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훈처 “호국보훈정신 날로 약화…객관적 사실 기반해 실시”
별도 호국교육 필요성 의문…실적 쌓기·보여주기 정책 지적
[일요서울 | 권녕찬 기자] 국가보훈처가 유치원과 초·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애국심을 고취시키고자 ‘호국보훈교육’ 의무화를 추진한다. 나라를 지키다 목숨을 잃은 애국지사들의 숭고한 정신을 학생들에게 별도 수업을 통해 가르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둘러싼 잡음이 나오는 상황이다. 기존의 정규 수업 중에 다룰 수 있는 내용을 굳이 따로 교육할 필요가 있냐는 것이다. 이에 호국보훈교육이 부처의 실적 쌓기용으로 전락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보훈처는 지난달 26일 학생, 공무원, 공공기관 직원 등을 상대로 호국보훈교육 시행을 위한 ‘호국보훈교육진흥법’ 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보훈처는 호국보훈교육을 ‘국가를 위해 희생하거나 공헌한 사람들의 숭고한 정신과 공훈(功勳), 대한민국 역사 및 안보 등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자긍심과 호국보훈 정신을 기르도록 하기 위한 교육’으로 정의했다.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부터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공헌한 이들, 국민의 생명이나 재산을 보호하고 희생된 애국지사 등이 교육 내용에 담길 예정이다. 제정안을 보면, 보훈처장은 유치원 및 초·중·고교 교육과정에 호국보훈교육이 반영될 수 있도록 교육부 장관 또는 시·도 교육감에 요청할 수 있고, 이들은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이를 교육과정에 반영해야 한다.
또 보훈처는 이를 위해 호국보훈교육 담당 전담교사를 학교에 배치할 계획이다. 보훈처 산하에 호국보훈교육원을 설치, 호국보훈 교재를 개발해 이를 수업에 사용할 방침이다. 학생들은 전담교사가 학교에서 교육을 진행하고, 공무원은 각 지역에 설치할 호국보훈교육센터에서 교육을 받도록 한다는 것이 보훈처의 설명이다.
보훈처는 입법 배경에 대해 “국가를 위한 희생과 공헌 위에 오늘날 대한민국의 국격이 높아졌음에도, 국민의 호국보훈정신과 국가에 대한 자긍심은 지속적으로 약화되고 있다”고 밝혔다. 특히 “자라나는 세대의 건전한 국가정체성과 애국심 등을 높일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부족한 실정”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호국보훈에 대한 국민적 인식을 높이고, 국가를 위해 희생한 사람의 숭고한 정신과 공훈을 기억하고 계승해 국가의 발전 및 국민통합에 이바지하기 위해 호국보훈교육을 실시하고 이를 지원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곳곳서 우려 목소리
하지만 호국보훈교육을 두고 우려의 목소리가 제기된다. 이미 사회, 과학 등 정규과정으로 소화할 수 있는데 굳이 별도의 수업을 편성할 필요가 있냐는 것이다. 때문에 부처 실적을 쌓기 위한 형식적인 교육에 그칠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교육시민단체 좋은교사운동 김진우 대표는 “기존에 독도 교육, 안전 교육, 학교 폭력 등 특수 목적을 위한 수업이 많아 일선 학교에서 별도의 추가 교육을 진행하기에 물리적 어려움이 있는 상황”이라며 “호국보훈교육도 유인물 배포, 비디오 시청 등 형식적인 교육으로 진행돼 당국의 단순한 실적 홍보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실제 제정안에는 호국보훈교육을 실시하는 기관의 운영실태 등에 대한 평가를 실시할 수 있도록 돼 있다. 호국보훈교육지원의 효율적 수행을 위해 교육 추진 실적과 교육과정의 체계성, 교육내용의 적절성 등이 평가 기준으로 설정돼 있다.
김 대표는 또 “정상적인 교육과정에서 민주시민교육이나 민주주의 교육을 강화하면 저절로 국가에 대한 자긍심과 애국심이 생긴다”며 “특히 유치원생을 대상으로 하는 호국보훈교육은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했다.
특히 한국사에서 근현대사의 인물에 대한 다양한 시각이 존재하므로 객관성을 담보하기가 어려워 정치적 논란을 빚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호국보훈교육이 본래의 취지와는 달리 안보교육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우려인 것이다.
경기도 소재의 한 고등학교에 근무하는 교사 장모(35·여)씨는 “근현대사 인물에 대해서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편향된 정치적 시선을 여과 없이 받아들이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부산 지역의 한 초등학교 교사 이모(34)씨는 “호국보훈교육 하니 과거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문구가 떠오른다”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유치원생들한테 구시대적 반공 교육을 주입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며 거칠게 말했다.
별도교육 재고해야
보훈처의 호국보훈교육 의무화 추진은 이번 정부 들어 국가주의 이념을 사회에 강요하려는 노력의 연장선이란 지적도 나온다. 실제 정부는 올 1월 공무원 선발 기준으로 민주성과 도덕성 등을 뺀 채 애국심 등을 대표 가치로 내세우는 국가공무원법 개정안을 추진해 ‘사상 검증’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또 추진 초기부터 논란을 일으켰던 ‘국정교과서’도 이와 같은 맥락이라는 주장이다. 국정교과서 논란은 다양한 역사 관점을 배제한 채 정부 주도로 만들어진 하나의 교과서가 교육의 자율성을 해치고, 민주적 절차를 무시한다는 것이었다.
최근에는 ‘비선 실세’ 최순실 씨의 국정 개입 의혹이 커지면서 국정교과서까지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도 나오는 상황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역사교과서와 관련해 “바르게 역사를 배우지 못하면 ‘혼이 비정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과거 발언과 김상률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이 최 씨의 측근인 차은택 씨 외삼촌이라는 점 등으로 최 씨의 개입 정황이 의심된다는 것이 학계와 시민단체의 주장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번 호국보훈교육이 ‘호국 보훈’을 앞세워 정치적으로 편향된 내용을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심어주려는 시도라는 의구심이 제기된다. 김진우 대표는 “역사 국정교과서로 역사 관점의 다양성 축소, 특정 인물 미화 등 드러난 문제점들이 호국보훈교육에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며 “호국보훈교육은 정규 교육 과정에서 충분히 다룰 수 있으므로 이를 위한 별도의 교육은 재고해야 한다고 본다”고 밝혔다.
권녕찬 기자 kwoness7738@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