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이른바 ‘최순실 게이트’ 정국의 최대 피해자가 됐다. 최순실 국정개입 파문의 후폭풍 속에서 당청 지지율이 폭락하면서 반기문 총장도 유탄을 맞은 것. 정치권 일각에서는 트럼프 당선에 따른 외교안보 분야의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반 총장이 반사이익을 누릴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지만 최순실 파문의 국내 여파는 너무 크다는 분석이다. 반 총장이 대선 출마가 기로에 서게 됐다.

- 최순실 파문 당청 지지율 하락에 차기 지지율 동반 하락
- 與분열 시 대선기반 붕괴… 대권 도전 궤도수정 불가피
차기 지지율 1위라는 성적표는 이미 옛말이다. 20대 총선 직후 새누리당의 부활을 이끌 구원투수로 화려하게 등판했던 상황과 비교해보면 180도 달라졌다. 우선 최순실 게이트 파문이 예측불허다.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율은 5%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통치불능의 식물대통령 수준이다. 박 대통령의 탈당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공개적으로 터져 나올 정도다. 중장기적으로 새누리당의 분당 역시 필연적인 수순이다.
더구나 지난 12일 서울 도심에서는 성난 촛불민심이 물결쳤다. 과거 노무현 대통령 탄핵반대와 이명박 정부 첫해 광우병 촛불시위 이후 사상 최대 인파였다. 박근혜 대통령이 촛불여론에 밀려서 하야를 선택하며 최악의 상황이 펼쳐진다. 반기문 총장의 차기 대선 출마는 원천적으로 봉쇄된다. 헌법에 규정된 60일 이내 차기 대선 규정 때문이다. 여야를 통틀어 가장 유력했던 차기 주자가 중도낙마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대선정국의 반짝스타였던 반 총장이 ‘낙동알 오리알’이 되고 마는 것이다.
‘與 구원투수’ 반기문, 최순실 파문 최대 피해자
반기문 총장은 차기 대권경쟁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분기점은 20대 총선이었다. 그동안 여권 친박계를 중심으로 반 총장의 대권경쟁력을 노크하는 시도가 있었다. 홍문종 의원이 분권형 개헌을 전제로 반기문 대통령·친박계 총리 카드를 꺼내든 게 대표적이다. 20대 총선 이후 반 총장은 대중적인 차기 주자로 인정을 받았다. 총선 결과 여소야대 지형의 3당 체제가 만들어졌기 때문. 당초 야권분열 속에서 새누리당은 압승을 장담했다. 이른바 국회선진화법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180석 대망론이 공공연하게 거론될 정도였다.
결과는 정반대였다. 새누리당은 과반이 붕괴되면서 122석을 얻는 데 그쳤다. 총선 참패에 유력 차기주자들은 엄청난 상처를 입었다. 김무성 전 대표는 공천파동의 후폭풍과 총선 참패로 힘을 잃었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과 김문수 전 경기지사는 총선 패배로 차기 대권에서 멀어졌다. 유승민 전 원내대표가 힘겹게 공천파동을 딛고 여의도 입성에 성공했지만 비슷한 상황이었다. 차세대 리더로 평가받던 남경필 경기지사와 원희룡 제주지사에 대한 조기등판론이 불거진 것도 이러한 배경 때문이다. 여권 내부의 차기주자 진공 상태에서 반기문 총장이 우뚝 섰다. 정치권 일각에서 조심스럽게 제기되던 반기문 대망론이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
더구나 충청 출신의 정진석 의원이 새누리당의 원내사령탑에 선출되고 청와대 비서실장에 이원종 전 충북지사가 발탁되면서 이른바 충청대망론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유엔 사무총장이라는 폭넓은 인지도와 기존 정치권과 거리를 둔 참신한 이미지 탓에 반 총장은 여권의 구원투수로 등극했다. 대선경쟁에 뛰어들자마자 차기 지지율 1위에 올랐다. 기존 유력주자였던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를 가볍게 제쳤다. 이후 거칠 게 없었다. 별다른 정치적 언행이 없지만 차기 지지율 1위 자리는 반 총장의 몫이었다.
