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적 편견·손가락질 만연…‘나 몰라라’ 남성 부지기수
임신지속 여부 결정하는 기준 시점 필요… 양육 환경 개선돼야
[일요서울 | 권녕찬 기자] 낙태를 둘러싼 사회적 논쟁이 뜨겁다. 지난 9월 보건복지부가 ‘의료법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예고한 것이 단초가 됐다. 낙태 수술을 시행하는 의사에 대해 의료자격을 최대 1년까지 정지해 처벌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여성단체 등은 강력하게 반발했고, 이후 정부는 재검토하겠다며 한 발 물러섰다. 하지만 이들은 ‘낙태죄 폐지’까지 주장하며 서울, 부산, 광주 등 전국에서 폐지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정부가 낙태를 둘러싼 여러 사회적 환경을 개선하지 않으면서 처벌만 강조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또 임신·출산에 대한 본인의 자유로운 신체결정권을 요구하는 상황이다. [일요서울]은 9일 박영미 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 대표와의 전화 인터뷰를 통해 여성 인권과 낙태 문제를 들여다봤다.
- 낙태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번지는 모양새다. 무엇이 문제인가.
▲ 현재 정부가 보여주는 태도는 ‘생기면 무조건 낳아라’는 건데 사실 이것은 말이 안 된다. 원하지 않아도 임신할 수 있는 게 현실이다. 여성은 회임부터 출산, 육아까지 본인과 아이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게 되는데 이는 여성의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다. 이를 심사숙고해 출산할지 말지를 스스로 정하는 ‘자기신체결정권’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모자보건법상 근친상간·강간 등 일부 사항을 제외하고 낙태는 모두 불법이다. 하지만 10~12주 정도까지는 임신지속여부를 결정할 수 있도록 일정 기한을 정할 필요가 있다. 일부 국가는 임신 후 6개월까지 낙태할 수 있도록 허용하기도 한다.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태아의 생명권과 사이에 기준이 필요한 시점이다.
- 현재 낙태가 행해지는 비율은 어느 정도로 봐야 하나.
▲ 2005년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그 해에 34만 명, 2011년에는 16만 명 정도의 아이가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다. 또 국내 미혼 임산부의 96%가 한 달 안에 낙태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 낙태 행위는 비도덕적이란 비판과 함께 생명 경시 현상을 불러온다는 주장이 있다. 이에 대한 견해는.
▲ 일리 있는 지적이다. 하지만 그 전에 아기를 낳아도 걱정 없는 사회적 환경을 만들어주는 게 먼저다. 각종 제도적 편의를 아낌없이 제공하고, 낙태했거나 미혼모라고 해서 사회적 편견과 차별을 하지 않아야 한다. 임신했다고 해서 직장에서 불이익을 받지 않아야 하고, 더 좋은 주거환경을 얻을 수 있는 자격을 주고, 산모 건강을 보살펴주는 충분한 의료적 지원이 필요하다. 각종 제도적 지원을 충분히 하지 않으면서 ‘임신하면 처벌한다. 무조건 낳아라’ 식의 정책은 말이 안 된다.
결혼한 사람만 성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지 않나. 미혼인 사람도 임신할 가능성이 충분한데 아기를 낳았다고 해서 편견을 받고 손가락질 당하는 경우는 없어야 한다. 또 낙태하면 비용도 비용이지만 여성의 몸도 많이 상한다. 그러나 상황이 이렇기 때문에 여성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낙태를 하게 된다.

- 여성들의 주장 중에는 ‘육아와 집안일을 나 몰라라 하는 남성들’, ‘피임 안 하고 성관계를 맺은 남자들’과 같은 ‘남성책임론’이 있다. 낙태 문제에 있어 지금까지 남성들이 보여준 태도와 역할을 어떻게 보나.
▲ 잘 알다시피 아기는 남녀가 함께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신체적 부담은 오롯이 여성이 진다. 같이 책임을 진다는 책임 의식이 절실하다. 여기 한 커플이 있다. 사랑했지만 결국 헤어졌다. 하지만 이후 임신 사실을 알게 됐다. 원하지 않았던 임신이지만 사랑하는 관계에서 생겨 아기를 낳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원하지 않은 임신이라고 다 아기를 지우려고 하지는 않는다. 이후 임신 사실을 남자에게 알리면 상당수 남자들이 등을 돌린다. 낙태를 하든 입양을 시키든 너 알아서 하라는 남자들이 부지기수다.
