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요서울 ㅣ 이범희 기자] 최순실 파문과 관련해 일부 재벌 기업은 ‘자신들이 피해자다’고 강조한다. 청와대와 전경련 입김에 어쩔 수 없이 기금을 조성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 2일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이 검찰에 소환되면서 은밀하게 감춰져 있던 ‘현 정권-최순실과 재벌 및 금융기관 간의 검은 유착’가능성이 수면위로 떠오르고 있다.
아울러 보건의료연합과 참여연대 등 일부 시민단체들은 “재벌들이 최순실의 피해자라고요. 당신들은 공범자들입니다”는 요지의 발언을 연일 쏟아내면서 관련 의혹들도 한 꺼풀씩 벗겨지고 있다. 일요서울은 ‘사이다발언’으로 일반인들에게 공감을 얻고 있던 ‘재벌의 피해자 코스프레 현황’을 알아본다.
보건의료·참여연대 ‘뇌물을 통한 정경·정금유착’ 주장
“피해자 코스프레 기업, 본질 파악 후 철저히 수사해야”
먼저 포문을 연 건 우석균 보건의료연합 정책위원장이다. 그는 지난달 29일 서울 중구 청계광장 집회에 참석해 “현 정권이 재벌과 함께 공공서비스 민영화와 의료 민영화를 계속 추진하고 있다는 것을 고발하려고 이 자리에 섰다”며 “재벌들은 지금 마치 현 정권에 ‘삥을 뜯긴’(돈을 빼앗겼다는 의미의 속어) 척하고 있다.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 하지만 재벌들은 박근혜 정권의 공범이다”고 외쳤다.
지난 3일 열린 기자회견에서도 우 위원장이 속한 보건의료연합은 “(재벌이)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을 받는 대가로 박근혜-최순실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이 걸린 의료 분야를 재벌들에게 넘기려 했다. 바로 이것이 의료영리화 정책이었고, 이들은 공범이다”고 재차 강조했다.
그 근거로 미르재단, K스포츠재단 등이 2015년 말부터 2016년 초까지 800억 원에 가까운 돈을 집중적으로 거뒀는데 이 과정이 석연치 않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2005년 12월 말 현대차 400억 원을 시작으로 삼성화재 34억 원, LG 30억 원, 마지막 1월 12일 SK가 25억 원을 냈는데 바로 다음 날인 1월 13일 박근혜 대통령이 대국민담화문을 발표했다. 박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민생을 살리기 위해 노동개혁을 해야 하고 의료 개혁을 해야 하고 공공서비스 민영화를 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이 일련의 과정이 우연의 일치가 아닌 재계와 청와대의 사전 교섭 시나리오에 따른 계획된 행동이었다는 것이다.
같은 날 참여연대도 논평을 통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 재벌 대기업은 결코 피해자가 아니다. 각종 친재벌적인 사회경제정책과 재벌 총수에 대한 사면, 무리한 경영권 승계과정에 대한 묵인, 세무조사 무마 등 잠재적으로 아쉬운 부분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며 “재벌대기업과 금융기관들이 단순히 정치적 압력에 굴복했다기보다 각종 특혜의 유지·확대를 위해 자발적으로 정권에 협력했을 개연성이 농후하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두 단체가 유사한 지적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또 재벌기업들이 피해자라고 여전히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연이라 하기엔 너무 공교로운 일들이 굴비 엮이듯 이어지면서 관련 의혹들도 커지고 있다. 기부금을 낸 기업들 뒤에 정부와 박근혜-최순실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다.
우선 삼성은 최순실 씨와의 직거래가 없다던 당초 주장과는 달리 지난해 9월 이후 35억 원을 여러 개의 금융기관의 계좌로 쪼개어 최순실 씨 모녀가 소유한 코레스포츠 측에 전달했다.
