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ㅣ홍준철 기자] 박근혜 대통령은 11월4일 ‘회한의 눈물’을 보이며 9분간 대국민 담화문을 읽어내려갔다. 서두에서부터 눈시울이 불거졌고 ‘국민의 마음’을 언급할 때는 울먹거리기도 했다. 또한 박 대통령은 자신의 가족 관련 얘기에 울먹임과 목멤이 뒤엉키기도 했다. 하지만 검찰 수사와 특검 수용 대목에서는 강한 어조로 바뀌는 등 감정의 기복을 보였다. 박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기 직전 박 대통령과 함께 정계에 입문하면서 18년간 동고동락한 정호성 전 비서관이 전격 체포됐다는 기사가 보도됐다. 박 대통령이 ‘고마운 분’이라고 언급한 최순실씨에 이어 박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한 정 전 비서관까지 체포되면서 비선실세 및 최측근에 대한 검찰 수사는 박 대통령의 회한과 상관없이 급물살을 탈 전망이다.

- 대국민담화문 울먹이며 “이러려고 대통령 했나”
- 檢 조사받고 특검도 수용...검찰 다음 수순은…
박근혜 대통령의 대국민담화문은 눈물 어린 회한의 호소였고 최측근 인사들과 단절을 선언하는 장이었다. 박 대통령은 최순실 씨의 국정농단 사태로 인해 지난달 10월25일에 이어 4일 재차 대국민 사과를 해야만 했다. 이날 오전 10시 30분 박 대통령은 짙은 회색 정장이 말해주듯 우울하고 침통한 표정으로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이라는 제목으로 9분간 읽어내려갔다. 기자회견장에서는 기자뿐만 아니라 한광옥 대통령비서실장을 비롯한 참모진 역시 두 손을 모은 채 어두운 얼굴로 박 대통령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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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은 고개를 깊게 숙이면서 “최순실 씨 관련 사건으로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실망과 염려를 끼쳐드린 점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어 박 대통령은 “무엇보다 저를 믿고 국정을 맡겨 주신 국민 여러분께 돌이키기 힘든 마음의 상처를 드려서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며 “저와 함께 헌신적으로 뛰어 주셨던 정부의 공직자들과 현장의 많은 분들 선의의 도움을 주셨던 기업인 여러분께도 큰 실망을 드려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박 대통령은 지난 대선에서 51% 득표율을 얻어 108만표차이로 문재인 후보에게 승리했다. 취임초 국정운영 지지도도 60%대에 이르렀고 각종 악재에도 ‘묻지마식’ 지지층이 30%대를 유지케 했다. 하지만 최 씨 파문이 터진 이후 9%대에서 박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문을 하기 직전 발표에서는 5%대까지 추락하면서 역대 대통령의 국정지지도 중 최저치를 기록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박 대통령은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는 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어 박 대통령은 최 씨가 공직자 인선에 개입해 정부 공직자들의 사기를 꺾었고 기업인들에게 재단 기금 마련을 위해 ‘강제적 모금’을 한 의혹에 대해서도 순차적으로 사과를 했다.
또한 박 대통령은 “특정 개인이 이권을 챙기고 여러 위법 행위까지 저질렀다고 하니 너무나 안타깝고 참담한 심정이다”며 “이 모든 사태는 모두 저의 잘못이고 저의 불찰로 일어난 일이다. 저의 큰 책임을 가슴깊이 통감하고 있다”고 고백했다. 최 씨와 안종범 전 수석은 재단 기금 모금과정에서 서로 만난 적도 연락한 적도 없다며 서로 모르는 사이라고 검찰에 밝힌 상황이다.
안 전 수석은 한 발 더나아가 ‘박 대통령이 모금을 지시했다’고 진술해 박 대통령의 미르, K스포츠재단 기금모금에 직접 개입한 것으로 몰아갔다. 통상 최측근이나 참모라면 자신이 한 일로 치부해 검찰 수사를 받거나 ‘침묵’으로 일관해야 하지만 최 씨와 안 전 수석은 박 대통령이 ‘몸통’이라고 검찰에 밝히고 있는 셈이다.
