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밀러의 北回歸線

북위 23도 26분 22초, 태양의 황도상의 위치가 가장 북쪽일 때 태양이 이 위도에 놓이게 되고 태양의 남중고도가 90도로, 이때 북반구에서는 낮이 가장 길고 남반구에서는 낮이 가장 짧아지는 지구 위선이 북회귀선이다.
물이 99도를 넘어야 끓듯이 활주로를 달리는 비행기도 지면에서 그 육중한 몸체를 띄우는 데는 정확한 임계값이 있다.
아주 작고 미세한 차이에도 전혀 다른 변화를 나타내는 임계현상은, 온 우주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밀고 당기며 서로 맞물려 돌아갈 수가 있듯이, 세상 모든 유무형의 존재는 다 그 섭리의 질서 가운데 있다.
최근 아침 생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한 왕년의 톱스타 신성일씨가 방송관계자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걸 봤다.
‘예쁜 여자를 보고도 아무 생각이 없다는 남자는 솔직하지 못하다’ ‘난 남자로서 멀쩡한 육신을 가졌고 기회가 있을 땐 사랑한다’ ‘예쁜 여자 보면 눈요기하고, 여기 방청객 중에도 예쁜 여자 많다’ 자칫 방송 사고에 가까운 발언에 사회자는 무척 당황해했다. 수위를 넘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대한민국 대표 공중파 방송에서 국회의원까지 지냈고 아내까지 있는 당대 최고 인기스타였던 공인이 전 국민이 지켜보는 생방송 중에 최소한 지켜야 할 가식과 위선의 회귀선을 넘었다는 것이다. 막 알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온 병아리처럼 임계현상엔 반드시 격어야 할 변화의 저항들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영화 ‘헨리와 준(henly and jun)’은 1934년 당시 영미권에서 엄청난 화제를 뿌리며 출간된 헨리 밀러의 소설 ‘북회귀선(tropic of cancer)’을 작가 아나이스 닌과 ‘프라하의 봄’, ‘떠오르는 태양’등을 만든 필립 카우프먼 감독에 의해 1990년 미국에서 새롭게 만들어졌다.
소설 출간 당시 평단의 극단적인 반응과 함께 외설시비로 오랜 기간 판금되기도 했던 작품 속 성 묘사는 기성의 윤리나 관습, 질서를 흔들어 놓았고, 난잡하고 방종한 등장인물들의 섹스 행위는 생의 근원적 원동력의 발산이며 궁극적으로 자연의 질서 회복이라는 금기의 벽을 넘었던 것이다.
영화는 소설가 아나이스(마리아 드 메데이로스)가 ‘북회귀선’이라는 소설을 쓰는 괴짜 헨리(프레드 워드)와 그의 아내 준 밀러(우마 셔먼)을 만나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자전적 구조의 이야기로 담았다.
영화 도입부에 출판사 사장과 있었던 일을 남편인 휴고(리차드 E 그렌트)에게 고백하는 장면이 있다. 아이니스는 ‘출판사 사장이 키스를 했다’ 라고 고백하면서도 ‘딱 한 번’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영화의 키워드다.
인간 속내를 들여다보면 드럽고 추악하고 부끄러운 모습으로 꽉 찼다. 그래서 늘 위장하고 감추며 산다. 들어나는 것도 들춰내는 것도 금기다.
만약 만인 앞에 우리의 부끄러운 속내가 세상에 들어난다고 치자, 그는 분명 인간집단에서 매장 당하거나 자살을 해야 할 것이고 들춰낸 사람을 찾아 살인이라도 기꺼이 하고 말 것이다.
그리고 헨리와 관계를 맺은 아나이스가 그의 아내인 밀러와 동성애로 이어지는 과정에 벌어지는 엽기적인 섹스의 형태는 인간 사회의 관습과 윤리, 질서를 깡그리 깨부수고, 나아가 기존 사회의 구조마저 부정하고 해체 시킨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인위적 질서는 자연의 창조 질서와 같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적당히 거짓말 하고 보호색으로 위장하고 위선을 떨며 숨기고 산다. 특히 오늘 날 문명사회에 있어서 ‘성’, 즉 섹스에 관한 한 최고의 아킬레스건이다.
