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문신구 스크린 속에로스만나다 [15]
영화감독 문신구 스크린 속에로스만나다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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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07-07 14:22
  • 승인 2009.07.07 14:22
  • 호수 793
  • 59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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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판 ‘과속스캔들’ <주노>

열 여섯 발칙한 소녀의 첫 경험과 임신

영화 ‘과속 스캔들’이 관객 800만을 넘기고, ‘여고괴담’이 5편째 시리즈로 제작되고 있는 데는 이유가 있다. 우리나라에선 예전부터 학교마다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괴담이 하나쯤은 다 있다.

‘화장실에서 핏덩이 아기가 발견됐다고 하더라.’ ‘교실 마루바닥 속에 죽은 아기가 있었다더라.’ ‘수업시간에 애를 낳았다더라.’ 등, 불과 얼마 전만해도 학생들 간에 입에 입을 통해 심심찮게 돌던 말들이다. 그 중에는 실제로 일어났던 일들도 있었고, 지금도 알게 모르게 그 괴담 같은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2007년, 열여섯 발칙한 한 소녀의 첫경험과 임신을 통한 성장영화 ‘주노’가 전 세계를 발칵 뒤집었다. 신선하고 유쾌한 이 영화는 세계 영화계 평단과 관객을 동시에 매료시키며 영화계에 핵 폭풍 같은 지각 변동을 몰고 왔다.

미국 개봉 당시 흥행 돌풍을 일으키며 세계적으로 가장 뜨거운 화제의 중심에 있던 <주노>는 2008년 아카데미를 비롯한 각종 영화제에서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각본상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으며, AFI(미국 영화 연구소)와 뉴욕타임즈가 선정한 ‘올해의 영화’에 선정됐다.

혜성처럼 나타난 천재작가 ‘디아블로 코디’와 배우 ‘엘렌 페이지’, 그리고 제이슨 라이트먼 감독이 만들어낸 걸출한 영화 ‘주노’는 언론과 평단의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열렬한 찬사와 함께 박스오피스 1위로 이어졌고, 블록버스터 영화 제작비의 1/100 정도인 250만불로 1억불(1000억원)이란 놀라운 수익을 올리며 영화 흥행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이변을 낳았다.

소통부재의 나라에 사는 우리 정서로 볼 때 영화 ‘주노’는 충격이다. 특히 성문제에 관해서는 후진국 수준이니 그 아이(주노) 앞에 부끄러울 정도다.

락을 좋아하고 영화를 좋아하는 열여섯 살의 ‘주노(알렌 페이지)’는 첫경험 상대를 이웃에 사는 또래 친구 ‘폴린 불르크(마이클 세라)’로 결정하고, 그 장소로 집안 거실을 택한다. 그리고 후일 임신사실을 알게 된 ‘주노’는 낙태를 위해 산부인과를 찾는다. 여기까지가 이야기의 시작이자 사건의 발단이다. 이 정도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첫경험에 임하는’ 주노의 태도만큼은 달랐다. 그 아이는 첫경험을 할 때나 산부인과에 갈 때에도 창피해 하거나 죄의식 같은 건 없다. 지극히 당연한 일임에도 당혹스럽게 느껴지는 건 무지한 우리의 정서 탓일 게다. 게다가 더 놀라운 것은 부모를 불러 앉혀놓고 그 앞에서 “나 임신 했어요.”라고 당당하게 고백하고, 낙태하지 않을 것이며 아이를 입양 할 양부모까지 정해져 있다고 말 한다.

‘틀린 것(wrong)’과 ‘잘못된 것(failure)’, 그리고 ‘다른 것(different)’은 구별돼야 한다. 남과 다르거나 일이 잘 못 됐다고 해서 틀린 것은 아니다.

‘주노’가 첫경험을 시도하는 과정이 다르다고, 사후 처리를 잘 못해서 임신을 했다고, 그것이 틀린 건 아니란 뜻이다. 잘 못 된 인식은 돌이킬 수 없는 더 큰 과오를 범할 수 있다.

영화는 한걸음 더 나아가 ‘주노’의 고백을 들은 부모를 통해 우리를 숙연하게까지 만든다. 어린 딸의 고백을 들은 부모는 “퇴학이나 마약이길 바랐죠.”라 하면서도 엄청난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도 당당함을 잃지 않는 어린 ‘주노’나, 충격적인 딸의 고백 앞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고 침착할 수 있는 부모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한다.

‘내가 주노라면, 내가 주노 부모의 입장이라면 과연 어떻게 했을까?’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억지로 외면하기엔 맘 속 부끄러움이 너무 크다.

그들이 보여주는 따뜻한 신뢰는 감동을 넘어 존경심마저 들게 한다. 어린 딸의 임신에 충격을 받기는 하지만 부모는 볼록 나온 배마저도 사랑해주며 유머로 긍정적인 상황을 만드는 모습은 부럽기까지 하다. 소통이 가져다주는 아름다움이다. 소통은 서로를 이해하게 하고, 소통을 통해 상황을 바꿀 수 있었던 것이다.

언젠가 모 텔레비전 방송 외국여성들이 나오는 토크쇼에서 성에 관한 인식의 차이를 얘기하는 걸 본적이 있다.

대부분의 외국 여성들이 하는 말이 “왜 한국 여자들은 성(행위)에 대해 부끄럽고, 나쁜 죄의식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다.”였다. 첫경험은 숨기는 것이고, 이성과의 성관계는 말해서는 안 돼는 비밀이고, 성에 관한 노골적인 질문은 금해야하는 것들을 이해를 못 하겠다는 것이다.

소통의 문제다. 교육의 소통이 문제이고, 가족간의 소통이 문제이고, 나아가 사회적 인식의 소통이 문제인 것이다.

소통의 사회에서 살던 그들이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어려서부터 체계적인 성교육을 받고 자라고, 가장 편하게 성 고민을 털어놓고 상의하는 가족, 그것도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하고 잘 이해해줄 수 있는 부모와의 소통을 이루며 살던 그들이다.

반면에 우리네 소통은 어떤가. 아직도 성인이 될 때까지 정자, 난자나 가르치는 교육 수준에, 순결이 미덕이고 ‘쉬운 여자’가 매도당하는 사회에서 늘 감시당하며 살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독일에서는 초등학교 3학년이면 임신에 대해 가르치고, 5학년이면 막연한 이론뿐 아니라 좀 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교육을 하고, 7학년엔 학생들에게 피임법을 가르치며 콘돔을 나눠줘서 사용법에 대해 조사를 해 오라고 한다. 더 놀라운 건 그 모든 교육이 부모와 함께 한다는 것이다. 교육을 통한 학교, 가족, 사회간의 소통을 이루는 것이다.

만약 그런 일이 우리나라 어느 학교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당장 선생은 옷을 벗고 학교는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르지만, 박수 보낼 일이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더 이상 화장실에서 애를 낳게 해서는 안 된다.

영화 속 ‘주노’는 아이를 입양할 바네사(제니퍼 거너)에게 이상적인 어머니상을 요구한다. 태어날 아기의 행복을 위해 소통의 조건을 구하는 것이다. 원활한 소통만이 아기의 장래를 보장 할 수 있고, 그래야 안심하고 입양시킬 수 있다는 거다. 지금 뱃속에 있는 아기의 장차 있을 첫경험을 위해, 얘기치 않은 임신을 위해, 그리고 아기가 낳을 아이의 입양을 위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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