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 ㅣ 이범희 기자] 지난해 10월 출범한 문화재단 ‘미르’에 대한 궁금증이 커지고 있다. 이 재단의 설립 취지는 물론 출범 초부터 30개 기업에서 480여억 원이 넘는 자금이 출연됐다.
다른 재단이 1년에 수억 원을 출연받기 힘든 상황에서 한 재단에 큰 금액이 모인 건 극히 이례적이다. 이 과정에 안종범 정책조정수석이 연루됐다는 의혹이 퍼지고 있다. 현재 그는 전경련이 주도한 모금 과정의 배후로 꼽힌다.
수십억 출연 기업 중 자사 재단에 0원 출연한 기업도 있어
안종범 수석 연루 논란에 더민주 “납득할 만한 설명 내놔야”
이 재단은 엔터테인먼트 중심의 한류를 넘어 음식·의류·화장품·라이프스타일 등 신한류 확산을 통해 전 세계에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알릴 수 있는 기반 구축 사업을 추진할 예정이다.
미르는 지난해 10월 27일 강남구 학동로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현판 제막식을 했다. 그런데 출범 두 달 만에 국내 공익법인 3만4000여 곳 가운데 기부금 모금실적이 전체 23위, 문화재단 중에선 삼성문화재단을 뛰어넘어 1위에 올랐다.
이에 대해 복수의 문화재단 관계자들은 대기업들이 특정 재단 한 곳에 500억 원 가까운 돈을 모아준 것 자체가 이례적이라고 말한다.
한 관계자는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400억을 어떻게 모으겠나. 그 정도의 금액 출연을 받는다는 것은 대단한 배경이 있지 않고는 힘들다”고 귀띔한다.
게다가 돈을 낸 기업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운영하는 문화재단이 따로 있다. 문화사업 지원이 진짜 목적이었다면 굳이 미르가 아니더라도 가능하단 얘기다.
익명을 요구한 그룹 관계자는 “설립 초기에 전경련 통해서 요청이 온 걸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그룹 관계자는 “전경련이 기업에 얘기할 때 전경련이 재단 만드는데 내라고 하면 내겠느나. 미르는 나라에서 하는 문화재단이다. 정부에서 기획을 했는데, 각 기업들이 출연한 것”이라고 말했다.
잡음 있던 기업들
출연금도 많이 내놓아
또한 이번 모금이 주목받는 건 출연한 기업들 대부분이 논란의 중심에 선 기업들이라는 점이다.
출범 당시 가장 많은 출연을 한 기업은 삼성이다. 125억 원을 출연했다. 삼성전자, 삼성물산, 삼성화재, 삼성생명 등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분을 가지고 있는 4개 회사가 수십억 원씩 나눠 냈다.
당시 삼성은 난제였던 계열사 합병 문제를 해결하고 난 뒤였다. 삼성은 지금까지도 이재용 부회장의 안정적인 경영권 승계가 최대 관심사다.
‘형제의 난’을 겪으며 경영권 분쟁이 한창이던 롯데 역시 28억 원을 냈다. 당시 돈을 출연한 시기가 면세점 재승인 시점과 맞물렸다. 총수 일가가 수감 중이거나 집행유예 중인 기업들도 동참했다.
세 번째로 많은 68억 원을 낸 SK는 최태원 회장이 지난해 8월 사면 받은 직후였고 최재원 부회장의 가석방 및 사면을 바라는 상태였다.
이재현 회장이 재판 중이던 CJ는 8억, 김승연 회장의 복권을 기대하는 한화는 15억 원을 냈다.
자원외교 등 비리 수사를 받고 있던 포스코는 30억 원, 박용성 전 회장이 뇌물 공여 혐의로 재판 중이던 두산도 7억 원을 기부했다.
인터넷은행 사업자 선정을 앞두고 있던 KT는 11억 원, 계열사 부당지원 혐의로 공정위 조사를 받던 금호는 7억 원, 허창수 회장이 전경련 회장을 맡고 있는 GS는 26억 원을 출연했다.
이외에도 현대차 85억 원, LG 48억 원 등 모두 30개 기업이 486억 원의 출연금을 냈다.
허가부터 현판식까지
하루에 ‘일사천리’ 진행
더욱 황당한 건 각각 85억 원과 7억 원을 미르에 낸 현대차와 두산은 정작 자신들의 문화재단엔 돈을 출연하지 않았다.
출연금 뿐 아니라 미르 재단은 설립 과정도 미스터리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법인설립 허가를 내준 날은 지난해 10월 27일. 그런데, 법인 등기와 대기업 임원들을 초청한 현판식까지 모두 설립허가 당일 몇 시간 만에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다는 의혹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의혹이 불거진 것도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해 11월 모 경제지는 재단법인 미르 후원 강요의 문제를 이미 지적했다. 논설위원이 해당 재벌에 왜 돈을 냈냐고 물어보니 답은 “내라니까 냈다”였다. 누가 내라고 했느냐고 다시 물었더니 “다 아시면서”라는 꼬리 없는 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소식이 알려지자 야권에서는 왜 안종범 수석이 민간재단 설립과 모금에 깊게 관여했는지에 대해 강한 의문이 제기됐다.
김홍걸 전 더불어 민주당 통합위원장은 페이스북을 통해 “안종범 수석 관련 의혹이 사실이라면, 5공 시절 일해재단 강제모금을 방불케 하는 일”이라며 “확실한 진상규명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일해재단은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퇴임 후 수렴청정 통치를 위해 재계에 출연을 강요해 만든 재단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퇴임 후를 대비한 재단 설립이 아니냐는 의혹 제기인 셈이다.
이재정 더민주 원내대변인도 브리핑을 통해 “만약 이 같은 일이 사실이면, 갑질 중의 갑질, 권력을 이용한 차떼기 모금과 다를 바 없다”며 “강제모금의 배후로 지목된 안종범 수석은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아울러 전경련 역시 어버이 연합 사건을 비롯한 일련의 사태에서의 처신과 활동이 ‘올바른 경제정책구현’이라는 스스로 내세운 목적에 부합하는 것인지, 이제는 점검, 반성하고, 해명해야 할 것”이라고 일침을 놨다.
이범희 기자 skycros@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