최순실 씨 측 독일 법인에도 매달 80만 유로를 정기적으로 송금한 것으로 알려진다. 게다가 검찰 수사 과정에서 삼성이 정유라 씨에게 말 구입비 30억 원을 직접 건넸다는 정황도 포착됐다.
이에 삼성이 최순실 씨에게 거액의 자금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한 진정한 이유가 무엇인지 의혹이 없을 수 없다.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의 과정은 최고위층 권력의 비호나 묵인 없이 진행되기 어려운 상황과 조건이기 때문이다. 참여연대 또한 이 부분에 대해 “검찰에 따르면 재단을 거지치 않고 최순실씨 측에 직접 돈을 송금한 재벌은 삼성뿐이라며 이는 삼성과 최고위급 정치권력과의 유착의 가능성을 합리적으로 의심할 수 있다”고 밝혔다.
수년간 이들을 추적해왔다는 주진우 기자는 자신의 트위터에 “최순실 뒤에 삼성이 있다. 삼성이 주도한 모금이었다. 삼성이 주도한 정유연 공주 만들기였다”고 주장하면서 삼성의 주장에 대한 개연성을 더욱 의심케 했다. 그러나 삼성 측은 “전혀요. 어차피 주장들이니 검찰수사에서 밝혀지겠죠. 수사결과를 기다리는 것 외에 없습니다”는 입장을 밝혔다.
롯데그룹도 마찬가지다. K스포츠재단이 롯데그룹을 찾아가 75억 원을 요구해 70억 원을 받아낸 것이 올해 3월이다. 체육시설 부지 확보를 명목으로 들었다. 이 시기는 롯데가 왕자의 난으로 그룹 전체가 위기에 빠졌을 때다. 검찰 수사도 2월부터 시작됐다.
결국 롯데그룹을 속속들이 파헤칠 기세였던 검찰 수사는 신격호, 신동주, 신동빈 오너 3인방 중 아무도 구속하지 못한 채 용두사미로 마무리됐다.
CJ는 어떠한가. CJ E&M은 미르재단에 8억 원, CJ제일제당은 K스포츠에 5억 원을 냈다. 그리고 그들이 얻어낸 것은 올해 이재현 회장의 광복절 사면이었다. 게다가 이미경 부회장의 퇴진을 요구했다는 청와대의 녹취록이 공개되면서 인사개입설까지 불거지고 있다.
이 외에도 그룹 승계를 앞두고 있거나 이미 승계를 마친 총수 일가도 거액의 출연금을 마다하지 않았다. 현대차, GS, 두산, 한화 그룹 등이다. 이미 부영은 세무당국의 수사 무마를 대가로 최씨가 실소유한 재단과 물밑 거래를 했다는 의혹이 기정사실처럼 퍼지고 있다.
지난 9월 미르재단은 이사진 전원을 교체했다. 4명의 새 이사진 가운데 문화 예술 사업을 위주로 하는 이사로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포함됐다. 대림산업 홍보담당자 배선용 상무다.
이 때문에 배 상무의 이사 선임을 두고 그 배경에 의혹이 제기됐다. 대림도 건설경기 악화로 한동안 경영실적이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림 측은 이와 관련해 “(배 상무는) 그룹 내에서 문화재단 지원업무와 사회공헌 업무를 맡고 있다”며 “당시 출연기업에서 한 자리 맡는게 어떻겠냐는 주변의 추천을 받고 큰 뜻 없이 허락하게 된 것”이라며 특혜 의혹을 부인했다.
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소장 대행 김성진 변호사)는 “뇌물을 통한 정경유착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관점이자 궁극적인 종착역임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며 “재벌들은 권력형 비리의 희생자가 아니라 대통령의 직무행위를 뇌물로 산 공범이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검찰은 대기업은 물론 논란을 빚고 있는 금융기관에 대해서도 성역 없는 수사로 우리 사회의 고질병인 정경유착 고리를 단절할 것을 촉구했다.
이범희 기자 skycros@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