도덕과 윤리, 제도와 종교로부터 온갖 치명적인 죄의 이름으로 억압받고 감시당한다. 성의 질서가 무너지면 사회 전반이 붕괴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영화 종반부 아나이스 부부는 정부인 헨리를 침대 안으로 끌어 들인다. ‘이리 올라와서 같이 누워요.’ 남편과 정부를 한 침대위에까지 올려놓지만 아나이스의 옷은 벗기지 못한다. 그리고 헨리와 아나이스의 대화를 통해 세상을 향한 자괴적인 넋두리를 하는 장면에선 ‘내 책을 누가 출판해 주겠어? 뻔 해, 내 책을 법으로 금지 시키고 말걸’, ‘교황과 세상의 모든 왕과 모든 출판사가 거절을 한다 해도 할 거야’라며 슬며시 눈치걸음으로 물러난다. 카우프먼(또는 헨리 밀러)의 항복 선언이다.
비록 금기의 임계선의 폭은 좁지만, 그 변화와 저항의 무게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두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교황과 세상의 모든 왕들 앞에 미리 무릎 꿇어 ‘난 당신들과 싸워 넘어뜨릴 적수가 되지 못하나이다’라고 먼저 스스로 낮추어 선처를 구하는 꼴이다.
러시아의 대문호 블라드미르 나보코브의 사망 100주기를 기념하기 위한 범세계적인 행사의 일환으로 대학로에서 연극<로리타> 공연을 준비할 때 일이다.
당시 <미란다> 사건으로 대법원의 유죄 확정을 받은 직후라 언론에서나 평단에서나 사회단체에서 나는 요시찰 인물로 낙인이 찍혔고, 스텐리 큐브릭이 <로리타>를 만들고 평생 미국이란 나라를 떠나 살아야 했을 만큼 녹녹치 않을 저항을 예견할 수 있는 작품이라 나 역시 예민해져 있었다.
그래서 자구책으로 한국 연극사상 처음으로 법률가를 위시한 각계 인사들을 초청해 시연회를 열게 됐고, 그날 난 그 자리에 초청돼 자리를 했던 김정일(정신과 전문의)박사로부터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문 선생이 이번에 너무 의식한 것 같다’ 기대에 못 미치고 실망이란 얘기다. 맞다. 맞는 말이었다.
우군이라 나서기엔 껄끄러운 <미란다>사건 당시에도 그는 텔레비전 생방송 토론프로에서 편 가르기 문화를 비판하며 홀로인 나에게 힘과 위로가 돼 줬던 사람이다. 나는 곧 그 일을 후회 했고 장기 공연의 계획을 접고 두 달 만에 막을 내렸다.
헨리 밀러도, 아나이스도, 그리고 감독 카우프먼의 고민도 안다. 기대를 하고 영화를 관람했던 사람들의 반응이 ‘별로’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나는 안다. 기성 세상을 향한 선전포고라 생각했던 것이 전쟁도 하기 전에 백기를 드는 꼴이 돼버렸다. 이도저도 아닌 회기선상의 어설픈 꼴이 돼버린 것이다. 헨리의 아내 준이 남편의 정부이자 연인인 아나이스를 향해 독설을 퍼 붓는다. ‘사랑이 없는 욕정에 의한 섹스는 체험이나 경험이고 교활한 사기꾼의 사기일 뿐이야.’
진짜 전쟁을 할 사람은 전후를 생각지 않는다. 전쟁 후의 피해를 생각한다면 그 전쟁 못 한다. 설사 하더라도 질 수밖에 없다. 다윗이 골리앗을 골리앗으로 보았다면 나서서 싸움에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전쟁의 마지막 피해는 죽음이다. 죽을 각오로 전쟁에 임한다면 최소한 부끄러운 백기는 들지 않아도 된다는 거다.사랑해라. 섹스해라. 전쟁을 해라. 두려워하지 말고 눈치 보지 마라. 죽을 각오로 임해라. 사람들은 와이담을 좋아는 하지만 내가 그 주인공이 되는 건 싫어한다. 그래도 나는 생방송 중에 사람들에게 욕먹고 아내 엄앵란 선생을 섭섭케 할 말을 하고도 두 눈에 힘주는 신성일 선생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문신구 그는 7~`80년대 영화배우로 활동했으며, 90년대 연극 <미란다>를 연출했다. 당시 <미란다>는 마광수 교수의 <즐거운 사라>와 함께 외설시비가 붙어 법정에 섰다. 이후 그는 <콜렉터>, <로리타> 등 성과 사회적 관계를 담은 영화와 연극을 제작해 왔다. 현재 연예계 성상납사건을 담은 <성상납리스트>를 영화화하는 작업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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