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탈 속 아내의 낯선 모습

“내가 몇 번째야?”
위험천만이고 시대착오적인, 아직도 어리석고 못난 찌질남들이 여자와 거사를 치루고 난 뒤 파트너에게 넌지시 던져보는 말이다. 불문율이다. 금기다. 따귀를 맞거나 바로 결별이다. 아마도 그 시간이후로 다시는 그녀를 볼 수 없을 것이다. 아니 그게 왜 궁금한가? 뭘? 무슨 대답을 듣고 싶은가? 알면 뭐가 달라지나? 새로 산 물건처럼 그녀의 포장지라도 뜯겠다는 건가?
우리는 지금 이혼율이 미국 다음으로 세계 2위의 강대국에서 살고 있다. 3년 전 통계로 부부 4쌍 중 1쌍 꼴로 ‘죽음이 둘을 갈라놓을 때까지 살자’던 약속을 던져버리고 이혼을 한다.
한번 실패하면 다시 실패할 확률이 더 많고, 재혼의 이혼율은 초혼의 4배나 된다고 한다. 또 이혼 남녀의 90%가 이혼을 후회하며 ‘좀 더 잘했으면, 좀 더 서로 존중하고 감사와 사랑을 표현하고 살았으면’이라고 생각 한다. 부부관계는 애정관계이지 애착관계는 아니다. 재혼을 해도 초혼 때의 문제들을 그대로 경험하고, 똑같이 실망하고 이혼 한다. 이혼의 이유는 상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고, 문제의 본질은 ‘순번’도 ‘포장지’도 아니란 걸 알아야 한다. 포장이 품질이 될 수 없듯 사랑의 본질이 곧 순번은 아니다.
지금은 이혼을 했지만 당시 헐리우드 최고의 스타 탐 크루즈와 니콜 키드만부부가 동반 출연해서 화제를 낳았던, 거장 스텐리 큐브릭 감독의 유작 <아이즈 와이드 샷>은 결혼 9년차의 부부를 통한 결혼과 성욕의 모순관계와 부부사이에서의 외도를 그린 영화다. 이 영화는 우리사회의 결혼제도는 엄밀히 인간본성의 성욕과 이성간의 모순 됨을 이야기하고 있다. 결혼은 인간의 성욕을 억압한다. 한 사람에게 충실해야 하고, 한 사람과만 섹스를 해야 하는 절제를 요구한다. 약속이다. 그 약속을 깨뜨리면 일단 비난의 대상이 되고, 결혼생활은 금이 가게 된다. 그래서 성욕은 자연스레 통제 받는다. 하지만 문제는 본능적 욕망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우리 안에 잠자고 있다는 것이다. 절제와 억압으로 위장하고 가릴 수는 있겠지만 아주 없어지는 건 아니다.
빌(탐 크루즈)과 엘리스(니콜 키드만) 부부는 멘허튼에서 중상류층의 비교적 행복한(문제없는) 결혼 생활을 누리고 산다.
어느 날, 빌은 아내 엘리스가 과거 해군장교와 만나 정사를 나누고 싶었다고, 그가 원했다면 모든 걸(남편과 아이까지도)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성욕을 느꼈었다는 고백을 듣는다. 그때까지 ‘억압된 본능’을 인식조차 못하고 있던 빌은 그런 낯선 아내의 모습에 심한 충격을 받게 되고, 그 충격은 아내가 남자와 섹스를 하는 상상으로부터 시작해서, 자신도 성욕을 좇아 상상속의 환상을 꿈꾸는 전혀 다른 남자로 변해가는 계기가 된다.
엘리스의 고백은 충격이다. 성욕이 아무리 본능이라 해도, 본능에 앞서 이성의 힘은 인간 누구에게나 작용한다. 그래서 인정받지 못 한다.
빌이 엘리스를 이해하지 못 하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대가 자신에게만 충실할 것을 원하며 본능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남녀를 떠나 하나의 인간으로 세상을 보면 모두가 모순 된 사회다.
달라진 빌이 친구의 말을 듣고 성욕의 환상을 좇아 찾아간 곳은 비밀리에 집단난교가 이루어지는 가면 파티장이다. 스텐리 큐브릭 감독은 이 은밀한 곳에서 벌어지는 집단난교 파티를 통해 ‘인간 성욕본능’의 현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파티에 초대받는 사람들은 극소수의 특별한 부류의 사람으로, 암호의 비밀을 모르면 어떤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오직 그들만의 파티다. 거기엔 욕망을 억압하는 어떤 의식 따위도 존재하지 않는다. 의식의 세상으로부터 철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가면으로 얼굴을 가려 옆 사람 조차 눈치 볼 필요 없는 그야말로 성욕의 성역인 것이다. 가면을 쓰고 성욕의 욕망을 분출하며 스스로 의식을 파괴하는 모순을 범하는 집단난교는, 인간의 성적본능 그대로다. 인간 누구에게나 욕망은 존재 한다. 식욕이나 성욕도 마찬가지고, 다른 이를 훔쳐보거나, 도덕적이지 못한 일들을 해보고 싶은 반인륜적인 일탈을 경험하고 싶어 한다.
그런 일탈을 찾아 나선 빌의 상상 속 아내의 모습은 언제나 욕망을 불태우는 집단난교 속에 자리 한다. 일탈의 호기심을 악마의 유혹이라며 비난하던 빌은 아이니컬하게도 실제행동으로 옮기고, 그런 반인륜적인 욕망은 인정하지만 상상만으로 끝낸 엘리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인간의 복잡하고도 오묘한 모순 됨을 엿볼 수 있다.
영화는 인간 본능에 관해 어둡고 암울한 비전을 제시한다. 겉으로는 아무 일이 없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사는 인간의 본능적 욕망현상을 표현한다. 영화 도입부 파티에서 부부가 각기 다른 이성에게 유혹당하는 장면이 있다. 빗나간 빌의 상상은 그때가 시발점이다. 자신을 유혹하는 여자와 다른 남자에게 유혹당하는 아내를 오버랩 시켜서 보고, 집단난교 무리속의 가면을 쓴 여자와 아내 엘리스를 애써 구분하지 않으려 한다.
성(性), 그건 욕망도 이성도 현상의 차이 일뿐 본질은 아니다. 어느 쪽이든 지나치게 치우치면 위험하다. 성경적 의미의 인간 창조개념으로 본다면 첫째가 종족번식의 수단이고, 둘째가 종족번식을 개을리 하지 말라고 조그만 쾌락을 준 것이고, 그 셋째가 생명을 소중히 생각하라며 산고의 고통을 부여하고, 마지막으로 그것에 폐경이나 발기부전으로 유통기한을 둔 것은 인간이 쉬 죽지 말라는 창조자의 사랑하는 마음에서라 한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연인의 포장지나 순번 따위에 신경 쓰지 마라. 포장지 둘렀다고 중국산이 다 국산이 되는 건 아니다. 걸레는 그냥 걸레지 포장지 둘렀다고 행주는 아니라는 말이다. 옆에 누워있는 마누라를 낮에 봤던 그 여자와 동일시해 연상하지 마라. 모텔에 같이 누워있던 여자로, 클럽에서 눈 맞았던 여자로 만들지 마라. 그리고 마누라를 잘 아노라 확신하지 마라. 어리석은 일이다. 지금 당신이 알고 있는 아내는, 자기 자신도 자기를 잘 모르는 그런 여자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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