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들이 조성한 대규모 비자금도 역시 기업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비자금의 시작이 ‘기업’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그렇다면 기업은 어떻게 비자금을 조성할까.가장 손쉽고 일반적인 방법은 기업어음(CP)을 발행해 금융기관에서 대출을 받고 이 돈을 계열사에 빌려준 것처럼 회계장부를 꾸며 비자금을 마련하는 수법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해당 계열사 계좌에 입금된 내역과 용처 등을 밝히다보면 혐의가 드러나기 쉽기 때문에 요즘에는 잘 쓰이지 않는다.건설사에서 노무비 등을 포장하거나,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건설현장을 마치 있는 것처럼 꾸며 비자금을 조성하는 것은 이미 ‘고전적인 방법’이 된지 오래다.
외환위기 이후에는 역외펀드를 동원하거나 허위 신용장(L/C)을 개설해 실제로는 없는 수출입을 있는 것처럼 꾸며 자금 이동의 알리바이를 조작하는 수법이 횡행했다.외환위기 때 해체된 A그룹에서 재정을 담당했던 B 전무의 말. “비자금 조성 방법에는 유형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 수많은 방법이 동원되고 비밀스럽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누군가가 여러 부서명으로 전표를 만들어 총무부에 품위를 넣는다고 생각해 보라. 물론 부서장들도 모른다. 심지어 자금을 집행하는 당사자나 부서장도 모를 때가 있다.”B 전무의 말대로라면 비자금을 조성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범죄사실’을 공유하지 않는다는 점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심지어 구조조정본부장이나 오너조차 모를 때도 있다고 한다. C그룹 고위관계자의 말.
“구조본부장이 오너 모르게 자금을 만들 때는 ‘오버액션’형이라고 보면 된다. 과잉 충성의 극단적 형태다. 반대로 오너가 핵심참모조차 모르게 비자금을 직접 조성할 때도 있는데, 이런 사람은 의심이 많아서 그렇다.”자금조성이 워낙 은밀하게 진행되다 보니 비자금 전달책의 정체 또한 베일에 가려지기 마련이다. 전달을 맡은 사람들은 비자금을 조성하는 쪽과 전달받는 쪽을 동시에 잘 아는 경우가 많다. 최도술 전비서관에게 SK 비자금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진 이모씨는 최 전비서관과는 부산상고 선후배지간이고 손길승 회장과는 이씨가 금융업에 종사할 당시 알게 된 사이로 알려진 것도 이 경우에 해당한다.회사 내 측근에게조차 일을 맡기기 어려울 때는 외부 심복을 동원하기도 한다.
97년 4월 한보 비자금 사태 청문회 때 ‘정태수 전회장이 김모 의원 등 3명의 현직 의원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했느냐’는 의원들의 질의를 받은 대목을 살펴보자. 박헌기 신한국당 의원:“돈을 주었다면 직접 주었나.” 정 전회장:“직접 전달한 사실이 없다.” 박 의원:“부하직원에게 심부름으로 전달한 일은 있는가.” 정 전회장:“없다.” 전달 경로에 관한 질의응답은 여기에서 끝났다. 더 질문을 해봤자 무의미하다는 박 의원의 판단 때문이었다. 정 전회장의 말은 자신이나 한보 내에 핵심 참모를 제외한 제3의 인물이 등장했다는 의미인데, 이 인물의 정체에 대해 정 전회장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실형의 위험까지 감수하며 정치권에 비자금을 전달하는 이유는 역시 그만한 대가가 따르기 때문이다. 반대로 정권과 거리를 두거나 밉보이게 되면 반드시 후환이 따랐다. 정권과 ‘불가근 불가원’을 철칙으로 삼아야 했지만, 재벌은 이 철칙을 지키지 못하고 끊임없이 정경유착을 불러왔다.이승만 정권은 ‘중석불(重石弗) 사건’과 ‘은행 민영화 특혜’라는 두 차례 대표적인 정경유착 사례를 남겼다. 정부의 주요 외화 획득원이었던 텅스텐 수출대금 470만달러를 삼호 등 정권과 결탁된 기업에 특혜 배정하고 정치자금을 받은 것이 ‘중석불 사건’. 본래 수출대금은 기계류 등 산업기자재 수입 대금으로 책정돼 있었으나 삼호가 특혜를 받으면서 곡물을 수입해 엄청난 폭리를 취했다.또한 이승만 정권이 정부 소유의 부실 상업은행 5개를 민영화하면서 삼호와 삼성 등에 인수권에 관한 특혜를 준 건이 은행민영화 특혜 사건이다.
그 대가로 삼호의 정재호 회장은 이기붕의 친척을 저축은행 총재로 임명하기도 했다.김인영 한림대 교수의 논문 ‘정경유착: 굿바이 한국주식회사’에 따르면, 박정희 정권의 정경유착은 ‘정착기’로 표현된다. 이승만 정권의 부패에 이어 정경유착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할 때였다.박정희 정권의 정경유착은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대표된다. 66년 삼성의 계열사인 한국비료가 건설자재로 위장한 사카린 원료를 밀수하고 밀매했다. 이 사건은 정권과 정보기관의 협력으로 이루어져 충격을 줬다. 정경유착의 역사는 전두환 정권에 이르러 ‘공고화기/구조화기’로 접어들었다. 부실기업 인수, 장영자 사건, 명성사건 등은 정경유착이 정권과 재벌이 ‘상생의 논리’로 자리잡았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전두환 정권의 정경유착의 백미는 동국제강의 일신제강 인수 특혜사건이다. 일신제강은 82년 도산 이후 포철에 인수돼 동진제강이 되었고 84년에는 포철이 광양제철소 확장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일반경매로 내놓았다.
