편은 나이가 10년이나 연상으로 태국 하인들의 정중한 접대를 받으며 도착한 곳은 쾌적한 대저택, 엠마뉴엘은 장차 이곳에서 경험할 일들에 막연한 기대감을 갖게 된다.

그녀는 곧 호화로운 풀장에서 스스럼없이 자신들의 은밀한 성경험을 털어놓는 여인들을 만나게 되고, 그 중 아직 소녀티가 남아 있는 마리(크리스틴 보이슨)과 친해지고, 파티장에서 방콕 고고학자 비(마리카 그린)를 만나면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친절하고 매력적인 비에게 반한 엠마뉴엘은 그녀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만 오래지않아 비로부터 절교를 당한다. 상심하던 그녀는 남편 장을 통해 사교계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인 마리오(알랭 퀴니)를 만나면서, 그로부터 그만의 독특한 성(sex)에 관한 모든 걸 전수받게 되고, 그를 통해서 서서히 자신을 알게 되고 오묘한 성의 세계를 깨닫게 된다는 얘기다.

남녀의 성은 동등하고 평등하다. 그래야 한다. 그래서 여자도 남자와 같이 동등한 입장에서 성적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하며, 그 속에서 정당하게 성적 쾌락을 추구할 권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통적으로 성에 관한한 언제나 피해자 위치에 있다. 여성의 성적 행위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구속하여 왔던 우리사회의 이중적 성 윤리규범은 바뀌어야 한다. 사회의 인식이 변하고 여성의 성적 자유와 권리, 욕망까지도 인정하고 배려하는 확고한 기반이 형성돼야 한다. 여성의 성 해방은 남성에 종속된 관계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동등한 파트너의 관계를 유지하는 거다. 그렇지만 기성의 사회나 남자들은 이를 쉽게 인정하려들지 않는다. 불편해 하며 동등이나 평등 따위는 바라지 않는다. 위험한 발상으로 평화유지의 저해요소라 생각하고, 여성주의자나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에 위기의식을 느끼며 영원한 갈비뼈 하나로서의 여자로만 남아 주는 걸 원한다.

젊고 생기 왕성한 미모의 엠마뉴엘이 단절된 굴레의 집을 떠나 문화도, 정서도 다른 이국 낯선 곳, 낯선 사람들과의 낯선 경험을 통해 여성의 정체성을 찾고 성을 깨달아가는 모습에서 감독은 여성의 성해방을 말한다. 다른 이의 다른 성을 엿볼 땐 당황해 하고, 이성이 아닌 동성간의 사랑과 이별을 통해 진한 동성애를 경험하며,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를 만나 또 다른 성의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굴레 속 성은 굴레를 벗어날 때야 비로소 진정한 본 모습의 성을 볼 수 있다. 의식의 두려움과 억압의 속박에서 해방되었을 때 비로소 올바른 정체성을 회복할 수가 있는 것이다.

엠마뉴엘 부인은 열린 바깥세상을 통해 많은 걸 깨닫게 된다. 내가 알고 누리며 살았던 성이 다가 아니었고, 이성간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성관계만도 아니고, 내 남편하고 누리던 성만이 전부가 아니며 파트너 또한 오로지 하나이어야지만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여성의 성해방이 남성과의 관계로부터 벗어난다는 뜻은 아니다. 그리고 무분별한 방종, 반윤리를 뜻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남성적 성의 예속에서 벗어난 독립된 주체의 성으로 거듭나는 것이고, 성을 여성 통제의 수단으로 하는 남성 우월주의에서 탈피하는 데 있는 것이다.

저스트 젝킨 감독은 거기서 한 걸음 더 앞으로 나간다. 우리를 감싸고 있는 의식의 껍질을 벗겨내듯 과감한 노출에 원색적이고 충격적인 리얼한 묘사로 이성으로부터 무장해제 시킨다. 가릴 것도 감출 것도 없으면, 숨을 곳도 피할 곳도 없으면, 그땐 이미 알몸이 그 알몸이 아닌 것이다. 오르가슴도 색깔과 모양이 다르다. 쾌락의 형태가 다 같을 수 없다. 그 걸 깨달을 때 비로소 굴레를 벗어나 해방의 세계를 맞을 수 있다.

세상에 나온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엠마뉴엘>은 에로영화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성관계를 말 하는 이 영화는 결코 가벼운 성애영화가 아니다.

여성 해방을 주제로 하는 영화는 이보다 앞서 우리나라에도 있었다. 1965년 한형모 감독의 <자유부인>이 바로 그 작품으로 당시 엄청난 흥행과 함께 화제를 뿌렸던 영화다. 남편이 있는 아녀자가 외간 남자와 정을 통한다는, 사실 엄밀히 따진다면 남편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바람난 여자’에 가까운, 여성 성해방이 아닌 속박과 굴레의 탈피 이야기다.

비록 여성의 성 문제 뿐 아니라, 성은 지구상에 인간이 존재하는 한 영원한 숙제로 남을 수밖에 없는 문제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성욕을 너무 오래 참고 억압하면 인체 내에 생화학적 변화가 생겨 심리적 불안을 낳게 하고 결국 ‘노이로제’가 생긴다고 했다. 또 논문 ‘성욕설’에서는 인간은 유아기 때부터 ‘유아기 성감대’가 있어 성적 쾌감을 느끼며, 커서도 이성과의 성을 너무 억압하면 변태적 성욕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무의식 속에 억압된 성적 에너지가 불안과 정신병의 원인이 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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