이러한 상황이 급변한 것은 10월 국정감사 기간 중 최순실 비선실세 파문과 국정개입 의혹이 급소도로 확산되면서부터다. 20%대 중반을 상회하던 반 총장의 차기 지지율은 야금야금 하락하기 시작했다. 한국갤럽, 리얼미터 등 여론조사기관의 결과를 합하면 반 총장의 차기 지지율은 최고치 대비 평균 10% 가까이 하락했다.
11월11일 공개된 한국갤럽의 11월 2주차 주간집계(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p)에 따르면 반 총장은 한 달 전과 비교했을 때 6%p 하락했다. 특히 여권 텃밭인 대구·경북은 민주당 27% vs 새누리당 26%로 정당 지지율이 급변동하고 있는 상황이다. 아울러 10일 발표된 리얼미터의 11월 2주차 주중집계(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3.1%p)에 따르며, 문재인 20.8% vs 반기문 17.7%로 각각 나타났다. 반 총장의 하락세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반기문 과거 제3후보처럼 조기 낙마할 수도
이후 상황도 낙관적이지 않다. 최순실 게이트 정국의 후푹풍 때문이다. 자고 나면 새로운 의혹들이 쏟아진다. 일일이 기억하기조차 힘들 정도다. 더구나 국무총리 추천을 둘러싼 박근혜 대통령과 야당의 대충돌은 지루한 갈등국면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야권과 시민사회에서 퇴진 압박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여권이 최순실 정국의 탈출구를 찾지 못하면 반 총장의 입지는 더욱 위축된다. 정치권 일각에서 반 총장의 제3지대론이 제기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반 총장의 정치적 메신저로 불리는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당이 완전히 버림받게 생겼는데 이런 당에 반 총장이 오겠느냐. 누가 오겠느냐”면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병든 보수의 메시아’는 절대로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지원 국민의당 비대위원장 역시 “박근혜 대통령은 실패한 대통령이 됐고, 새누리당에 가서 박 대통령의 표로 (차기)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면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주위 분들이 최근 우리 당에도 노크를 한다. (국민의당에 온다면) 공정한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러브콜을 보냈다. 박 비대위원장은 “반 총장도 한때는 새누리당 후보가 되려고 했지만, 이제는 친박(친박근혜) 후보는 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실제 현 상황은 여권 전체가 회복하기 힘든 궤멸적 타격을 입고 있는 상황이다. 과거 차떼기당과 탄핵역풍을 합친 것보다 더 큰 위기상황이라는 분석이 나오기 때문. 여권이 붕괴하면 반 총장이 대선 출마에 나선다 해도 큰 도움을 받을 수 없다. 반 총장의 대권도전을 뒷받침할 조직 기반 자체가 완전히 붕괴되는 것이다.
극단적인 경우 새누리당이 분당 절차를 밝거나 박 대통령이 탈당하는 경우는 반 총장의 주요 지지기반이었던 보수 지지층이 양분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반 총장도 어느 쪽이든 선택의 딜레마에 놓일 수밖에 없다. 자칫하다가는 역대 대선에서 여론의 화려한 주목 속에서 집중 조명을 받다가 뒷심을 발휘하지 못하는 제3후보 낙마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 92년 대선 당시 박찬종, 97년 대선 당시 이인제, 2007년 대선 당시 문국현 등의 길이다.