이때 동국제강의 장상태 회장과 형제 5명은 이순자 여사가 운영하던 새세대 심장재단에 20억원을 기부한 것이 약발을 발휘해 동국제강이 자신보다도 더 큰 동진제강을 인수할 수 있었다.‘보통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홍보했던 노태우 전대통령은 정경유착 규모에서 ‘보통 대통령’이 아니었다. 또 시기적으로 정경유착 관련 인원이나 뇌물 액수가 대형화하기도 했다. 그 대표적 사례가 ‘수서지구 택지 특혜공급사건’이다.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이 수서지구 택지 조합임원과 공모하여 조합으로 하여금 국회, 정부, 청와대에 전방위 뇌물을 제공해 택지를 공급받도록 했다. 당시 거의 모든 정·관계에 유착의 손길이 뻗쳐 있었기 때문에 총체적 망국 징후를 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정경유착의 종언과 집권기간 동안 단 한푼의 정치자금도 받지 않겠다던 김영삼 전대통령. 그러나 정권말기에 한보사건과 함께 아들 김현철씨 구속으로 임기를 마쳤다. 수서비리 사건의 주역 정태수 회장은 한보철강 당진제철소 건설을 추진하면서 5조원 가량의 금융대출 특혜를 받기 위해 여야 정치인과 은행장 등에게 1,000억원의 비자금을 전달했다. 이 사건으로 3명의 국회의원과 1명의 장관, 2명의 은행장들이 구속됐다.정경유착의 오랜 역사는 때로 ‘이단아’들을 낳기도 했다. 정권에 줄대기를 거절했거나 정권과 각을 세운 기업들을 뜻한다. 이들은 권력의 서슬 퍼런 재벌 길들이기에 철저히 짓밟혀왔다. 그러나 희생양들 중에는 군사정권의 정통성 세우기 작업에 농락 당한 이들도 적지 않다.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대통령은 정권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여러 방안들을 동원했다.
기업들에 대한 ‘손보기’도 그 방안의 하나였다. 쿠데타가 성공한지 12일만에 기업인 9명이 특별 구치실로 연행됐고 해외에 체류 중인 기업인에게는 구속명령이 내려졌다. 구속 조사 명분이 부족했던 군사정권은 이들을 산업재건에 이바지할 기회를 준다는 명분으로 풀어줬다.총칼에 의지해 정권을 잡고 정통성 때문에 고민하기로는 5공도 박정희 정권과 다를 바 없었다. 국제그룹과 명성그룹의 패망은 전두환 정권의 ‘마녀사냥’식 몰아붙이기에 희생된 대표적 케이스. 전두환 정권은 집권 직후 주요 공직자를 부정축재 혐의로 처단하면서 부정축재를 도왔다는 이유로 기업인들에 손을 댔다.국제그룹의 경우 84년 12월 정부가 국제그룹의 유동성 지원을 외면하며 패망이 예고됐고 2개월 뒤인 85년 2월 2,000여억원의 여신을 결제하지 못해 부도를 내고 말았다. 당시 양정모 회장은 전두환 대통령의 미움을 샀다는 것이 정설처럼 전해지고 있다.정치 지도자와 재벌 총수의 불화가 해당 기업에 대한 핍박으로 이어진 대표적 사례는 문민정부의 현대그룹 탄압이다. 정주영 회장이 김영삼 전대통령에게 미움을 사게 된 배경은 6공 시절로 올라간다.
당시 김종인 경제수석은 ‘5·8 부동산 조치’를 발표하며 불요불급한 재벌 소유 부동산을 처분하도록 강요했다. 특히 현대는 전면 세무조사와 1,300여억원의 세금 추징, 금융 제재를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정주영의 대선후보 출마 배경에는 이와 같은 권력의 횡포가 있었던 것이다.김영삼 전대통령이 대선에서 경쟁을 벌였던 정주영과 현대를 끊임없이 압박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문민정부에서 현대는 산업은행의 설비자금 대출 중단, 해외주식예탁증서(DR) 발행 불허 등 유독 여러 가지 제재를 많이 당했다.
고 정주영 명예회장은 그의 자서전 ‘이 땅에 태어나서’에서 “5공도 6공도 경제인들에게는 너무도 고통스러운 시대였다. 나의 1992년 대선 출마에 대한 앙갚음으로 우리 ‘현대’가 당한 불이익은 생각조차 하기 싫은 악몽이다”라고 당시를 회고했다.고비용 정치구조 개혁과 정치자금 수수의 투명성 확보가 보장되지 않는 한 이 땅에서 정치권 비자금 수수 뉴스는 끊일 날이 없을 것이라는 게 정치평론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정경유착의 역사는 단순히 정치구조의 문제만은 아니었던 만큼 정치인과 재벌의 각성과 각오가 선행되지 않으면 비자금 수사는 미래에도 현재진행형일 수밖에 없다.
김지산 san@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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