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진룡 전 장관, “김기춘 실장 재임부터 이상해져”
문화계 단체, 예산 삭감·사업 폐지 등 불이익 받아
[일요서울 | 권녕찬 기자] ‘모든 국민은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가진다.’ 우리나라 헌법 제22조 제1항에 명시된 문구다. 이번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태가 이 기본 가치를 송두리째 무너뜨렸다는 지적이 나오는 가운데 파문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청와대에서 주도해 만들었다는 의혹이 제기된 이 명단에는 1만 여명에 달하는 각계 인사들과 단체, 언론사까지 포함돼 있다.
청와대가 그간 정권에 비판적인 인사 등을 찍어내 각종 문화사업을 위한 예산을 삭감하고 폐지하는 등 각종 불이익을 준 정황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동안 소문만 무성했던 문건의 실체가 지난 26일 SBS 보도로 드러났고, 이튿날 유진룡 전 문화체육부 장관이 이와 관련해 유의미한 증언을 했다. 특검팀은 전·현직 청와대 핵심 관계자를 잇따라 소환해 수사의 칼날을 겨누고 있다.
문화계 블랙리스트는 지난 10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도종환 더불어민주당 의원에 의해 존재사실이 처음 확인됐다. 이후 야당 후보 지지와 세월호 선언 등에 참여한 문화예술계 인사 9473명을 적시한 문서 표지가 언론에 공개됐다.
구체적으로 보면 지난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 지지선언에 참여한 예술인 6517명, 2014년 서울시장 선거 때 박원순 후보 지지 선언에 참여한 1608명, 2014년 6월 세월호 시국선언에 참여한 문학인 754명, 2015년 5월 1일 세월호 정부 시행령 폐기 촉구 선언에 서명한 문화인 594명, 총 9473명이다.
명단이 알려지자 문화계 안팎에서 SNS를 통해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다. 문학인들은 역설 화법으로 이 같은 현실을 한탄했다. 안도현 시인은 “블랙리스트 중에 내 이름이 없으면 어떡 하나 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명단을 살펴보았다. 들어가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비꼬았다. 김용익 민주정책연구원장은 “저항과 반전, 평화의 시를 노래한 밥 딜런이 지난 10일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그가 만약 한국인이었다면 받을 것은 블랙리스트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생산지는 靑 정무수석실
당시 조윤선 정무수석
최근에는 보다 구체적으로 ‘생산지’가 어디인지 가늠할 수 있는 문건이 SBS에 의해 공개됐다. 문건 안에는 ‘정무 리스트’라는 부분이 적혀 있는데, 문체부 고위 관계자는 정무 리스트가 청와대 정무수석실에서 작성돼 문체부로 보낸 것이라고 증언했다.
이 문건엔 정부 예산을 지원받는 교수, 시인, 안무가 등 예술계 인사와 극단 등의 단체 명단, 지원자격을 심사하는 심사위원의 인적 사항, ‘좌파 성향’으로 분류된 언론사명까지 기록돼 있다. 리스트에 오른 단체들은 정부로부터 각종 불이익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지원 예산이 삭감되거나 별 이상 없던 문화사업이 폐지되는 식이다.
최근 블랙리스트 실체와 관련해 유진룡 전 문체부장관은 CBS 라디오에 출연, 이 같은 사실에 힘을 실어주는 증언을 했다. 유 전 장관은 2013년 3월부터 2014년 7월까지, 정권 전반기에 문화체육관광 정책을 총괄하는 자리에 있었다. 그는 허태열 전 청와대 비서실장 재임 시절에는 별 문제가 없었는데, 2013년 8월 김기춘 실장으로 바뀐 이후로 비상식적인 상황이 시작됐다고 폭로했다.
문화예술 쪽에서 그들이 생각하는 반정부적 인사나 단체에 대해 지원을 중단하고 제재를 가하라는 압박이 직·간접적으로 들어왔다고 유 전 장관은 말했다. 대표적 예로 CJ 엔터테인먼트를 들면서 영화 변호인에 대해 언급했다고 한다. 문체부가 운영하는 펀드를 왜 그 영화에 투자를 하느냐는 식이다.
유 전 장관은 이 같은 지원 중단과 제재 지시를 김기춘 전 실장이 직접하거나 모철민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 또는 김소영 문화체육비서관을 통해 문체부로 전달됐다고 밝혔다. 처음에는 구두로 내려왔고, 문서로 받은 것이 2014년 6월 무렵인데 그 때는 몇 백 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당시 김소영 비서관 등에 출처를 물으니 본인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정무수석실에서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고 유 전 장관은 밝혔다. 교육문화수석실은 전달자에 불과하고 실제 작성과 실행하는 곳은 정무수석실이라는 것이다. 당시 정무수석은 최근 논란에 중심에 선 조윤선 현 문체부 장관이다. 유 전 장관은 정무수석실 산하 국민소통비서관실에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실무적으로 작성했고, 총괄 배후를 김기춘 실장으로 지목했다.
최근 문체부 고위 관계자는 한 언론에 “블랙리스트가 국민소통비서관실 김소영·신동철·정관주 전 비서관에 의해 작성됐다”며 “당시 청와대가 우리 실무진을 개처럼 부려먹었다”고 울분을 토했다.
“김기춘 따귀 때릴 뻔”
특검, 김 실장‧조 장관 정조준
유 전 장관은 지난 22일 국회 ‘최순실 국정농단’ 진상규명 5차 청문회에 증인으로 채택됐지만 출석하지 않았는데, 이에 대해 “혹시 나갔다가 김 전 실장을 보면 따귀를 때리거나 뒤통수를 때리는 사고를 칠 수 있겠다고 생각해 자제했다”고 밝혔다. 그는 또 “나 역시 이 같은 상황을 막지 못한 죄인인데 남들 보는 앞에서 서로 잘했네 하며 공개적으로 남의 죄를 고발하는 모습이 유쾌하지 않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다만 이 같은 사실을 언론에 밝히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김 전 실장의 뻔뻔한 위증을 보고 제가 아는 진실을 밝히는 게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설명했다. 유 전 장관은 “이 사태가 정말 대통령의 뜻인지 아니면 호가호위를 한 김기춘 실장의 장난인지는 역사의 정의를 위해서도 특검이 가려줘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박영수(64·사법연수원 10기) 특별검사팀은 ‘문화계 블랙리스트’ 수사에 속도를 내고 있다. 특검팀은 지난 26일 블랙리스트 주도 작성한 의혹을 받은 김기춘 전 실장과 조윤선 장관 등에 대한 압수수색을 벌였다. 압수수색 대상에는 김 전 실장의 자택뿐 아니라 조 장관, 전·현직 문체부 관계자 사무실과 주거지 등이 포함됐다.
이후 29일에는 모철민 전 교육문화수석(현 주프랑스 대사)를 소환 조사했으며, 이튿날에는 청와대로부터 작성된 리스트를 관리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김종덕 전 문체부 장관이 특검에 잇따라 출석했다. 특검팀은 관련자 소환 조사 및 압수물 분석 후 김기춘 전 실장과 조윤선 장관을 소환할 것으로 관측된다.
권녕찬 기자 kwoness7738@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