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중문화 속 동성애의 위치가 달라지고 있다. 동성애를 소재로 한 영화가 꾸준히 제작되고 있고 커밍아웃을 도와주는 프로그램까지 방송 중이다.
동성애자 연예인의 활동도 현재 진행형이다. 무엇보다 동성애를 대하는 대중문화의 태도가 진지하고 사실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달라진 대중문화 속 동성애, 동성애자의 모습을 살펴본다.
방송, 커밍아웃을 돕다
국내에서 게이의 일상을 보여주고 커밍아웃(동성애자들이 자신의 성 정체성을 공개하는 것)까지 도와주는 프로그램이 방영된다.
믿기 힘든 일이지만 사실이다. 국내 연예인 중 최초로 커밍아웃한 홍석천과 연기자 정경순이 진행하는 케이블방송 tvN의 <커밍아웃>이 그것.
<커밍아웃>은 제목 그대로 성 정체성을 숨기고 살아왔던 동성애자가 방송에 출연해 커밍아웃하는 프로그램이다. 부제도 ‘게이 프로젝트’다.
참가자는 얼굴을 비롯해 자신의 모든 것을 공개하고 제작진은 토크쇼, 재연, 동행취재 등 다양한 방식으로 참가자의 일상, 동성애자로서 겪은 고통, 커밍아웃 하는 순간 등을 담아낸다.
이를 통해 참가자가 평범한 사람임을 보여주고 동성애자들의 커밍아웃을 독려한다.
지난 14일 첫 방송에서 파티플래너를 꿈꾸는 대학생 이종현씨가 커밍아웃한데 이어 2회에서는 연기자 지망생 김정현(가명)씨가 출연해 화제를 모았다. 두 사람은 “나 자신에게 당당하고 싶어 용기를 내 커밍아웃 하게 됐다”고 밝혔다.
‘동성애 코드’ 작품 증가
<커밍아웃>만이 아니다. 동성애 코드가 삽입된 국내 방송 프로그램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
케이블방송의 경우 지난 해 채널CGV에서 청소년 동성애를 그린 드라마 <램프의 요정>이 방영됐고 tvN 드라마 <하이에나>에선 남자 주인공 중 가장 자상한 지석(신성록)이 게이였다.
2005년, 서울에 사는 싱글남녀들의 일과 사랑을 보여준 케이블채널 온스타일의 <싱글즈 인 서울>에서도 게이 황의건씨가 출연해 뜨거운 인기를 누렸다.
공중파 방송에서도 동성애 코드는 자주 눈에 띈다.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한 MBC 드라마 <커피 프린스>에선 한결(공유)이 남자로 오해한 은찬(박은혜)에게 사랑을 느끼면서 만화 같은 러브스토리가 펼쳐졌다.
‘국민 시트콤’으로 불린 MBC <거침없이 하이킥>의 경우 극중 절친한 친구인 김범과 김혜성 사이에 미묘한 감정이 등장해 팬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SBS 드라마 <불한당>은 만두(홍경인)가 친구 오준(장혁)을 사랑하는 설정으로 감동을 배가시켰고 MBC 인기 사극 <주몽>에선 협보(임대호)와 사용(배수빈)의 러브라인이 보는 재미를 더했다.
영화쪽에선 동성애가 이미 인기소재로 자리매김했다. 이준익 감독의 <왕의 남자>가 1천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고 이송희일 감독의 <후회하지 않아>가 저예산영화 흥행 성적 1위를 기록하며 이런 현상은 더욱 강해졌다.
현재도 김조광수 감독이 연출을 맡은 <소년, 소년을 만나다>, 유하 감독이 연출하고 조인성, 주진모가 주연을 맡은 <쌍화점>, 주지훈의 스크린 데뷔작인 <서양골동양과자점> 등 동성애 코드가 담긴 영화가 잇달아 제작 중이다.
대중문화에 등장하는 동성애와 동성애자의 모습이 한결 사실적이고 진지해졌다는 점에서 더욱 관심을 모은다.
과거엔 방송이나 영화에서 동성애를 흥미 위주로 다루는 경향이 강했다. 영화에선 동성애자가 선정적이거나 코믹한 인물로 묘사되기 일쑤였다.
하지만 요즘은 상황이 달라졌다. 동성애와 동성애자들의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주려 한다.
