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당 위해 입대, 돌격대 갈지 말지 선택할 수 있는 분위기 아냐”
돌격대 출신 김태민
(가명, 1988년생)
2010년 탈북, 함경북도 출신
나는 1988년에 청진에서 태어났고 2010년 6월에 탈북 8월에 한국에 입국했습니다. 같은 해 2월에 한번 탈북했다가 북송돼 단련대에 3개월 있다가 나오자마자 다시 탈북했습니다.
돌격대는 2005년 17살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입대했습니다. 나는 입당하기 위해서 입대를 했지만 돌격대를 갈지말지를 선택할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닙니다. 단체로 배치를 받았습니다.
당국에서 가라고 하면 거부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김일성청년동맹 중앙에서 조직한 8.28청년돌격대에 들어갔고 다른 친구들은 대체로 함경북도 청년동맹이 조직한 백암청년돌격대에 배치받았습니다.
군대하고 똑같이 3개월 군사훈련을 받고 현장에 투입됐는데 고아원에서 자라 남들보다 힘든 걸 잘 견뎠지만 그래도 너무 힘들었습니다. 아침 5시 반에 기상해 줄 맞춰 노래를 부르며 식당에 가서 아침을 먹고 7시 30분부터 12시 점심으로 국수를 먹기 전까지 작업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저녁 8시까지 작업을 했는데 10시까지 일할 때도 있었습니다.
평양 만경대구역 아파트 건설에 투입이 됐는데 하루종일 기차 빵통에서 시멘트를 날라야 했습니다. 등가죽이 다 벗겨지고 거기에 시멘트가 달라 붙어 잘 씻겨지지도 않았습니다. 쉬는 시간이면 다들 누워있어야 했습니다. 일이 끝나고 오락회를 하는데 몸이 힘들어서 다들 싫어했습니다.
우리 대대는 250명 정도였는데 여성은 35% 정도였고 업무 과제가 차이가 없다 보니 여자들 고생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대부분 생리도 못했습니다.
우리가 투입된 아파트는 국가 건설사업이 아니었습니다. 건설물은 대체로 민간아파트였는데 기업소에서 명의를 내주면 ‘돈주’가 투자를 해서 짓는 형태였습니다. 돌격대 대대장이 돈을 받고 그 돈을 려단으로 바치는데 아마도 중간에서 대대장이 돈을 많이 훔치는 느낌이었습니다.
왜냐면 대대장은 거의 부자였으니까. 개인 차는 아니지만 승용차를 가끔씩 탈 때도 있었고 좋은 벨트와 좋은 신발 좋은 옷만 입고 다녔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대대장은 우리에게 있어서 신화 같은 존재였습니다.
특히 먹는 게 형편없었습니다. 중대장이나 위 간부들이 중간에서 다 빼먹다 보니 우리한테 내려오는 건 아주 형편없었습니다. 2006년 중순에 일이 너무 힘들어 7개월 정도 하다 도주를 했는데 그때 같이 입대했던 동기 100여명 중에서 20여명밖에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사고는 아파트 건설이다 보니까 추락사고가 많았습니다. 안전장비의 개념이 없습니다. 그래서 외벽미장 하는 사람들이 사고가 많이 났습니다. 손가락 절단사고도 있었는데 치료만 받고 나을 때까지 쉬는 게 다고 다른 보상은 없습니다. 그래도 일이 힘보다보니까 일부러 쉬려고 자해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도망 나오고 나서 다시 돌격대에 나가서 2006년 겨울부터 2009년까지 있었습니다. 이번엔 직장에 적을 두고 105돌격대에 들어갔는데 직장에는 한 번도 출근한 적은 없지만 직장에선 아주 좋아했습니다.
105돌격대는 직장돌격대인데 8.28돌격대에 비해서 괜찮았습니다. 먹는 것도 괜찮았고 기술자들도 많았습니다. 105돌격대는 12개 여단 규모로 1만명 규모였는데 류경호텔을 짓다가 공사가 중단됐지만 2009년 김정일 지시로 해산하기 전까지 돌격대를 유지했습니다. 나중에 김정일이 죽기 직전에 다시 조직됐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105돌격대 역시 사립 아파트 건설에 투입됐는데 105돌격대 차원에서 건설을 수주해 작업을 배분받는 구조였습니다. 처음에는 몰타작업도 하고 미장을 배우다 힘들어서 용접을 배우러 기술학교에 들어가 배우고 용접대대에서 일을 했습니다.
용접일 할 때는 철판 바가지는 쓰지만 장갑이나 방호옷 같은 건 없었습니다. 일요일에는 다른 데 가서 일을 해주고 돈을 벌었습니다. 몸 쓰는 일은 다 했습니다. 105돌격대에서 식사는 쌀과 강냉이가 5대 5로 나왔는데 괜찮았습니다. 월급은 몇백원 했던 것 같은데 인조고기밥 2개 정도 사먹을 돈이었습니다.
