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요서울|장휘경 기자] 13년 전인 2003년 2월 경북 의성의 한적한 시골길에서 50대 남성이 차에 치여 숨진 채 발견됐다. 뺑소니 범인은 잡히지 않았고 결국 공소시효가 끝나 미제(未濟) 사건이 되는 듯했다. 하지만 경찰은 지난 5월 이 모든 일이 남편을 죽이려고 아내가 치밀하게 계획한 살인 사건임을 밝혀냈다. 남편을 청부 살해한 뒤 교통사고로 위장한 아내와 공범들이 5억 원대의 보험금을 챙기고도 아무 일 없었던 듯 뻔뻔스럽게 살아갔던 이 사건의 추악한 뒷얘기를 파헤쳐본다.
작년 11월 금융감독원에 “13년 전 의성 교통사고는 가족들이 보험금을 노리고 한 짓”이라는 제보가 접수됐다. 공범 중 한 사람이 술자리에서 한 말을 어렴풋이 기억한 누군가가 보험 사기라고 제보한 것이다.
이에 금감원은 경찰에 신고했고 경북경찰청 장기미제사건팀 형사들은 13년 동안 범인의 흔적조차 더듬지 못했던 50대 남성의 죽음에 주목했다. 평생 사과농장을 하며 소박하게 살다 영문도 모른 채 눈을 감은 ‘의성 남편 청부살인 사건’의 해결은 그렇게 시작됐다.
영락없는 뺑소니 사고 현장
일요일이던 지난 2003년 2월 23일 오전 8시쯤 경북 의성군 다인면 마을 진입로 한가운데서 김모(당시 54세)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 당시 경찰은 이 사건을 전형적인 뺑소니 사고로 보고 차량 수배에 나섰다.
하지만 사건은 미궁에 빠졌다. 한적한 시골길이라 CCTV나 목격자가 없었다. 현장에선 차량 파편 하나 발견되지 않았다. 경찰은 김 씨가 그 자리에서 바로 숨진 점과 타이어 흔적을 볼 때 화물차에 치였다고 보고 의성으로 들어오는 화물차 수백 대를 검문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의성 일대에 교통사고 목격자를 찾는 플래카드를 수개월간 붙여뒀지만 아무런 제보도 없었고 사건은 잊혀갔다.
지난 2013년 이 사건은 뺑소니 사망 사고 공소시효인 10년이 지나 종결되고 말았다.
치밀하게 계획된 살인 사건
부인 박 씨(65)는 범행 3년 전부터 자신을 수익자로 지정한 두 개의 보험을 남편 몰래 가입했다. 이후 무속인이었던 여동생(52)에게 “남편이 자신을 자주 때린다”며 살해를 부탁했다. 이에 여동생은 내연남인 최 씨(57)와 2년 동안 계룡산 등 전국의 무속인 마을을 돌며 김 씨의 죽음을 비는 기도를 올렸지만 죽지 않자 뺑소니 사고로 꾸며 김 씨를 살해하기로 마음먹었다. 준비 기간만 1년이 걸릴 정도로 범행은 치밀하게 계획됐다. 최 씨는 중학교 동창 이모(56)씨를 끌어들여 김 씨의 집과 동네 주변도 여러 차례 사전 답사했다. 아내 박 씨는 남편이 술을 마시면 마을 입구에서 내려 걸어온다는 사실을 일러줬다.
마침내 범행 한 달 전인 2003년 1월 최 씨의 지시를 받은 이 씨는 남편 김 씨와 안면을 트기 위해 당시 김 씨가 운영하던 과수원에 찾아가 ‘사과농장을 하려는데 가지치기 작업을 가르쳐 달라’며 접근했다. 사람을 좋아했던 김 씨는 흔쾌히 이 씨에게 3, 4차례 일을 가르쳐 줬다. 친분을 쌓자 일당은 한 달 뒤인 2월 22일을 디데이(D-day)로 정했다. 농한기인 데다 한가한 토요일 저녁이어서 술을 즐기는 김 씨를 불러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이 씨는 마을에서 18㎞ 떨어진 식당으로 김 씨를 유인해 만취하게 한 뒤 1톤 트럭에 태워 다시 마을 입구에 내려주고 떠나는 척했다. 이 때가 오전 1시40분. 인기척이 없다는 점을 알아챈 이 씨는 다시 돌아와 비틀거리며 집으로 향하던 김 씨를 그대로 들이받고 현장을 떠났다.
