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 낳으려면 줄을 서시오’ 여전한 ‘임신순번제’
‘애 낳으려면 줄을 서시오’ 여전한 ‘임신순번제’
  • 권녕찬 기자
  • 입력 2016-11-25 20:51
  • 승인 2016.11.25 20:51
  • 호수 1178
  • 25면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당연한 권리가 ‘죄’ 되는 씁쓸한 현실
<뉴시스>

여의사, 10명 중 7명 자유로이 임신 못 해

폭언·폭행 ‘태움’ 문화 아직 만연

[일요서울 | 권녕찬 기자] ‘이번엔 A. 다음 달엔 B.’ 임신을 정해진 순서대로 해야만 하는 ‘임신순번제’가 다름 아닌 병원에 만연해 있음이 드러났다. 국가인권위원회의 병원 종사자 인권 실태조사 결과 최근 문제가 된 임신순번제가 사실로 확인된 것이다. 병원에서 일하는 여 의사와 간호사들은 신체적 자유조차 ‘감금’당하는 현실에 놓여 있다. 또 강한 긴장감이 형성되는 업무 환경에서 폭언·폭행이 일어나는 ‘태움’ 문화는 여전했다.

“네가 지금 여기서 애를 가지면 너 근무 안 나오니까 네가 애를 지우든지 나가든지 둘 중 하나 해라. 그래서 결국에는 낙태했다는 사람이 있어요.” (간호사 A)

“임신한 뒤 입덧이 심해서 물도 잘 못 마시고 입원까지 했는데 주임간호사 전화 와서는 ‘(병원에서) 너 때문에 나 임신 미루랬다’며 XX한 게 생각나네요.” (간호사 B)

남의 신체를 돌보면서도 정작 자신의 신체를 자유로이 다루지 못하는 이곳은 다름 아닌 병원이다. 인권위가 지난해 실시하고 지난 23일 발표한 보건의료 여성종사자의 인권 실태는 예상보다 심각했다. 여성간호사와 간호조무사 10명 중 4명과 여성전공의 10명 중 7명은 본인이 원하는 시기에 마음대로 임신을 결정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임신해도 문제

자기 차례가 돼서 아이를 가져도 문제다. 있어도 쓰기 힘든 육아휴직 때문이다. 보건의료 노조의 ‘2016 보건의료노동자 실태조사’에 따르면 10명 중 6명은 육아휴직을 쓰지도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육아휴직을 꺼리는 이유는 ‘동료에 불편을 끼칠 수 없어서’, ‘분위기상 신청할 수가 없어서’ 등이 절반을 차지해 구조적인 문제가 있음을 보여준다.

부산의 한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는 김모(30) 간호사는 “3교대 방식으로 근무하는 응급실에서 예상치 않게 간호사 한명이 근무조에서 빠지면 다른 이들이 힘들어진다”며 “이 때문에 결혼과 임신 계획을 병원에 미리 알리고 임신 순서를 배정받는다”고 말했다. 이어 “정해진 순서를 따르지 않고 임신을 하거나 육아휴직을 신청하려면 그에 따른 인사상 불이익 등을 감수해야 한다”고 밝혔다.

공공병원은 민간병원에 비해 그나마 사정이 나았다. 공공병원의 경우 총 응답자(2,160명) 중 46.2%, 민간병원(4,307명)은 38.8%가 육아휴직 혜택을 받았다. 하지만 병원 특성과 관계없이 육아휴직 사용이 절반에도 못 미치고 있었다. 특히 민간병원은 사립대병원, 민간중소병원 할 것 없이 육아 휴직에 인색한 것으로 조사됐다.

상황이 이렇지만 임신 중인 여성 의료종사자들은 시간 외 근로와 야간근무에 노출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행 근로기준법은 임신 중인 여성근로자에게 시간외 근로와 야간근로를 제한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다.

