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요서울 ㅣ 이범희 기자] ‘최순실 국정농단’ 파문이 기업 곳곳으로 스며들면서 최고경영진 거취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동안 연임이 예견됐던 현명관 마사회 회장은 지난 7일 보도자료를 통해 이임 결정 사실을 알렸고, 권오준 포스코 회장과 황창규 KT회장은 불과 한 달 전까지도 연임이 기정사실화되는 듯 했지만 현재는 불투명하다.
오히려 삼성 계열 일부 사장들은 최순실 국정 농단 특검 준비에 막혀 자동 연임되는 혜택(?)을 얻었다. 어수선한 분위기가 이어지면서 재계도 곤혹스러운 입장을 숨기지 못한다.
임기만료 대기업 CEO 104명…연임 ‘불투명’
어수선한 틈 타 자동 연임…재계 혼탁 양상
한국2만기업연구소는 지난 11월 24일 자료를 통해 국내 매출 1조 원 이상 되는 대기업 219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2017년 6월 이전에 임기가 공식 종료되는 사내이사는 104명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그룹별로는 포스코가 11명으로 가장 많았고, 롯데 10명, 한전 6명 순이었다.
내년 상반기 이전에 임기가 만료되는 104명의 사내이사 평균 연령은 59.3세로 나타났다.
연령 분포를 살펴보면 55~59세가 41명으로 39.8%를 차지했다. 이어 60~64세가 38명(36.9%)으로 뒤를 따랐다. 50~54세는 13명(11.7%), 65~69세는 9명(8.7%), 70세 이상은 3명(2.9%)으로 조사됐다. 40대 등기임원도 1명 있다.
연임할 뜻 밝혀, 그러나
내년 등기임원급 인사에서 가장 주목받는 곳은 포스코그룹과 KT그룹이다.
포스코 권오준 회장과 KT 황창규 회장은 불과 한 달여 전만 해도 연임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최순실 국정농단의 핵심인물이었던 광고감독 차은택 씨가 포스코와 KT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차 씨와 그의 측근 등은 포스코그룹 계열 광고회사인 포레카 지분 강탈 시도 혐의(강요미수)를 비롯해 KT에 지인을 채용하도록 압력을 행사한 혐의(직권남용) 등을 받고 있다. 이러한 행위는 광고를 독점하기 위한 과정이라는 해석이다.
또 박근혜 대통령과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권 회장의 부인인 박충선 대구대 교수의 역할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실제 박 교수는 박 대통령의 서강대 2년 후배로 박 대통령이 국회의원(경북 달성) 시절이던 지난 2003~ 2005년 경북여성정책개발원장을 역임하며 친분을 쌓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선 권 회장과 황 회장은 피해자라는 인식도 있지만, 두 기업 모두 민영화된 공기업인 만큼 정권과의 단절을 강조했던 권 회장과 황 회장이 비선실세 연루의혹을 받는 상태에서 연임할 가능성이 불투명해졌다는 분석이 유력하다.
반면 최순실 덕에 임기를 연장하는 것 아니냐는 추정을 받는 CEO도 있다. 2014년 1월 나란히 취임해 2017년 1월 27일 임기 만료를 앞둔 김창수 삼성생명 사장과 안민수 삼성화재 사장이다.
삼성생명과 삼성화재는 인사단행 시기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고 선을 그었지만, 회사 안팎에서는 2017년 6월경이 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업계는 이번 사장단 인사를 미룬 배경에는 ‘최순실 국정농단’사태와 연관이 있다고 보고 있다.
최근 삼성그룹이 검찰수사를 받은 데 이어 계열사 사장단 인사의 최종 결정자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국정조사 준비 등으로 정상적인 인사권을 행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삼성은 최근 몇 년간 12월 초 사장단 인사를 실시하고, 그 다음 주 임원 인사를 단행해 왔다. 하지만, 올해 삼성전자가 최순실의 딸 정유라에 특혜 지원을 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검찰수사를 받고 있다.
아울러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최순실 국정농단 진상규명’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함에 따라 이달 인사엔 무리가 있다는 판단이다.
또 삼성그룹이 특별검찰수사 대상으로 지목되고 있어 향후 특검 일정에 따라 2017년 3월 이후 정기임원 인사가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삼성에 정통한 업계의 한 관계자는 “최근 불거진 최순실 사건으로 그룹 차원에서 향후 특검 등을 대비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 같은 결정이 난 것 같다”고 말했다.
금융권은 호재라는 입장이다. 현 정권이 임기 말로 접어들면서 금융권에 막판 보은성 인사가 본격화 될 것이라는 조짐이 있었으나 정부 인사 검증이 사실상 정지되면서 낙하산 인사가 어려워졌다. 금융권 내부에서도 “낙하산은 피할 수 있게 됐다”며 내부 승진자에게 힘이 실리는 분위기다.
금융권 관계자는 “금융기관장과 정부 지분이 있는 금융사 CEO인사는 청와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며 “현직 행장의 연임이 유력하다는 것은 아직까지 윗선에서 마음을 정하지 않았다는 뜻도 된다”고 귀띔했다.
앞서 ‘비선 실세’ 최순실 씨와 딸 정유라 씨를 특혜 지원했다는 의혹을 받는 현명관 한국마사회장은 지난 7일 임기를 마치고 퇴임했다. 현 회장 역시 연임 이야기가 나오는 상황에서 갑자기 퇴임 소식을 알려 그 배경에 의문을 키웠다.
그는 이임사를 통해 “지난밤 이임사를 준비하며 만감이 교차했다”고 운을 떼며 “저는 일에 있어선 앞만 보고 달리는 사람이다. 그 과정에 본의 아니게 마음의 상처를 받은 분들이 많으셨을 거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근래 자신을 둘러싼 각종 의혹에 대해 우회적으로 심경을 밝힌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현 회장은 정 씨의 승마 연수 특혜 지원 의혹 등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별도로 언급하지 않았다.
마사회 측은 후임자로 이양호 전 농진청장을 내정했다고 16일 밝혔다.
오일선 한국2만기업연구소 소장은 “일반 임원과 달리 등기 사내이사는 주주총회에서 선임되는 절차를 거치기 때문에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임기가 공식 만료될 때까지는 해당 직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면서도 “최근에는 남은 임기와 상관없이 사내이사도 수시 교체되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범희 기자 skycros@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