특히 국민적 관심사인 박 대통령과 최 씨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비교적 솔직하게 털어놨다. 박 대통령은 “저는 청와대에 들어온 이후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을까 염려해 가족 간 교류마저 끊고 외롭게 지내왔다”며 “홀로 살면서 챙겨야 할 여러 개인사들을 도와줄 사람조차 마땅치 않아 오랜 인연을 갖고 있었던 최순실씨로부터 도움 받았고 왕래하게 됐다”고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박 대통령의 직계 가족은 여동생인 박근령 씨와 제부 신동욱 공화당 총재 그리고 남동생인 박지만 씨와 부인 서향희 변호사다. 이들은 박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 공개석상에나 심지어 청와대도 들락거리지 않았다는 게 지인들의 설명이다.
이어 박 대통령은 최 씨와 관련해 “제가 가장 힘들었던 시절 곁을 지켜줬기 때문에 제 스스로 경계의 담장을 낮춰었던 것이 사실이다”며 “돌이켜보니 개인적 인연을 믿고 제대로 살피지 못한 나머지 주변 사람에게 엄격하지 못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고 시인했다. 또 박 대통령은 “저 스스로를 용서하기 어렵고 서글픈 마음까지 들어 밤잠을 이루기도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대통령, “최 씨 가장 힘들었던 시절 곁을 지켜”
최 씨와 박 대통령은 40년지기로 알려져 있다. 육영수 여사가 돌아가신 후 영부인 역할을 대신하던 20대 시절, 박 대통령이 최태민 씨가 총재로 있던 ‘대한구국선교단(이후 구국봉사단, 새마음봉사단으로 개명)’의 명예총재로 임명됐고, 최태민 씨의 다섯째 딸인 최순실 씨가 ‘새마음봉사단’의 대학생 총연합회장을 맡으면서 둘의 인연이 시작됐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1987년 육영재단 분규, 1998년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 2006년 커터칼 피습 사건, 2007년 17대 대선 한나라당 경선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순간마다 최 씨는 박 대통령의 곁을 지켰다. 무엇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한 1979년이후부터 박 대통령이 정계에 들어선 1998년때까지 18년간을 곁에 머물렀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18년간은 베일에 쌓여 있다. 이 시기에 박 대통령과 최 씨의 관계가 친자매 이상으로 돈독해졌다는 것은 최태민 목사의 의붓아들인 조순제 씨도 증언하고 있다.
결국 박 대통령은 최 씨의 각종 전횡으로 인해 ‘국민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며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 하는 자괴감이 들 정도로 괴롭다” “가슴이 찢어지는 느낌”이라고 소회를 털어놨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제가 사이비 종교에 빠졌다거나 청와대에서 굿을 했다는 이야기까지 나오는데 결코 사실이 아니다”고 반박했다.
최 씨가 최태민 목사의 딸로 ‘영생교’에 심취해 있어 박 대통령도 사이버 종교에 빠졌고 이로 인해 세월호 사건이 터진 당일 여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는 ‘대통령 7시간’에 박 대통령이 최태민 목사 사망 20주기 천도재를 지냈다는 낭설을 일축한 셈이다. 이처럼 박 대통령의 대국민담화문의 한 축이 최 씨와 관련된 눈물의 사과가 주 내용이라면 또 다른 축은 검찰수사를 통한 최측근과 비선실세와의 철저한 단절을 강조했다.
박 대통령은 “저는 이번 일의 진상과 책임을 규명하는 데 있어서 최대한 협조하겠다. 이미 청와대 비서실과 경호실에도 검찰의 수사에 적극 협조하도록 지시했다”며 “필요하다면 저 역시 검찰의 조사에 성실하게 임할 각오이며 특별검사에 의한 수사까지도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실제로 검찰은 ‘문고리 3인방’중 한 명으로 연설문 유출 의혹을 받고 있는 정호성 전비서관을 박 대통령의 담화문 발표 전날인 3일 저녁 긴급 체포했다. 지난 10월31일 긴급 체포된 최 씨는 3일 전격구속됐고 2일 심야에 긴급 체포된 안 전 수석 역시 5일 구속영장이 떨어졌다.
또한 대검찰청은 특별수사본부의 요청에 따라 전국 12개 검찰청에서 파견된 검사 6명과 서울중앙지검의 별도 4명 등 총 10명을 특별수사본부에 지원하기로 했다. 또 전국 검찰청에서 6명을 추가로 파견받아 서울중앙지검 업무 공백을 메운다. 특별수사본부에 소속된 검사는 기존 22명에서 총 32명으로 대폭 늘어났다.