심지어는 관계 전 아기 생길 것을 걱정하는 여성에게 ‘생기면 낳아 기르자’고 말한 남성이 막상 닥치면 뒤통수 치는 경우도 많다. 경험에 비춰볼 때 남성의 최소 절반 이상이 이렇다. 출산 계획이 없다면 안 생기도록 함께 노력해야 하고 그게 피임이다. 하지만 피임을 소홀히 해서 출산했는데 함께 키울 수 없다면 최소한 양육비 지원 등의 책임은 다해야 한다.
- 낙태 문제를 둘러싼 정부 당국의 태도는 어떻게 진단하나.
▲ 낙태는 과거에도 불법이었지만 2010년 무렵까지는 공공연하게 이뤄졌다. 출산 억제의 일환으로 정부가 이를 부추긴 측면도 있다. 하지만 지금 출산율이 저조하다는 이유로 아기 생기면 무조건 다 낳으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낙태를 전면 금지해 불법으로 규정하지만 사후피임약은 파는 현실이다. 임신하지 않을 권리를 약으로는 규정하지만 법으로는 금지하는 것이다. 법과 현실이 배치되는 상황이다.
정부 정책을 전부 다 비판하는 건 아니다. 그동안 다양한 정책과 좋은 법안이 만들어졌다. 다만 이를 더 적극적으로 알릴 필요가 있다. 특히 양육비 부분은 그렇다.
양육비는 부모라면 반드시 부담해야 할 법적 의무다. 남녀 구분은 없다. 자기가 키우지 않으면 무조건 양육비를 줘야 한다. 아이가 만 18세 될 때까지 양육비를 지원해야 할 책임을 진다. 대학 가면 대학까지 지원해야 한다. 만약 뒤늦게 알게 돼 10년 후에 찾아가도 받을 수 있다. 또 지급 의무자가 정당한 사유 없이 2회 이상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으면 지급 의무자가 소속된 직장에게 의무자의 급여에서 정기적으로 양육비를 내게 하도록 가정법원에 신청할 수도 있다.

- 선진국들은 낙태 문제를 어떻게 대하고 있나.
▲ 독일의 경우 임신 12주 내 낙태를 허용한다. 게다가 낙태도 돈벌이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임신을 확인한 의사와 낙태 수술을 시행한 의사를 달리한다. 학교 성교육에서 가족 교육을 중시한다. 사랑하는 남녀 간의 성행위는 자연스러운 거지만, 그로 인해 본인이 부모가 될 수 있음을 인식시키고 책임감을 부여하는 교육을 하는 것이다. 미혼모에 대한 편견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스웨덴, 핀란드, 덴마크 등은 아예 없다. 특히 성인 미혼모에 대한 편견은 거의 없고, 10대 미혼모에 대해서는 안타까움을 느끼는 정도다.
- 마지막으로 낙태 문제 해결을 위해 개선해야 할 점을 꼽아 달라.
▲ 무엇보다 정부 당국의 정책이 필수적이다. 교육도 중요하지만, 교육은 말이고 정책을 통해 실제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출산휴가와 더불어 육아휴직 적극 장려하고 그 휴가를 받았다고 해서 해고의 위험이 없어야 한다. 출산하면 쉬어야 하는데 이 때 필요한 생계비 등 각종 수당도 제공해야 한다. 산전 관리부터 산후 관리까지 충분한 의료 지원, 공공임대주택과 같은 거주지 지원도 필수다.
임신·출산·육아가 정말 고된 일이고, 여자에게 많은 희생을 요구한다는 점을 사회 구성원들이 알아줬으면 좋겠다. ‘임신-출산-육아-보육-교육’에 이르기까지 아이 키우기에 대한 걱정이 없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아직 미흡한 실정이다. 아기를 기쁘게만 못 키우는 여러 환경이 너무 많은 것이다. ‘아기를 낳아 키워도 별 걱정 없겠다, 출산 후 삶의 질이 높아졌다’ 이러면 낙태할 이유가 전혀 없다. 이런 사회적 여건 속에서 여성에게 낙태를 위한 제한적인 결정권을 주는 게 필요하다.
권녕찬 기자 kwoness7738@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