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섹스를 통해 위선을 벗다

옛날 우리 한복에 ‘고쟁이’라는 여자들의 은밀한 속옷이 있는데, 모양새는 바지 형태를 했으나 가운데가 터져 언제든 편하게 열고 닫을 수 있게 벌어지도록 돼있다.
거기엔 여자로 생활하는데 중요한 두 가지 목적이 있다. 하나는 복잡한 한복의 구조상 일일이 구차하게 옷을 다 벗지 않고도 용변을 수월하게 볼 수 있게 하는 거고, 또 하나는 은밀히 이뤄지는 성생활에 용이하게 쓰임 받게 하는 데 있다. 최소한의 적절한 공간을 보다 쉽게 확보함으로 은밀하게 치러지는 성행위를 좀 더 원활하게 할 수 있게 하는 기능을 하는 것이다.
섹스에는 윤리나 도덕 필요 없다
섹스는 알몸으로 한다. 어느 누구도 섹스를 옷 입고 하는 사람은 없다. 아무리 급해도 입고 있는 옷을 벗은 뒤에나 가능한 행위다.
세상의 권세를 다 쥔 제왕도, 윤리 도덕을 전부로 하는 종교 지도자나 성인군자, 지식인, 우리 조상, 어머니, 아버지도 모두가 벗어야만 할 수 있다.
기실 입고 있던 천 조각만 벗는 게 아니라 지위나 체면, 권위나 인격까지도 다 벗어던지고 나서야 교합의 일체를 이루어 오르가즘을 향한 제대로 된 행위를 할 수 있게 되는, 그 게 바로 섹스다.
1973년. 20세기 전설적인 위대한 명배우 마론 브란도와 명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가 만나 탄생된 불후의 명작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가 발표됐을 당시 온 세계는 마치 지구에 종말이라도 올 것처럼 떠들어 경계했다.
영화 한 편에 그렇게 큰 이슈가 있었던 데는 이유가 있다. 주인공 폴의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인 변태적 성행위 따위가 아니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나 모든 관습과 의식의 탈피나 부정 따위가 아니라, 영화가 인류사회 삶의 가장 근간을 이루고 있는 관계마저도 부정한 데 있다.
“난 네 이름은 알고 싶지 않아. 넌 이름이 없고, 나도 이름이 없어.” 첫 만남에 준비도 예고도 없이 섹스를 하고는 아무런 기약도 말도 없이 떠났던 폴(마론 브란도)이 두 번째 섹스를 하고 난 뒤 잔느(마리아 슈레이더)에게 하는 말이다.
프롤로그에 그냥 의미 없이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로 만났던 두 사람은, 잔느가 “난 사랑에 빠졌어요.”라 고백하면 폴은 “넌 사랑에 빠진 게 아니라 물에 빠졌어.” 그리고 “널 행복하게 하는 건 사랑이 아니라 이 아파트야.”라 단정해 말 한다.
지금 이 현재가 존재하는 건 그런 의미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는 그냥 현재로서만 있을 뿐이고, 이름도 사랑도 지금 이 시간과 우리 섹스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그건 다 거짓이고 착각일 뿐이며 ‘잔과 폴’이 아닌 ‘너와 나’로 족하다는 거다.
관계를 부정 한다는 건 인간사회의 근간을 뿌리 채 흔드는 일이다.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하고 이 영화를 경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거기에 있다.
국내엔 제작된 지 23년만에 개봉
가뜩이나 겁 많고 의심 많은 우리나라에는 영화가 만들어지고도 23년이나 지난 뒤 1996년에야 엄한(무식무지한) 검열을 거처 자르고, 모자이크하고 나서 공개됐다.
