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우에게 ‘캐스팅’은 연기력 발산 기회는 물론 생계와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다. 이 중요한 문제가 100% 실력만으로 결정되지 않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다. 제작사의 무리한 자사 배우 기용과 톱스타 캐스팅 시 같은 소속사 배우를 동반 출연시키는 일명 ‘끼워 넣기’는 오래 전부터 지적받아온 문제. 배우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길 수 있는 불공정한 캐스팅 관행을 집중 조명해 본다.
지난 주 연예가 인기 검색어 중 하나는 배우 성현아와 강성연이었다. 9월 방송 예정인 SBS 드라마 <타짜>의 ‘정 마담’ 역을 두고 갈등을 빚었기 때문이다.
사건의 시작은 6월 중순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성현아가 ‘정 마담’ 역에 캐스팅 됐다는 기사가 났지만 얼마 후 <타짜> 제작사인 올리브나인 소속 강성연과의 교체설이 거론됐다. 이어 지난 21일 “강성연이 정 마담 역할로 최종 확정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진짜 정 마담’은 나?!
논란은 같은 날 성현아가 자신의 블로그에 캐스팅에 관한 심경이 담긴 글을 올리면서 증폭됐다.
‘계약서에 도장만 찍으면 되는 상황에서 올리브나인이 납득할 만한 이유도 없이 자사 배우를 쓴다는 입장을 전해왔다. 이번 일로 인해 큰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성현아의 글이 기사화되자 다음 날인 22일, 강성연은 보도자료를 통해 ‘성현아에게 정 마담 역을 뺏은 게 아니다. 처음부터 정 마담 역 제의를 받았고 고민하던 중 혼선이 빚어졌다. 안타까운 일이다’는 입장을 밝혔다.
24일엔 성현아 측이 보도자료를 통해 강성연 측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나서 ‘소속사 간 대결로 번지는 것 아니냐’는 추측까지 나왔다. 하지만 같은 날 오후 올리브나인이 성현아에 대한 사과와 양측이 만남의 자리를 갖고 오해를 풀었다고 밝히면서 논란은 일단락됐다. 정마담 역을 강성연이 한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었다.
제작사, 자사 배우 기용 관행?
이번 일을 계기로 매니지먼트를 겸하는 제작(기획)사의 자사 연예인 캐스팅이 다시금 도마 위에 올랐다. 제작사의 무리한 자사 배우 캐스팅이 여러 가지 문제와 불필요한 논란을 야기 시킬 수 있다는 것.
연예계에서는 제작사가 자신들이 만드는 작품에 자사 배우를 출연시키는 걸 관행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때문에 한 연예 관계자는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면 몰라도 <타짜>에 강성연이 캐스팅된 것 자체가 크게 비난 받을 일은 아니라고 본다”고 말하기도 했다. 톱스타를 대거 보유한 제작사가 증가하면서 이런 현상을 더욱 가속화 되고 있다.
일례로 SBS <로비스트>에는 제작사 초록뱀미디어의 자회사인 젤리박스와 공동제작사 예당엔터테인먼트 소속 배우들이 주조연으로 출연했다.
주연배우 한재석, 장진영, 유선은 예당엔터테인먼트, 조연배우 김미숙, 정성환, 김다현 등은 젤리박스 소속이었다.
국내 최대 매니지먼트로 손꼽히는 싸이더스HQ의 경우 제작을 맡은 드라마 <고맙습니다>와 <불한당>에 장혁, 공효진, 김성은, 류승수, 홍경인 등 소속 배우들을 대거 투입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드라마뿐 아니라 영화에서도 이런 상황은 마찬가지다.
제작비 절감 위해…
제작사가 자사 배우를 우선으로 캐스팅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제작비 절감과 원활한 업무 진행 등 여러 가지 이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관계자에 따르면 작품마다 차이가 있지만 현재 드라마 제작비는 회당 평균 2억에서 2억3000만원 선. 톱스타 두명이 출연할 경우 보조출연자까지 포함, 배우 출연료만 1억2000만원에 달한다. 이중 80% 정도를 방송국에서 지원받는다. 제작사가 안정적이고 톱스타가 출연해야 이나마도 가능하고 영세 제작사가 받는 지원금은 훨씬 적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제작사 입장에선 제작비 절감이 최우선인데 자사 배우를 캐스팅할 경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제작사 PD는 “자사 배우라고 출연료를 턱없이 혹은 마음대로 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양해를 구하고 협의하기가 훨씬 쉬운 게 사실이다”며 “때문에 역할에 맞는다면 제작사 입장에선 자사 배우를 캐스팅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업무 진행도 한결 수월해진다. 출연 의사를 신속,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고 추후 일정에 관해서도 직접적인 전달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타 소속사 배우, 특히 톱스타에게 출연 제의를 할 경우 “기다리다 세월 다 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촬영이 임박해 믿었던 배우가 출연을 거절하면 발등에 ‘불 떨어지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한다.