반 총장의 입장에서는 제3후보도 쉽지 않다. 국민 거의 대부분은 반 총장을 여권 차기주자로 인식하고 있다. 아울러 제3지대에는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가 이미 자리를 잡고 있다. 반 총장이 새누리당을 버리고 제3지대를 선택할 수도 있지만 단기필마로 뛰어들 경우 들러리 역할에 그치고 말 수도 있다. 반 총장의 어려운 처지는 정치적 팬클럽 창립식에서도 잘 드러났다. 반 총장의 지지모임 ‘반딧불이’(회장 김성회)는 10일 서울 중구 한 대형 행사장에서 창립식을 열었지만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최순실 후폭풍에 반기문 대세론도 꺾이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 궐위 시 60일 이내 선거’ 발목 잡나
여야 정치권 안팎에서는 반 총장의 권력의지가 상당하다는 평가를 내놓는다. 이 때문에 반 총장의 향후 행보는 매우 전략적일 것이라고 관측한다. 다만 국내 정치적 환경의 급변사태는 반 총장도 어찌할 수 없는 대목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박 대통령의 하야다. 최고권력자의 하야는 곧바로 국정공백과 헌정중단으로 이어진다.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의 역할을 맡고 헌정공백을 막기 위해 차기 대선이 실시된다. 헌법 제68조 2항은 “대통령이 궐위된 때 또는 대통령 당선자가 사망하거나 판결 기타의 사유로 그 자격을 상실한 때에는 60일 이내에 후임자를 선거한다”고 규정돼있다.
최순실 정국이 예상 외로 장기화되면서 만일 박 대통령이 내년 초 하야를 선택하면 반 총장의 대선 출마는 별다른 문제가 없다. 이르면 3월 이후 대선이 실시되기 때문에 내년 1월 중순 이후 귀국 의사를 밝힌 반 총장이 대권도전에 나설 수 있다. 다만 60일이라는 짧은 대선준비 기간은 치명적 약점이다. 반 총장은 여야의 유력 정치인들에 비해 정책, 전략, 자금, 조직, 홍보 등 모든 분야에서 열세에 놓일 수밖에 없다. 일각에서는 야권후보의 난립과 기존 정치권에 대한 불신 탓에 반 총장이 단기필마로 무소속 후보로 나설 경우 어부지리를 누릴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오지만 장밋빛 전망에 불과하다.
오히려 정반대의 상황이 더 설득력이 있다. 전제는 두 가지다. 최순실 정국 아래서 야권의 전방위 압박에 시달려온 박 대통령이 하야를 결심하는 것이다. 통치불능 수준인 5% 지지율이 회복되지 않고 10% 안팎의 박스권에 고정된다면 야권의 압박은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다. 대통령 하야가 11월 중으로 현실화되면 늦어도 내년 1월 중으로 차기 대선이 치러진다. 이를 역산하면 차기 대선후보 등록은 12월 말까지는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올 연말까지 유엔 사무총장 신분을 유지해야 하는 반 총장으로서는 대선후보 등록 자체가 사실상 무산되는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박 대통령의 하야는 사실상 여권 전체의 궤멸로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반 총장의 대권낙마도 피할 수 없는 수순이라는 전망도 제기된다. 대권은 무소속 후보가 단기필마로 나서서 승리하기에는 불가능한 게임이다. 2012년 대선 당시 무소속 후보로 엄청난 국민적 인기를 누렸던 안철수 후보가 문재인 후보와의 단일화에 실패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한계 때문이다.
반 총장으로서는 정치입문 이후 본인을 뒷받침해줄 막강한 조직이 필수적이다. 이른바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하는데 새누리당이 몰락할 경우 이마저도 쉽지 않다. ‘한 지붕 두 가족’이라는 조롱에 시달렸던 새누리당이 친박, 비박으로 나눠져 딴살림을 차린다면 반 총장으로서도 딜레마다. 친박 정당으로 가기에는 국민적 여론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반면 비박계 정당으로 가기에는 김무성 전 대표, 유승민 전 원내대표 등 이미 비박계 유력주자들이 있다는 점에서 견제가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반 총장으로서는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반 총장은 12월 31일 유엔 사무총장 임기 10년을 마무리한다. 본인이 공언한 대로 내년 1월 중순 이후 귀국할 예정이다. 반 총장의 정치적 선택이 어디를 향할지 여의도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
김희민 언론인 ilyo@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