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운서 정체성 논란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아나운서, ‘아나테이너’를 향한 회초리가 따갑다. 신뢰도가 곤두박질치고 있다. 정체성을 잃어가는 데다 방송실수까지 잇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아나운서와 엔터테이너 두 역할을 소화하며 논란에 휘말린 아나테이너들. 흔들리는 그들의 위상과 속사정을 들여다봤다.
임경진 아나운서 ‘음주방송’ 물의
MBC 임경진 아나운서가 진행을 맡았던 ‘스포츠뉴스’에서 하차했다. 술을 마시고 방송했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 달 31일 밤 부정확한 발음과 과장된 억양,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하며 스포츠뉴스를 진행했다. 방송 뒤 시청자게시판엔 임 아나운서의 음주방송을 지적하는 글들이 올라왔고 이는 사실로 밝혀졌다.
MBC에 따르면 그날 일본서 열린 여자핸드볼 베이징올림픽 아시아예선경기를 중계한 임 아나운서는 한국에 와서 점심을 먹으며 술을 마셨다. 감기기운에 술이 더해져 상태가 심해졌다지만 비난을 면키 어려운 명백한 실수였다.
결국 그는 1월 31일부로 ‘스포츠뉴스’를 하차했고 사규에 따른 징계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임 아나운서 외에도 최근 MBC에선 아나운서들의 방송실수가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 1월 6일엔 ‘저녁 뉴스’를 진행하던 문지애 아나운서가 마무리 멘트 뒤 웃음을 보여 시청자들로부터 회초리를 맞았다.
이천 냉동 창고 화재소식에 이어 터진 웃음이었다. 문 아나운서 역시 저녁뉴스 프로그램에서 하차했다.
지난 해 9월엔 ‘6시 생방송 화제집중’을 진행하는 최현정 아나운서가 화면전환이 되지 않는 사이 남자아나운서와 웃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혀 구설수에 올랐다.
이어 11월엔 급체한 최 아나운서가 토하고 물 내리는 소리가 그대로 방송돼 논란이 일었다. 최 아나운서는 징계를 받진 않았다.
정체성 잃은 ‘아나테이너’들
임경진, 문지애, 최현정이 MBC ‘아나테이너’란 점에서 이들의 방송실수를 계기로 아나테이너 논란이 또다시 불거지고 있다.
아나운서와 엔터테이너의 합성어인 ‘아나테이너’는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아나운서를 일컫는다.
<상상플러스-올드앤뉴>와 <해피투게더-여걸 파이브>에 출연, 인기를 누린 노현정·강수정 전 KBS 아나운서가 ‘1세대’로 꼽힌다. 김성주 MBC 아나운서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지금은 각 방송사에서 아나테이너를 육성(?)하는 추세다.
아나테이너 등장 초기엔 “인간적인 모습을 보고 아나운서에 대해 호감이 많이 갔다”는 반응이 적지 않았다.
문제는 일부 아나테이너가 연예인으로 비쳐지고 있다는 점이다. 넓은 의미에서의 언론인이란 정체성을 잃어간다는 얘기다.
초기 아나테이너들은 예능프로그램에서도 중계자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패널들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재미를 돋우는 한편 매끄러운 솜씨로 프로그램을
잘 이끌었다.
노현정 KBS 전 아나운서가 <올드앤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것도 아나운서로서의 차분함과 톡톡 튀는 재치를 선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상당수 아나테이너가 연예인과의 차별화에 실패했다. 지적인 아나운서들의 ‘의외의 끼’를 즐기던 대중도 이젠 ‘식상하다’는 반응이다.
아나테이너들의 지나친 연예인화는 ‘본업’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아나운서로서의 능력을 검증받기도 전에 연예인 이미지가 굳어져 뉴스진행에 적합하지 않다는 인상을 준다는 것. 뉴스진행 중 같은 실수를 되풀이해도
아나운서보다 아나테이너가 더 큰 매를 맞는 것도 본업도 제대로 못하면서 예능프로에만 치중한다는 오해를 샀기 때문이다.
‘웃어서’ 저녁뉴스에서 하차한 문 아나운서의 경우 지나친 연예인 이미지로 필요이상의 중징계를 받은 것 아니냐는 말이 있었다. 아나운서로서의 정체성
이 흔들리는 상태에서 일어난 방송실수라 비난도, 징계도 수위가 높았다는 것.
시청자 배현경(여·30)씨는 “편견인 건 아는데 아나테이너가 뉴스를 진행하면 왠지 가벼워보인다”면서 “예능프로에서 본 이미지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고 전했다.
방송사가 ‘아나테이너 논란’ 불러
한편 아나테이너 논란 원인이 방송국에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아나테이너가 인기를 얻자 시청률 선점을 위해 방송사들이 젊고 매력적인 아나운서들을 예능프로에 무분별하게 내세워 정체성 혼란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한 방송 관계자는 “아나운서도 직장인 아닌가. 방송사가 시켜서 예능프로에 출연하는 거고 촬영에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라 생각한다”면서 “그런 점에서 아나테이너 논란의 근본원인은 방송사에 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나운서가 뉴스 프로그램만 맡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 노래 잘 부르고, 춤 잘 추는 게 문제될 이유는 더욱 없다. 하지만 예능프로그램에서 끼를 발산하기 전에 본업을 충실히 하고 능력을 인정받는 게 우선이다.
‘뉴스보도, 사회, 실황중계의 방송을 맡아 하는 사람, 또는 그런 직책’이란 아나운서의 사전적 의미를 방송국과 아나테이너들은 잊지 말아야 한다.
신혜숙 프리랜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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