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요서울 | 오두환 기자] 북한에서 처음 돌격대와 비슷한 형태로 등장한 조직은 1946년 평양 ‘보통강개수공사’에 동원된 ‘민청청년돌격대’다.
이후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에는 ‘수도청년복구대’, 1968년에는 ‘수도건설청년돌격대’, 1970년에는 ‘전국청년돌격대’ 등이 30여년 간 전후복구와 북한의 경제건설을 위해 임시조직으로 운영됐다.
당시의 청년돌격대는 조직적 동원의 성격도 있었지만 국가재건이라는 소명의식을 가진 청년들의 자발적 참여의식 역시 높았다. 무엇보다 건설사업이 개인의 지시나 업적이 아니라 국가의 공식적인 의사결정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고 특정 개인에게 업적이 돌아간 것도 아니었다.
지금과 같은 형태의 돌격대는 김정일의 후계세습 과정에 만들어졌다. 김정일은 1975년 2월 개최된 조선노동당 제5기 제8차 전원회의에서 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으로 선출되며 공식적인 권력 승계자로 확정됐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아들에게 권력을 물려주는 세습은 정당성과 전례가 없었다. 김정일은 이를 경제건설과 대규모 건설을 통한 업적으로 극복하려 했는데 이 과정에서 나온 것이 속도전이다.
1971년부터 1976년까지의 국가경제 6개년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자 김정일은 전 당이 총돌격전을 벌여야 계획완수가 가능하다며 1974년 10월 21일부터 ‘70일 전투’를 진행할 것을 지시했다.
70일 전투기간 공업생산은 평균 1.7배, 일부 지역의 석탄 생산량은 5배 증가했다. 전투기간 동안 근로자들이 밤 12시, 때로는 새벽까지 노동을 해 얻은 결과다. 이에 고무된 김정일은 평양의 대규모 건설사업을 위해 1974년 5월 16일 청년동맹 산하에 속도전청년돌격대를 창립했다.
이전 전후복구와 국가경제 건설을 위해 일시적으로 운영되었던 청년돌격대를 처음으로 상설화한 것이다. 김정일은 속도전청년돌격대의 성격과 임무, 규모와 조직체계, 돌격대원의 선발원칙까지 제시했다.
2015년 창립 40주년을 맞은 속도전청년돌격대는 평양 만경대학생소년궁전과 인민대학습당, 국제친선관람관, 14개의 혁명전적지와 혁명사적지 건설, 창광거리와 광복거리 등에 세워진 아파트, 원산-금강산 철도공사, 북한 북부철도공사, 남포고속도로를 비롯해 200여개에 달하는 국가건설사업을 주도했다.
특히 70년대와 80년대를 거치며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에서 수령 일개인 중심의 특이한 형태의 국가로 바뀌어갔다.
경제 역시 사회주의 국가 본연의 계획경제보다 수령 개인의 즉흥적 지시에 의해 생산이 집중되는 기형적 형태로 변모했다.
돌격대는 이런 기형적 사회시스템에 가장 적합한 형태의 조직으로 최고지도자가 지시하면 언제 어디든지 원하는 대규모 건설사업을 완수할 수 있는 구조였다. 청년동맹이 조직한 속도전청년돌격대가 각종 건설사업에서 성과를 보이자 돌격대는 다른 기구로 빠르게 확산됐다.
105 돌격대의 전신인 당원돌격대, 선전선동부가 조직한 6.18돌격대, 도 단위 지역에서 조직한 돌격대, 4.15 돌격대 등이 그것인데, 최고지도자에 대한 충성이 최고의 미덕인 북한에서 각 부서와 기구의 간부들은 돌격대를 내세워 자신의 충성심을 과시하고 있다.
오두환 기자 odh@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