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요서울 | 조택영 기자] 연극배우 말단으로 시작해 스타로 거듭난 유해진, 라미란. 이제는 이들을 무명배우라 말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아직도 생계곤란, 지병, 사고 등으로 죽음을 맞는 무명배우가 많다. 지난 6월에는 연극배우 김운하 씨가 세상을 떠났다. 김 씨는 거주했던 고시원에서 사망 5일 만에 발견됐으며, 사망에 이르게 한 지병은 생활고와 관계된 것으로 밝혀졌다. 스타가 되기 위한 무명배우들의 끝없는 기다림과 생활고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일요서울]에서는 말단부터 시작해 현재 대학로 ‘연기판’에 종사하고 있는 배우를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연극·뮤지컬 배우 연 평균 소득 980만원
프로필 100장 돌리면 1곳서 연락 온다
배우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학력이나 전공 등의 제약은 없다. 하지만, 배우는 연기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많은 지망생들이 고등학교나 대학에서 연기를 전공하거나, 사설 교육기관의 연기자 양성과정에서 훈련을 받고 배우 일을 시작한다. 하지만 굳이 연기자의 정석을 따진다면 연극배우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배우 직업 소득 가장 낮아
공사장 막노동 기본
고용정보원의 ‘2015년 한국의 직업정보’ 연구조사결과를 살펴보면 연극·뮤지컬배우의 연 평균 소득은 980만원으로 조사결과 배우가 가장 소득이 낮은 직업이다. 또, 초임이 가장 낮은 직업으로도 연극·뮤지컬 배우가 703만 원으로 선두였다. 그 중 공연수입은 350만 원 내외다. 이는 최저임금과 비교해도 현저히 낮은 수치다. 이처럼 연기를 시작해 연극계에 몸담는 배우들의 평균 임금은 생활고에 시달릴 정도로 낮다.
남자 연극인들 사이에선 밤중에 하는 지하철 공사나 공사장 막노동은 기본이다. 공연을 하며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극한의 알바도 서슴지 않는다. 재능은 있지만 생활고 때문에 연극계를 떠나는 배우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투잡’, ‘쓰리잡’은 기본
‘예술인복지법’ 아직 부족
대학로 연극판에서 생활 중인 K(23·남)씨는 소속은 없으나 연극 객원배우로 활동을 하고 있는 배우다. K씨는 고정적인 수입 없이 소위 말하는 ‘백수’ 타이틀을 달고 인지도 있는 배우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K씨는 학생작, 단편·독립영화, 뮤직비디오 등은 물론 연극 생활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본인의 프로필 이력을 위해 역할을 가리지 않고 연기했으며, 성소수자 연기도 해봤다고 전했다. 그 작품에선 남자와의 애정씬을 연기했으며, 프로필 이력을 위해 자존심을 버린 적도 많다고 말했다.
K씨의 소득은 연 평균 300만 원 이하로 부족한 생활비는 ‘투잡’, ‘쓰리잡’을 통해 충당하고 있다. 연습이나 연극을 쉬는 날이면 영화사, 에이전시, 엔터테인먼트 등을 다니며 프로필을 하루 100장 이상 돌린다. 그중 실제로 연락이 오는 건수는 1건 내외다. 하지만 오디션과 온라인지원까지 작은 역할이라도 하기 위해 쉬지 않고 지원한다.
그는 일주일 중 6일 이상을 연습실에 가거나 대학로에서 연극을 진행하기 때문에 고정적인 일이나 아르바이트도 할 수가 없다. 휴일을 예정해 일용직을 찾는 편이며 공사현장, 호텔 뷔페 서빙, 발렛 파킹, 인형탈 홍보 등 일용직 중 임금이 높은 일이면 가리지 않고 하고 있다.
김운하 씨의 죽음 이후 기존 부족했던 ‘예술인복지법’에 대한 개정안이 통과됐는데 과거에 비해 생활이 좀 나아지지 않았냐는 질문에 “아직까지도 예술인복지법 실적이 현실적이지 않아, 나를 포함한 주위에 있는 동료들도 창작자금을 받아본 적이 없다”며, “연극인의 경우 연극준비 기간, 연기연습 기간을 따지면 실적기간에 비해 오래 걸려서 기간 내에 실제로 실적을 채우기엔 힘든 수치다”라고 전했다.
K씨는 “사람들의 가치관 차이도 있겠지만 단순히 돈을 벌고 뜨기 위해 연기를 하는 것은 무모한 선택이다”며, “돈보다는 꿈을 위해 참으며 달려가고 있으나, 현재 예술인들이 겪는 상황은 생활적으로 힘들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라미란, 무명시절 빈털터리
유해진, 무명생활 영화로
무명배우에서 유명배우로 성공한 실제 연예인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무명생활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다. 1995년부터 연극무대에 오른 배우 라미란 씨는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과거, 연봉이 20만원이라 회의를 느끼고 나간 친구도 있다”며, “신랑도 이것저것 하며 실패하다 보니 전기세 낼 돈도 없었다. 아이를 낳을 때에 병원비가 없어서 시아버님이 내주셨다. 완전 빈털터리였다”고 밝힌 적이 있다.
또, 현재 흥행중인 코미디 영화 ‘럭키’의 주인공 유해진씨는 주인공 형욱역을 맡아 무명배우의 설움을 연기로써 표현했다. 극 중 형욱은 비좁은 옥탑방과 가진 재산이라고는 2천 원밖에 없으며, 빚 독촉에 시달리는 전형적인 무명배우다. 이러한 현실에 진절머리가 나 자살시도까지 하게 된다. 유해진 씨는 복수 언론사 인터뷰 중 “주인공 형욱의 암울한 현실을 연기하기 위해 자신의 무명시절 경험을 참고했다”고 말했다. 스타가 된 대부분의 배우들도 말도 안 되는 임금을 받으며, 무명배우 생활을 거친 것이 현실이다.
K씨는 성공한 배우들에 대해 “노력과 열정으로 버티면서 자신의 위치를 지켰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본다. 복지혜택과 고정수입을 바라보고, 불만만 토로했다면 실력 향상도 되지 않을뿐더러 그만한 위치에도 올라가기 힘들었을 것이다”며, “무명에서 유명배우로 성공한 선배들을 볼 때 희망이 생긴다. 나 또한 악조건 속에서도 연기를 지속할 것이다”고 말했다.
어려운 생활 외에도
항상 사건·사고 노출
이 밖에 무명배우들은 항상 사건·사고에 노출 돼 있다. 연기 지도를 핑계로 성추행 사고가 발생하기도 한다. 지난해에는 20대 연극배우 정모 씨가 배우지망생인 여고생을 성추행해 실형이 선고됐다. 정 씨는 실기지도를 한다며 배우 지망생 B양을 자신의 허벅지 위에 앉힌 뒤 입을 맞추거나 옷 안에 손을 넣어 가슴 등을 억지로 만져 재판에 넘겨졌다. 또 이와 같은 방식으로 약 한 달여에 걸쳐 19차례나 추행을 일삼았다.
이처럼 TV나 스크린에서 빛나는 배우들의 뒤편에는 항상 그늘이 존재한다. K씨는 “연기를 빙자한 성추행은 배우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행동이다. 허나 현재도 연기라는 명목 하에 수치심을 느낄 정도의 터치가 존재한다”며 성적수치심을 본인만이 안고 가야 하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전했다.
조택영 기자 cty@ilyoseoul.co.kr
좋은 기사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