동성애자의 삶과 사랑이 일반인들과 다를 바 없음을 강조하고 동성애자기에 받는 고통을 위로한다.
홍석천은 “예전에 비하면 대중문화 속 동성애자의 모습이 훨씬 사실적이고 긍정적으로 바뀌었다”며 “동성애에 대한 연예 관계자들의 인식도 많이 달라진 것 같다. 조인성, 주진모 같은 톱스타가 <쌍화점>의 주연을 맡았다는 점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고 전했다.
“게이? 그게 어때서?”
동성애 코드가 대중문화 깊숙이 파고들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은 사람들의 의식변화다.
동성애에 대한 대중의 편견은 지금도 적지 않지만 과거에 비하면 현격히 줄었다.
국내보다 동성애에 개방적인 외국문물을 접하는 사람이 늘고 케이블방송을 통해 일련의 게이 프로그램이 인기를 모으면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게이에 대한 거부감을 지웠다.
게이를 ‘이상한 존재’가 아닌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늘었고 일부 여성들 사이에서는 ‘다정한 게이 친구’에 대한 환상이 생기기도 했다.
실제 SBS라디오 ‘김어준의 뉴스앤조이’가 여론조사기관인 리얼미터에 의뢰해 실시한 ‘동성애를 소재로 한 영화와 드라마를 어떻게 보느냐’는 설
문조사에서 전체 응답자 500명 가운데 20.5%가 ‘호기심에 즐겨보는 편’이라고 답했다.
결국 5명 중 1명이 동성애 코드 작품을 즐겨보고 있는 것. 채널 온미디어와 매거진t가 10대~50대 회원 367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현재 방송에서 사용되는 금기 소재 중 허용할 수 있는 것’이라는 설문조사에서도 ‘연예인 뒷담화(12.3%)’에 이어 ‘동성애’가 2위를 차지했다. 연예인 뒷담화와 차
이는 불과 0.1%.
<커밍아웃> 인터넷 홈페이지에서도 동성애에 대해 한결 부드러워진 대중의 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 비난 못지않게 출연진과 동성애자들을 응원하는 글이 많이 올라있는 것.
프로그램 외주제작사 관계자는 “동성애에 대한 대중들의 의식이 한결 부드러워진 덕에 동성애 코드가 삽입된 작품이 다양하게 만들어지는 것 같다”며 “앞으로는 보다 다양한 장르에서 다양한 형식으로 동성애 코드가 시도되지 않을까 생각한다”는 의견을 나타냈다.
“동성애 코드, 과도기”
여기에 홍석천, 김조광수 감독 등 커밍아웃한 연예 관계자들이 동성애에 대한 왜곡된 시선을 없애기 위해 벌이는 노력도 빛을 발하고 있다.
이들이 사회적 편견과 맞서 싸우며 열심히 활동하는 모습이 동성애자에 대한 부정적 시선을 지우는데 한 몫 한다는 것.
민은경(29ㆍ가명)씨는 “솔직히 게이는 징그럽다고 생각했는데 <후회하지 않아>를 보고 이송희일 감독의 말을 들으면서 생각에 변화가 생겼다”며 “커밍아웃한 후 어려운 시간을 견디고 열심히 사는 홍석천씨에 대해서도 지금은 잘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다”고 전했다.
물론 아쉬운 점도 많다. 변화발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동성애와 동성애자에 대한 왜곡된 시선이 존재하고 이를 선정적으로만 다루는 미디어도 있기 때문이다.
<커밍아웃>도 방송 후 좋은 의도와 달리 게이의 성관계 장면 등이 지나치게 자세히 묘사돼 선정적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세련되고 멋진 게이들만 집중적으로 소개되는 것도 게이에 대한 또 다른 편견을 만들 수 있다는 지적이다.
홍석천의 표현을 빌리자면 “국내 대중문화 속 동성애는 선정성에서 보편화, 사실화로 넘어가는 과도기 단계”다. 때문에 보다 객관적으로 동성애를 다루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높은 편견의 벽을 넘고 금기의 바다를 건너 대중문화 속에 녹아들기 시작한 동성애 코드가 앞으로 얼마나 더 긍정적인 모습으로 발전할 지 지켜볼 일이다.
신혜숙 프리랜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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