특히 박 대통령은 담화문에서 “검찰 조사에 성실하게 임하겠다”고 밝혔다. 현직 대통령이 헌정사상 처음으로 검찰 조사를 받는 불명예를 떠안게 됐다. 박 대통령 발언 이후 검찰은 서면조사, 방문조사, 소환조사 가운데 방문조사를 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단 청와대가 아닌 제3의 장소가 될 공산이 높다는 전망이다.
방문조사를 유력하게 꼽는 까닭은 2008년 2월에 이명박 당선인에 대한 전례를 들고 있다. 당시 특검은 이 대통령 당선인의 BBK 의혹 등을 방문조사로 진행했다. 특검팀은 서울 시내 모처에서 이 당선인을 피내사자 신분으로 3시간가량 조사했다.
또한 박 대통령은 검찰 수사 결과에 따라 책임질 일이 있으면 책임을 지겠다고 밝혔다. 박 대통령은 “어느 누구라도 이번 수사를 통해 잘못이 드러나면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할 것이며 또한 저 역시도 모든 책임을 질 각오가 돼 있다”고 답했다. 박 대통령의 이런 발언은 ‘2선 후퇴’수준이 아닌 ‘하야’까지도 염두에 둔 발언이라는 게 정치권의 해석이다.
‘2선후퇴’, ‘탈당’ 언급無 “검찰수사 결과에…”
반면 박 대통령의 특검 수용은 여야간 특검 임명을 두고 첨예하게 갈리고 있는 데다 검찰 수사 결과에 따라 ‘김빠진 특검’이 될 수 있어 큰 의미를 두고 있지 않고 있다. 그동안 특검 논의는 새누리당은 대통령이 임명하는 상설특검을, 민주당은 독립적인 별도특검으로 나뉘어져 팽팽하게 기싸움을 벌였다. 하지만 박 대통령 발언 이후 새누리당은 ‘별도특검’을 수용하되 ‘중립적인 인사’라는 단서를 달아 한 발 물러난 상황이다.
또한 박 대통령은 ‘국정농단파문’을 일으킨 최 씨와 최측근에 대해 확실하게 결별을 선언했다. 박 대통령은 “다시 한번 저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국민 여러분께 용서를 구한다”며 “이미 마음으로는 모든 인연을 끊었지만 사사로운 인연을 완전히 끊고 살겠다”고 대국민 약속을 했다. 향후 남은 국정을 운영하는 동안 비선 실세나 측근 실세라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인간적인 정리까지도 하겠다는 냉정한 모습을 보였다.
한편 박 대통령은 대국민담화를 통해 ‘2선 후퇴’나 ‘탈당’에 대해 일절 언급을 하지 않음으로써 야권과의 대치정국은 계속될 수밖에 없게 됐다. 특히 김병준 총리 내정자에 대해 ‘책임총리’라는 힘 실어주기 발언도 하지 않아 국회 인준 통과가 불확실하게 됐다. 김 내정자가 3일 기자간담회를 열고 “헌법이 규정한 총리 권한을 100% 행사하겠다”고 밝히면서 책임총리제 구현의지를 드러낸 터라 이날 담화에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담길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지만 예측은 빗나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박 대통령이 김 내정자를 발표하면서 내세운 책임총리제는 야권의 주장대로 오로지 국면 전환을 위한 카드였을 뿐 진정성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야권과 일부 여권에서 나오고 있는 2선 후퇴와 거국내각 구성은 책임총리를 통해 대통령의 권한을 나눠갖는 데서 나온 주장들이다.
대한민국에서 책임총리제는 법적으로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이 총리에게 자신의 권한을 얼마나 나눠주느냐 여부에 달렸다는 점에서 김 내정자가 자칫 실제 권한은 없는 ‘셀프 책임총리’로 남게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된다. 실제로 박 대통령이 이날 담화에서 “지금 우리 안보가 매우 큰 위기에 직면해 있고, 경제도 어려운 상황”이라며 “국내·외의 여러 현안이 산적해 있는 만큼 국정은 한시라도 중단돼선 안 된다”고 말한 대목도 자신의 주도로 국정운영을 해나가겠다는 뜻으로도 야권에서는 해석하고 있다.
홍준철 기자 mariocap@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