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탈당으로 손학규의 정치 생명은 끝났다.’(?)
정세분석에 나선 일부 여의도 ‘논객’들이 이번 사안을 논의하고 내린 잠정 결론이다. 손학규 전경기지사가 ‘장고 끝 악수’를 뒀다는 것이다. 그러나 통설의 이면에 흐르는 정치적 ‘배후’가 있는 한, ‘예단은 금물’이라는 진단이 나오는 이유는 뭘까.
손 전지사는 이달 초부터 한나라당 탈당을 정식 발표하기까지 상당히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2월 말부터 당내 경선방식에 불만을 표출하며 경선준비위원회 불참을 선언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언론과의 인터뷰를 거부하는 한편, 공식일정을 취소하면서 ‘입장’을 최종 정리해 온 것으로 보인다.
정치인이 통상 중대 결심에 임박해 ‘사찰’을 찾는 방식도 유사했다. 그러나 손 전지사가 찾아간 봉은사와 낙산사는 상황이 좀 다르다. 두 사찰의 주지스님이 갖는 남다른 의미 때문이다.
심지어 노무현 대통령과 가까운 낙산사 주지 정념 스님이 ‘대통령의 메시지’를 손 전지사에게 전달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회자되고 있다. 한나라당에서 정념 스님에게 ‘특사’까지 보내며 벌인 물밑 신경전을 심층 추적했다.
지난 3월 14일 서울 강남구 소재 봉은사를 찾은 손학규 전지사는 이곳에서 일종의 ‘선문답’을 통해 정치적 결단이 임박했음을 시사했다. 이날 손 전지사는 “백척간두에 진일보라 했는데 무슨 뜻이 있느냐”면서 복잡한 심경을 토로했다.
다음날 오후 2시 제3의 정치세력을 추구하는 ‘전진코리아’ 창립총회에 참석해 축사를 했다. 이 일정을 마친 직후 손 전지사의 수행비서는 강원도 양양으로 차를 몰았다.
‘전진코리아’ 참석 후 낙산사로 직행
낙산사에 도착한 손 전지사는 주지인 정념 스님과 수차례 독대를 한 끝에 최종 결심을 굳혔다. 또, 정념 스님이 묵었던 봉정암 등을 거쳐 지난 3월 19일 상경, 백범기념관에서 ‘탈당의 변’을 밝힌 것. 일부 캠프 관계자들은 이날 회견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손 전지사에 대한 실망감
을 간접적으로 표출했다.
정식 탈당계를 제출하고 그가 처음으로 만난 사람은 바로 김지하 시인이다. 정계와 문화계에 발이 넓은 김지하씨를 매개로 새로운 정치세력을 만들어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 과정에서 가장 주목할 대목은 바로 봉은사와 낙산사에서의 ‘여정’이다.
봉은사 명진 스님은 불교계 대표적 운동권 인사로 통한다. 1980년대 개혁적 색채를 드러내면서 불교계 개혁조직인 ‘민불련’ 등에 몸담기도 했다. 순탄치만은 않은 궤적을 그려왔던 주지 스님이 손 전지사에게 낙산사행(行)을 주문했다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그러나 봉은사 성산 사회국장은 기자와 통화에서 “손 전지사는 그냥 들러 가신 분일 뿐”이라며 “여기에 대해서 주지 스님이 딱히 말씀하실 관계가 아닌 것 같다”고 선을 그었다.
낙산사 주지인 정념 스님은 불교계에선 익히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지난 2002년 대선에서 불교계의 전반적인 기류와 달리, 노무현 대통령 후보를 지지하면서 눈길을 끌었다. 이로 인해 정념 스님은 불교계에서 이례적으로 ‘친노 성향’으로 분류된다.
그는 참여정부 출범 이후 조계종 사회부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손 전지사가 정념 스님을 찾아간 것은 그래서 눈길을 끌고 있는 것이다. 그는 지난 1월 중순에도 낙산사를 찾아 정념 스님과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눴다.
정념 스님 주변에서 노 대통령의 메시지가 손 전지사에게 전달되고 있다는 소문도 그 즈음부터 회자되기 시작했다. 한나라당에서도 이런 정보를 입수하고 손 전지사가 재차 낙산사를 방문하기 10여일 전인 지난 7일, 이미 ‘특사’를 현지에 파견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이날 낙산사를 찾은 한나라당 A의원은 ‘정념-손학규’의 관계에 대한 사실 확인을 하는 한편, 손 전지사의 탈당을 막아달라는 부탁까지 하고 돌아온 것으로 확인됐다.
A의원의 측근은 “정념 스님 주변에서 손학규 전지사와 관련된 얘기가 회자되고 있다는 것은 우리도 알고 있었다”면서 “낙산사를 찾아 정념 스님에게 ‘손 전지사를 잡아달라’는 입장을 전달하자 ‘걱정하지 말라’고까지 말을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나라당 일행은 귀경길에 ‘불안감’이 엄습
해 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정념 스님은 여전히 노 대통령과 가까워 보였다는 얘기다.
A의원 측근은 또, “그동안 이 작업(손학규 탈당)을 위해 워낙 공을 들여왔다고 들었다”면서 일련의 상황에 대해 후술했다.
그는 “저쪽(범여권) 구도는 이명박, 박근혜의 이전투구가 심각한 상황으로 치달을 것을 예상하고 ‘잠룡군’을 포섭하고 있는 것 같다”며 “그렇다고 손 전지사를 지원한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기본적으로 멍석은 깔아주지만, 난관을 극복하는 것은 늘 당사자의 몫이었다”고 지적했다. 여기에는 범여권의 ‘정치 작전’을 마냥 지켜보지만은 않겠다는 한나라당의 입장이 담겨 있다.