105돌격대는 도주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직장에서 파견하는 형식이니까 힘들다고 하면 직장에서 교대를 해줬는데 나는 3년 정도 계속 돌격대에 남았습니다.
“지하발전소 공사 중 화약 터져 한 개 중대 전부 죽기도”
공장 기업소 출신 조태성
(가명, 1949년생)
2012년 탈북, 개성 출신
나는 1949년 서울에서 태어나 1950년 외할아버지 댁인 개성에 갔다가 전쟁으로 계속 북에 남게 됐습니다. 2012년 8월 탈북해 2014년 1월에 한국에 입국했습니다.
나는 18살에 동의학을 배우는 전문학교에 다니다 어머니가 일하시던 인삼농장에 들어갔습니다. 외할아버지가 지주로 낙인 돼 토대가 나빠 상급학교 진학이나 출세가 안 된다고 생각해 의학을 포기했습니다.
1958년부터 국군가족, 지주 집안은 총살되거나 추방됐는데 옆집 할아버지는 아들이 국군에 나갔다는 이유로 1959년 안주탄광으로 추방됐습니다. 우리 집은 무사하다가 1968년 3월에 무산으로 추방됐습니다.
그리고 제2연합기업소 산하 25금속공장건설사업소에 배치됐는데 누나는 105군수창고 건설, 나와 어머니는 705사업소 연유탱크 건설에 동원됐습니다. 배급은 무산광산기업에서 나왔지만 일은 무력부에서 시켰습니다.
제2연합기업소는 전국에서 토대가 안 좋은 사람들을 뽑아서 조직했습니다. 개성에서만 총 500세대가 무산으로 추방돼 건설에 동원됐습니다. 끌려갔지만 끽소리도 못했습니다. 조그만 불평이라도 하면 보위부가 수용소로 끌고 갔는데 하룻밤에 2, 3세대 총 70세대 정도가 정치범수용소에 보내졌습니다.
1968년 10월에 함경북도 연사군 삼포리 서두수발전소 건설공사에 동원됐는데 지하발전소였습니다. 물을 막은 다음 굴을 뚫어 250리를 옮겨야 했습니다. 수만 명이 동원됐는데 15갱 중에서 우리 기업소는 8, 9, 10갱을 맡았습니다.
엄청난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한 개 중대가 화약이 터져 전부 죽기도 했습니다. 또 14, 15갱은 울타리를 치고 사는 공민증 없는 사람들이 맡았는데 이 사람들은 정치범이었습니다. 나는 여기서 1971년도까지 일을 했습니다. 지금은 다 무너져 폐쇄됐습니다.
1971년에는 온성탄광으로 배치됐는데 곡괭이로 탄을 캤습니다. 인력으로 다 했는데 아침에 들어가면 나올 때까지 허리를 못 펴고 무릎을 꿇고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허리가 구부정합니다.
그러다 1973년 왕재산 사적지 건설로 배치됐는데 김일성이 왕재산 터에 박물관을 건설하라고 지시하고 김정일이 현지지도를 나와서 박물관 대신 왕재산 위에 봉화탑을 건설하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산 중턱에 66미터짜리 봉화탑을 건설하는 건데 주변 탄광과 수용소, 교화소 사람들까지 다 동원돼서 건설했습니다. 나는 주로 돌 까는 작업을 했습니다. 3중대 중대장을 했는데 토대가 나빠 입당은 못했습니다. 왕재산 사적지 건설은 1975년 준공됐습니다.
1975년 무산으로 나와서는 교도대 신호나팔을 배우고 1989년까지 경리과에 배치받았습니다. 주로 배급표도 나눠주고 화목과 석탄, 수산물 공급을 맡아서 했습니다. 우리 기업소는 무산광산 확장공사와 나진개발공사, 어랑천발전소 건설도 담당했습니다. 나중에는 전문 건설작업은 우리 기업소가 맡고 단순작업은 돌격대가 투입되는 형태로 바뀌었습니다.
1989년에는 무산역 철송역전에 입사했습니다. 철송역은 주로 무산광산 철광석을 운반했는데 요즘은 중국 트럭이 차로 운반합니다. 여기서 역무원으로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 1995년 배급이 끊기면서 역전에 근무하면서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역무원 정복을 입었기 때문에 전국을 다 다닐 수 있었는데 역장과 초급당 비서에게 뇌물을 주고 주로 해삼 같은 수산물을 해주 이런 데 가서 사다가 팔아 생계를 꾸려갔습니다. 2008년에 퇴직을 했습니다.
인민반을 조직해 학습과 사회노동을 시킨 건 1965년부터로 기억합니다. 인민반은 돌격대 후방사업도 시키고 영생탑이나 모자이크벽화 청소도 담당합니다.
오두환 기자 odh@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