제작사에서 자사 배우들의 연기력이나 이미지, 특기사항을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역할에 보다 잘 어울리는 캐스팅이 가능하다는 것도 한 이유다.
톱스타 가는데 신인도 간다?
하지만 상당수 연예 관계자들은 제작사의 자사 배우 기용 자체가 문제라고 지적한다. 이런 시스템 하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투명한’ 캐스팅이 힘들지 않느냐는 것.
탤런트 매니저는 “이미지와 연기력을 고려한다 해도 제작사 소속 배우를 우선시 하는 만큼 타 기획사 배우들에겐 원천적으로 출연 기회가 봉쇄되는 셈”이라며 “제작비 절감을 위해 주연은 그렇다 쳐도 조연, 신인까지 쓰는 건 어떻게 설명할거냐”며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일명 ‘끼워 넣기’ 캐스팅도 같은 이유로 비난받고 있다. 끼워 넣기는 톱스타 캐스팅 시 같은 소속사의 조연이나 신인을 동반 출연시키는 것을 일컫는다.
끼워 넣기의 경우 제작사나 감독이 거절하면 될 것 같지만 상황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톱스타를 ‘모셔오기’ 위해 매니지먼트의 일방적인 요구를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없지 않기 때문이다.
자칫 작품·배우 모두에 ‘상처’
캐스팅 디렉터는 “스타파워가 약해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영화나 드라마 제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가 톱스타 출연”이라며 “때문에 매니지먼트의 요구를 일방적으로 자르긴 힘들다”고 전했다. 제작사와 연출을 겸하는 감독은 “끼워 넣기는 주변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잘못된 캐스팅 관행”이라며 “나 역시 그런 제의를 받은 경우가 있다. 어쩔 수 없이 오디션 기회까지는 주지만 무조건 출연시키지는 않는다”고 밝혔다.
제작사의 자사 배우 캐스팅이나 끼워 넣기가 ‘무리하게’ 이뤄질 경우 작품의 완성도까지 저하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내 가족 챙기기’에 급급한 나머지 배우의 이미지나 연기력도 고려하지 않고 출연을 강행시키면 해당 배우는 물론 작품까지 비난받을 수 있다는 것.
제작사 한 PD는 “관계자 입장에서 팔이 안으로 굽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며 “하지만 준비도 안 된 배우의 출연을 원할 때면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작품과 배우 모두에게 독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충고했다.
잘못된 캐스팅 관행을 겪으며 배우들이 입는 마음의 상처도 크다.
제 아무리 연예계가 무한경쟁 사회이라지만 명분도, 명확한 기준도 없는 캐스팅이나 캐스팅 번복은 배우들도 받아들이기 힘들다.
특히 성현아의 경우처럼 출연이 거의 확정되거나 세간에 알려진 후 캐스팅이 번복되면 배우는 심각한 상실감에 빠진다. 제작사나 톱스타와 같은 소속 배우 역시 캐스팅 과정에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잡음이 생길 경우 상처받긴 마찬가지다.
탤런트 매니저는 “누가 봐도 실력 없는 배우가 단지 제작사 소속 혹은 톱스타와 같은 소속사기 때문에 캐스팅된 게 뻔히 눈에 보이면 다른 배우들 기분이 어떻겠는가”라고 말했다. 이어 “상황이 이렇다보니 보다 많은 기회를 잡기 위해 대형 기획사나 매니지먼트로 신인이 몰리는 경향이 커지고 있다. 결국 영세 연예기획사는 더 힘들어진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현재 미국은 영화나 드라마 제작과 연예인 관리를 겸하지 못하도록 법적으로 규제하고 있다. 국내는 아니다. 때문에 제작과 매니지먼트 관리에 관한 제도 마련이 시급하다. 더불어 투명한 캐스팅을 위한 관계자들의 노력도 절실하다.
신혜숙 프리랜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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