손 전지사를 사이에 두고 물밑에서 정권과 한나라당이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벌였다는 사실은 매우 충격적인 내용이다.
정념 스님은 권양숙 여사와도 ‘특별한’ 인연을 맺고 있다고 한다. 권 여사의 자매 중 한 명이 봉정암에 머문 적이 있는데, 이를 통해 더욱 가까워졌
다는 후문이다.
낙산사측, 주지스님 기자와 연결 꺼려
이런 일화가 알려지면서 정치권 안팎에선 노 대통령의 ‘메신저’로서 정념 ‘역할론’이 더욱 확산되고 있는 분위기다. <일요서울>은 정념 스님의 해명을 직접 듣기 위해 ‘메모’를 남기는 등 여러 차례 접촉을 시도했지만 답신을 받지 못했다.
낙산사 김득중 종무실장은 지난 3월 23일 기자와 통화에서 “주지 스님은 일체 정치적인 얘기를 하시지도 않으실 뿐만 아니라, 기자들과 전화 통화도 원치 않는다”고 전했다.
정치권 일각에선 정념을 둘러싼 ‘비하인드 스토리’를 “인정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내놓기도 한다.
가장 큰 이유로, 노 대통령이 손 전지사를 강하게 쏘아붙이고 있는 현실을 지적한다.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한다면, 적어도 ‘기본을 망각한 정치인’이라는 식의 비판은 나오기 어렵다는 것.
노 대통령은 손 전지사를 향해 “탈당을 하든 입당을 하든 평상시의 소신을 갖고 해야지 선거를 앞두고 경선에서 불리하다고 탈당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민주주의 원칙에 맞지 않는 것”이라고 비난한 바 있다.
하지만, 손 전지사가 처한 상황을 살펴보면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참모들이 우왕좌왕하고 있고, 손 전지사 또한 특단의 후속책이 없어 자칫 ‘정치 미아’가 될 수도 있는 최악의 상황이다. 최근에는 예정된 공식일정도 없다. 탈당의 ‘약발’이 그리 오랫동안 지속되지도 않을 터다.
‘이슈메이커’로 급부상한 이면에는 노 대통령의 ‘날선 비판’이 한 몫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가만히 두면 위기지만, 때릴수록 주가가 상승하는
측면이 분명 존재한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손 전지사의 지지율은 인지도 상승효과로 인해 8~10%까지 상승했다는 게 그 증거다.
상대적으로 한나라당 대선 주자들은 불교계와 ‘거리감’이 느껴질 정도다.
이 전시장은 시장 재직 당시 ‘서울시 봉헌’ 발언으로 이미 한 차례 불교계의 미움을 산 바 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특별 프로그램까지 가동했지만, 소득은 크지 않았던 것 같다.
박 전대표도 낙산사 화재사건을 위로하기 위해 주 모의원을 대리인으로 급파하기까지 했지만, 정념 스님 등에게 호응을 얻지 못하고 돌아온 적이 있다.
이제 ‘멍석’이 깔린 만큼 남은 것은 손 전지사의 ‘정치력’이다. 그가 ‘비노무현, 비한나라당’을 모토로 내세운 ‘전진코리아’에 참석해 관심을 표명한 부분과 탈당 후 첫 만남의 주인공을 김지하 시인으로 선택한 점은 그래서 더 눈길을 끈다. 자생적으로 정치력을 발휘하지 않는다면, 범여권의 보이지 않는 ‘지원’도 결실을 맺기 어렵다는 점에서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모양새다.
노 대통령, ‘작심’ 비판의 숨은 의도
손 전지사에게 주어진 시간은 오는 6월까지다. 범여권이 ‘오픈프라이머리’로 경선을 치르기 위해서는 적어도 6월부터 ‘채비’를 해야 한다. 정운찬, 진대제 등과 함께 ‘드림팀’을 구성하는 방안 등이 현실화될 여지가 남아 있는 한, 그의 선택을 ‘패착’으로 보는 것은 여전히 성급해 보인다.
손 전지사 캠프 공보실 관계자는 “정념 스님과 인연은 지사님과 막역한 보현 스님의 소개로 시작됐고, 지금까지 2~3차례 정도 만났다고 알고 있다”며 “3월 15일 낙산사를 방문했을 당시 몇 차례 독대를 하셨다는 것 외에는 아는 게 없다”고 말했다.
#손학규-DJ 사전교감설 실체 간접적으로 ‘의중’ 전달됐나?
손학규 전경기지사가 탈당 전 김대중(DJ) 전대통령과 ‘교감’을 나눴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와 주목된다.
DJ는 그동안 줄곧 “현실정치에 개입하지 않겠다”면서 선을 그어왔다. 그러나, 대선이 임박해 올수록 지역주의가 고개를 들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한 가운데, 호남 민심의 ‘나침반’인 DJ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양상이다.
특히, 손 전지사가 DJ의 대북정책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나선 대목은 설사 사전교감설이 ‘낭설’일지라도 DJ 입장에선 기분이 나쁠 리 없다.
이와 관련, 한나라당 홍준표 의원은 SBS라디오 <김어준의 뉴스앤조이>에 출연 ‘손학규-DJ’ 교감설을 언급해 눈길을 끌었다.
홍 의원은 “김대중 전대통령이 자신의 남북관계 철학을 계승할 적임자를 찾는 과정이었다”며 “손학규 전지사가 햇볕정책에 대해 공개 지지를 표명한 점도 바로 두 사람의 교감 속에서 이뤄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DJ측은 손 전지사가 탈당에 앞서 “접촉을 시도한 사실이 없다”면서 교감설을 일축했다.
김대현 suv15@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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