인권위 조사에 따르면 임신 중 시간외 근로와 야간근로 경험에 대해 간호직의 61.7%, 전공의 77.4%는 ‘임신 중 시간외 근로를 한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또 간호직 38.4%와 전공의 76.4%가 임신 중 야간근무를 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야간근로에 ‘자발성이 없었다’고 답변했다.

인권실태 조사에 참여했던 이상윤 녹색병원 과장은 “모성보호와 관련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사치로 여겨지거나,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은 이기적이라고 비난받는 가운데 누가 시키지 않아도 간호사들은 임신, 출산에 친화적이지 않은 문화를 갖게 됐다”고 지적했다.

직업 특성상 긴장감은 필요

직장 내 언어폭력·폭행 등은 병원 여성노동자들을 힘겹게 하는 또 다른 요소다. 여타 다른 직장보다 위급 상황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병원에서는 그 정도가 훨씬 심하다. 이른바 ‘태움 문화’라는 것인데, 재가 될 때까지 태운다는 의미다. 선배 간호사가 후배에게 폭언·폭행하는 것으로, 간호사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오랜 악습이다. 2006년 전남대병원에서 병원 간호사 두 명이 의사와 수간호사로부터 ‘태움’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있었다.

이번 인권위 조사에서도 간호직은 44.8%, 전공의 55.2%로 절반 가량이 언어폭력을 당한 것으로 파악됐다. 신체폭력을 겪은 간호직도 11.7%, 전공의는 14.5% 수준으로 집계됐다.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아직 ‘태움’이 있다고 간호사들은 입을 모은다. 간호사 커뮤니티에서 대학병원에서 일한다고 밝힌 한 간호사는 “불과 몇 개월 전 수술실 의사가 간호사를 폭행하는 사건이 있었다”며 “또 한 사람을 앉혀놓고 빙 둘러싸 폭언하는 경우도 봤고, 인계할 때 몇 명이 달려들어 혼내며 등을 때리고 의자를 발로 차는 경우가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모든 병원이 이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런 ‘태움 문화’는 심각하다고 본다”고 했다.

하지만 선배 간호사들도 할 말은 있다. 간호사의 실수는 의료사고로 이어지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긴장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대학병원 5년차 간호사라고 밝힌 한 누리꾼은 “의료계 특성상 일을 대충하면 안 되고, 분위기가 느슨해지면 업무도 느슨해지기 마련”이라며 “긴장되는 분위기라면 좀 더 집중력을 가진 상태로 환자를 보며 꼼꼼하게 일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어 “다만 필요 이상의 폭언과 엄한 분위기까지 조성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고 밝혔다.

이 같은 일이 발생하는 근본 원인은 ‘인력 부족’에 있다. 극심한 업무 스트레스, 열악한 근무시간, 낮은 간호수가 비중 등으로 간호사들이 병원을 이탈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간호사 수는 1000명 당 4.7명으로, OECD 국가 평균의 절반 수준이다. 2016 보건의료노동자 실태조사에서도 응답자들의 82.6%가 부서 인력이 부족하다고 답했다.

우석균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장은 한 언론에서 “의료서비스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사람이 수행하는 것인데 의료 인력의 노동환경이 열악할수록 환자 역시 영향을 받는다”며 “간호사 등 의료종사자의 처우와 근무환경을 근본적으로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권녕찬 기자 kwoness7738@ilyoseoul.co.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김민 2016-11-29 20:15:43 115.143.254.58
태움문화나 임신순번제라는 문제점이 모든 병원.병동에 존재하는 문제점은 아닙니다. 이러한 문제점의 결과가 높은 이직률과 인력부족현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요즘은 많은 곳에서 이러한 점들을 개선하고자 노력하고 있구요. 물론 병동내 분위기와 대인관계등으로 인해서 일어나기도 하는 문제이지만 기사에서 언급한것과같이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악습이 반복되고 있지 않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간호사의 근무환경이 열악하다는 것은 실습학생인 저도 느낄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근무환경.처우개선 등 근본적문제에 관심을 가져보는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