졸지에 아내를 잃은 후 폴은 그 어떤 것도 의미도 없고 다 부질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잔느와의 기괴한 섹스 장면에서 그 현상은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모든 겉치레를 다 벗어던지고 알몸으로 서로 엉켜 교합이 된 상태로 이름대신 동물소리를 내고 꿀꿀거리며 교성을 질러댄다. 그리고 깔깔대고 웃으며 행복해 한다. 오르가즘이다. 놀라고 소름끼치는 장면이다. 모든 기성이 두려워하고 경계할 수밖에 없었던 점이 비로 이 장면, 잔느가 웃으며 그 해탈의 오르가즘에 행복해 한다는 사실이다.
뜬금없이 나타난 폴에게 잔느는 “우리 이제 끝났어요.”라 외면하지만 “끝났으니 다시 시작하는 거야.” 라는 폴에겐 시작도 끝도 의미가 없다. 또 재회의 기쁨에 술에 취한 폴이 잔느와 함께 크럽에서 “탱고는 의식이야. 우리도 춤추자”며 엉망진창의 더티탱고를 추는 장면에선, 그는 룰도 격식도 주위의 손가락질도 상관 않는다. 엄숙한 홀은 순식간에 개판이 되고 오히려 그를 제지하며 말리는 여자를 향해 그는 엉덩이를 까서 흔들며 엿이나 먹으란다.
안녕을 원하는 기성은 항상 불안해하며 이를 붕괴하려드는 파괴세력들을 경계하기 마련이다. 영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는 그 파괴세력이기에 충분했고 경계 받아 마땅하다.
파괴세력분자인 폴이 위험하고, 동화세력인 잔느는 더 위험하다. 통제의 장벽이 붕괴되고 숨겨진 진리의 비밀인 본질이 드러나는 게 싫고 두려운 것이다.
영화는 여기서 한 발 더 다가가 그들의 목에 날카로운 칼날을 대고 무장해제와 자백을 강요한다. 폴의 파행적 행동과 집착으로부터 도망치던 잔느가 결국 폴을 죽이게 되고, 폴의 죽음 앞에서 잔느는 세상을 향해 소리친다. “난 저 사람을 몰라. 저 사람이 날 쫓아왔어. 날 겁탈하려고 했어. 저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야. 난 저 사람이 누군지 몰라. 누군지 몰라.”
모른다. 안다는 건 다 거짓이고 허상이다. 세상 가운데 진실이란 없다. 다 가짜다. 너도 나도 우리도 다 가짜다. 그렇게 잔느가 남긴 마지막 대사의 여운을 길게 남기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마론 브란도의 자전적 이야기 같은 영화, 거장 베르톨루치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가 우리에게 남겨준 멧세지는 충격이자 감동이다. 우리는 늘 지금을 살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은 잊고 산다. 무수한 만남과 관계를 가지며 현재에 존재하면서도 그 본질은 망각하고 산다.
오랜 관습과 기성에 길들여져 이젠 이를 감지하고 느낄 촉수마저 거세되고 없다.
벗자. 이상하고 요상한 체위에 민망해하지 마라. 사정의 꼭짓점에 눈알이 충혈이 되고 흉하게 찌그러지는 얼굴에도 부끄러워 할 것 없다. 요괴의 괴성같이 터져 나오는 교성에 놀라 입 막지 마라. 폴의 신분증은 바지 지퍼 속에 있고, ‘고쟁이’가 미니스커트로 바뀐지 오래다.
해라. 장소 불문, 상대 불문, 묻지도 알려고도 말고 통하고 일어서면 해라. 더 이상 의미 찾지 마라. 그 게 다다.
‘폴의 죽은 아내는 같은 건물 위층에 세 들어 사는 마르셀이란 남자에게 폴과 똑같은 파자마, 똑같은 술, 똑같은 육체를 제공하며 살았다.’
문신구 그는 7~`80년대 영화배우로 활동했으며, 90년대 연극 <미란다>를 연출했다. 당시 <미란다>는 마광수 교수의 <즐거운 사라>와 함께 외설시비가 붙어 법정에 섰다. 이후 그는 <콜렉터>, <로리타> 등 성과 사회적 관계를 담은 영화와 연극을 제작해 왔다. 현재 연예계 성상납사건을 담은 <성상납리스트>를 영화화하는 작업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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