김 씨는 6시간이 지난 오전 8시쯤 그 자리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김 씨가 숨진 몇 개월 뒤 박 씨에게 보험금 5억여 원이 지급됐다. 박 씨는 딸 명의 계좌에 이 돈을 넣어놓고 10개월에 걸쳐 야금야금 인출해 살인에 가담한 자들에게 현금으로 ‘몫’을 배분해줬다. 경찰은 단순 뺑소니 사망 사고로 보고 아내를 더 이상 수사하지 않았다.
박 씨 일당은 완전범죄를 자신했다. 부인 박 씨는 술에 취하면 마을 입구부터 집까지 걸어오는 남편의 미세한 행동 패턴까지 범행에 활용했다. 보험설계사를 겸했던 여동생 박 씨는 휴일ㆍ야간에 발생하는 뺑소니 무보험 사망사고의 경우 보험금이 더 지급된다는 사실을 알고 범행 날짜를 특정했다. 공범 이 씨도 경찰의 불심검문을 우려해 미리 점찍어 둔 인근 저수지에서 새벽까지 날을 새운 뒤 해 뜰 무렵에야 이 곳을 벗어났다.
평범한 뺑소니 사고로 끝날 듯 했던 청부살인은 10여년 뒤 엉뚱한 데서 실마리가 풀렸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 공범 중 한 명이 우연히 술자리에서 지인에게 범행을 털어 놓으면서 제보로 이어졌고 수사는 급물살을 탔다.
여동생 조사로 실마리 풀려
금감원의 신고를 받은 수사팀은 이 사건을 완전히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기로 했다. ‘뺑소니로 위장한 살인 사건일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세웠다. 그러나 수사는 6개월이 지나도록 진척되지 않았다.
보험금을 노렸다고 의심하기에는 불충분한 점이 많았다. 박 씨가 김 씨 앞으로 보험 두 개를 가입한 것은 사망 사고 3년 전이었다. 게다가 보험금 수령자인 박 씨는 사건 당시 친척 모임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돼 알리바이가 확실했다. 박 씨 여동생이 보험설계사로 일한 경험이 있어 의심해 봤지만 그는 운전면허조차 갖고 있지 않았다.
수사가 지지부진하자 경찰 내부에서 “여러 정황상 제보가 잘못된 것 같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가족들에 대한 직접 심문을 하지 않았던 수사팀은 마지막으로 박 씨 여동생에게 ‘한 수’를 던져보기로 했다.
경찰이 여동생에게 “뺑소니 사건과 관련해 물어볼 것이 있다”며 경찰서로 나와 달라고 하자 마음 놓고 살던 네 사람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조사를 받은 여동생은 경찰서를 나서자마자 헤어진 내연남 최 씨에게 연락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경찰은 여동생과 계좌 거래 내역이 있던 최 씨가 공범일 수 있다고 추리했다. 경찰은 처음에는 최 씨가 직접 트럭을 운전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궁지에 몰린 최 씨는 경찰에서 “김 씨를 죽인 트럭은 동창인 이 씨가 운전했다”고 자백했다. 경찰이 생각지도 못했던 살인범 이 씨의 존재가 수면 위로 드러난 순간이었다. 경찰은 이 씨를 추궁해 사건 직전 칠곡에 있는 횟집에서 술을 마신 사실도 알아냈다.
공범 세 명의 말들을 맞추자 마치 퍼즐 조각처럼 사건이 완성됐고, 이 모든 일의 발단은 김 씨 아내임이 드러났다. 공범 중 가장 마지막에 소환된 아내는 자신의 죄를 순순히 인정했다.
미제사건전담팀 강병구 팀장은 “뺑소니 사건인 줄 알고 특허법으로 처리해 공소시효가 끝나 미제 사건이 됐었는데, 지난 5월 살인 사건임을 밝혀내 파렴치한 범인들을 처벌할 수 있었다”며 “살인죄는 2015년 7월 24일에 공소시효가 폐지됐다”고 말했다.
장휘경 기자 hwikj@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