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텔 톤 아름다운 드라마를 만나다

〈시간이 흐를수록〉은 사랑 이야기다. 하지만 여기서 그리고 있는 사랑은 불꽃같이 치열하고 폭풍처럼 격렬한 감정이 아니다. 두 주인공 로디온과 리다가 보여주는 것은 삶의 굴곡을 다 겪어낸 사람만이 비로소 피워낼 수 있는 잔잔하고 사려 깊은 사랑이다. 마치 다 꺼진 듯 보였던 난로 속에서 살아남은 불씨가 따스한 온기를 전하듯 이들은 저물어가는 세월 속에서 다시 사랑을 꿈꾸고 삶에 마법을 건다.
〈시간이 흐를수록〉에는 치열한 갈등이나 드라마틱한 사건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미 아픔은 오래 전 이들의 삶을 할퀴고 지나갔다. 이 이야기는 두 주인공이 지독한 고통의 시간을 겪고 난 뒤, 이후로도 오랜 세월이 지나 이제는 담담하게 과거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 시점으로부터 시작된다. 아픔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그들은 상처투성이로 남겨진 자신들의 삶을 각기 자신만의 방법으로 받아들이면서 이어나간다.
아픔과 눈물로 지새운 밤들을 말없이 흘러가는 세월 속에 묻은 다음에야 지을 수 있는 관조적인 웃음. 지독한 외로움과 가슴 저미는 고통을 겪은 이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따스한 여유와 유머가 작품 가득 향기를 더한다. 간결하고 시적인 대사와 마지막 장면의 아름다운 반전은 극장 문을 나서는 관객들의 마음에 따뜻한 미소를 선사할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원제 ‘오래된 코미디’)〉의 작가 알렉세이 아르부조프는 아직 우리에게는 낯선 이름이지만, 소비에트 시절 체홉 만큼이나 자주 공연되었던 러시아 드라마계의 거목이다. 그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딱딱한 이념을 일상적인 삶 속에서 부드럽게 그려낸 것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무엇보다 감각적인 대사와 섬세한 심리묘사로 이름이 높았으며 비평과 대중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가였다.
젊은이의 감각에 맞는 대사와 음악을 적극 사용하고 멜로드라마적인 낭만성이 가미된 아르부조프의 작품들은 상연하기에도 좋은 요소들이 많아서 무대에 자주 올랐고, 폭넓은 관객층의 지지를 받았다. 특히 아르부조프는 남녀의 미묘한 관계와 심리 상태를 잘 포착해 청춘 드라마의 전형을 제시했다는 평을 받았으며 이후 러시아 극작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말년에는 밤필로프, 페트루스카야 등 7·80년대 현대 러시아를 대표하는 극작가들을 키워내기도 했다.
오직 두 사람의, 두 사람을 위한 무대
〈시간이 흐를수록〉은 특별한 사건이나 갈등에 의해 극이 진행되지 않고, 오로지 두 남녀의 대화로만 이어지는 이인극이다. 주인공들의 섬세한 심리와 대사만으로 극이 이루어지는 만큼 배우의 매력과 앙상블이 무엇보다 중요한 작품이다. 이번 공연에서는 지난 해 12월,〈신의 아그네스〉로 오랜만에 무대에 돌아와 다시 한 번 연극계의 시선을 집중시킨 배우 윤석화와 젊지만 무대위에서 단단한 힘을 보여주는 배우 최민건이 그 동안 보여주지 못했던 매력을 한껏 펼쳐 보일 예정이다.
〈시간이 흐를수록〉의 대본을 읽어보면 누구나 여주인공의 캐릭터에서 곧바로 ‘윤석화’란 이름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극중 ‘전직 연극배우’인 리다는 단번에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배우 특유의 기품과 매력을 지닌 인물이다. 그녀는 반짝이는 재치와 순발력으로 사람들을 압도하며, 언제 어디서건 노래와 춤으로 삶을 무대처럼 만들 줄 안다. 무대 위에서건 아래에서건 천상 ‘배우’라는 점에 있어 리다와 윤석화 사이에는 너무나 공통점이 많다.
연출을 맡은 최우진 역시 “연습을 따로 하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 무대에 서도 바로 리다가 될 것”이라고 말할 만큼 서로 닮은 두 사람이기에 이번 작품에 대한 기대가 더욱 커진다.
한편 윤석화는 최근 몇 년 간〈영영 이별 영이별〉〈신의 아그네스〉등 무거운 작품 들을 연이어 맡으면서 어둡고 심각한 역할을 주로 맡아왔다. 진지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도 일품이지만, 깃털처럼 가볍고 리드미컬한 연기 역시 그녀의 장기 중 하나다. 이번 공연〈시간이 흐를수록〉에서는 사랑스럽고 재치 넘치는 리다란 인물을 통해 그 동안 우리가 미처 다 보지 못했던 배우 윤석화의 새로운 매력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낯익은 얼굴의 최민건은 잘생긴 외모보다 무대 위에서의 단단한 존재감이 돋보이는 배우다. 영문학과 영화연극학을 전공한 그는 섬세한 해석과 표현력을 갖추었으며, 특히 무대 위에서 자신의 매력을 최대한 끌어낼 수 있는 힘을 지녔다.
지난해 ‘정미소 창작프로젝트’ 첫 번째 작품이었던〈nabis 햄릿〉에서 호레이쇼 역을 맡은 최민건은 이성적이고 침착한 모습으로 무대 위를 지키며, 비극의 관찰자이자 조종자로써 무게감 있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또한 최근〈안녕, 모스크바〉에서는 뜨겁고 깊은 남자의 사랑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으며, 연극 외에도 영화, 드라마, CF 등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공연일시 5월27일~6월27일
공연시간 평일 저녁 8시/ 수 목 낮2시/ 토 낮 3시(일요일 쉼)
공연장소 설치극장 정미소
티켓가격 R석 5만원/ S석 4만원/ A석 3만원
공연문의 설치극장 정미소 02)3672-3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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