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영화계의 두 스타 감독을 둘러싸고 미묘한 기류가 형성되고 있다. 그 주인공은 바로 김기덕 감독과 봉준호 감독. 자신만의 독특한 색깔이 확실한 김 감독은 신작 ‘시간’의 개봉을 앞두고 “앞으로 내 영화는 국내에서 개봉하지 않을 것”이라고 폭탄발언을 해서 주위를 놀라게 만들었다. 또한 초대박 행진을 이어가고 있는 봉 감독의 영화 ‘괴물’에 대해서도 “한국영화의 수준과 한국관객의 수준이 잘 만난 최정점”이라고 말해 네티즌들 사이에서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1,000만 관객시대를 열어가고 있는 한국 영화 시장에서 김 감독의 이런 발언은 마이너리티 영화들이 얼마나 큰 고충을 안고 살아가는지 보여주는 단편적인 예다. 이것이 김 감독의 발언이 단순히 예술영화 감독의 푸념으로 들리지 않는 이유다.
김기덕 발언, 영화인들이 풀어야할 ‘숙제’
‘괴물’ 등 한 영화 독식은 다양한 영화 소외
작가주의 예술영화를 추구하는 김기덕 감독이 한국 영화계를 향해 과감히 ‘쓴소리’를 내뱉으면서 영화계에 일대 파란이 일고 있다.
지난 7일, 김기덕 감독은 신작 ‘시간’의 시사회 직후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영화 ‘시간’ 이후 앞으로 한국에서는 내 작품을 개봉하지 않을 것”이며 “국내 어떤 영화제에도 작품을 출품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불평이나 하소연으로 들어도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김기덕 감독의 표정은 비장했다.
영화의 홍보를 위해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치러지는 일반적인 기자간담회가 아니었다. 김 감독은 “아는 사람들을 보면서 말을 할 수가 없을 것 같다”며 작정이라도 한 듯 검은 선글라스까지 쓰고 나왔다.
작가주의 예술영화 추구
그렇다면 김 감독은 왜 영화를 홍보해야 하는 영화 기자간담회에서 이같은 폭탄발언을 해야 했을까. 그것은 바로 ‘마이너리티’ 영화에 대한 대중들의 소외에 따른 ‘실망’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작품성은 있지만, 상업성이 떨어지면 국내에서 외면당하는 현실에 대한 김 감독의 불만이 표출된 것.
김 감독은 그동안 베니스 영화제 감독상을 비롯, 해외 영화제에서 수없이 많은 상을 받았기 때문에 해외에서는 한국영화감독 중 가장 유명하다. 하지만 국내에서 그의 영화에 대한 반응은 냉담하기 그지없었다.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 미국에서 30만명, ‘빈집’이 프랑스에서 20만 관객을 모았던 것에 비해, 한국에서의 관객수는 형편없이 낮았다.
한국에서는 ‘빈집’이 9만 명, 지난해 마케팅 비용을 아끼려고 시사회 없이 개봉한 영화 ‘활’은 불과 1,500명만 관람했을 뿐이다. 흥행면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던 김 감독은 ‘빈집’ 이후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밝혔다. 그리고 ‘국내 영화 개봉 불가’ 결정 역시 오랜 고민 끝에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 ‘시간’ 역시 국내 개봉은 생각하지 않고 있었지만, 영화사의 설득으로 10여개 상영관에서 개봉을 하게 된 것이다. 결국 김 감독의 폭탄 발언은 해외에서는 작품성을 인정받아도 국내에서는 개봉관조차 잡기 힘들고 대중들에게 외면받는 현실에 대한 울분인 것이다. 개봉관을 아예 잡지 못하는 예술 영화도 한 두개가 아니다”라는 한 영화 관계자의 말처럼 김 감독의 외침은 소외된 예술주의 영화인들의 외침으로 봐도 무관하다.
폭탄 선언의 배경은?
김 감독은 이어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는 영화 ‘괴물’에 대해서는 “한국영화의 수준과 한국관객의 수준이 잘 만난 최정점이다. 이는 부정적이기도 하고 긍정적이기도 한 말”이라고 말했다. 김 감독의 이 같은 발언은 인터넷상에서 찬반 논쟁을 벌이며 논란이 한창이다.
하지만 김 감독이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의 질을 놓고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한 영화가 대한민국 1,600개의 상영관 중에 620개의 상영관을 독점했을 때, 상업성과 거리가 먼 ‘의미있는 예술영화’는 설자리가 없어지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예술 영화 중에는 김 감독의 영화도 포함되어 있다. 한 영화의 상영관 독식은 다양한 영화를 보고 싶어하는 관객들의 요구를 원천 봉쇄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김 감독의 발언은 괴물이 작품성과 흥행성을 동시에 갖고, 대중의 관심을 이끌어 내면서 흥행을 하고 있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괴물’의 상영관 독점은 다른 작은 영화들을 소외되게 만든다는 맥락으로 이해하면 된다.
영화 ‘프라이 대디’의 주연을 맡은 이문식 역시 비슷한 맥락으로 “괴물의 독주가 박수칠 만한 일은 아니다”라며 한 영화의 상영관 독식을 우려하는 의견을 밝힌 적이 있다.
이런 문제의식은 ‘대박’ 영화감독 봉준호 역시 마찬가지. 봉 감독은 “1,600여 개 스크린 중 620개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한국만의 독특한 상황”이라며 “다양한 소수 취향의 영화를 보호할 수 있는 ‘마이너리티 쿼터’ 같은 장치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미개봉 ‘예술영화’의 비애
상황이 이렇기 때문에 스크린 쿼터 사수를 통해 할리우드 영화를 막아내자는 영화인들의 외침은 예술 영화인들에게는 어차피 별 의미가 없다. 매번 독립영화와 작품성 있는 영화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정작 그런 영화들은 관객들에게 보여줄 기회조차 없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김 감독이 ‘괴물’에 대해 코멘트 한 것에 대해 논란을 일으키고 있지만, 정작 김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무엇인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화 ‘시간’은 해외 20여 개국에 수출할 정도로 호평을 받고 있고, 김기덕의 색깔을 유지하면서 웃음의 코드를 덧입혀 관객들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고 있다. 김기덕 감독 역시 대중들과 호흡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 이번에는 관객들이 소수의 예술 영화에 대한 마음을 열 차례다.
이번 파문을 단순히 한 예술 영화 감독의 ‘푸념’으로 듣지 말고,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우리의 풍토를 다시 한번 되돌아 볼 수 있는 계기로 삼는 것은 어떨까.
김민주 kimmj@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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