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인터뷰 요청이 너무 많이 들어와서 차기작 준비에 차질을 빚고 있다”고 하소연 하는 이준익 감독에게 1,000만 관객 돌파 소감과 ‘왕의 남자’의 인기 비결 등을 직접 들어봤다. “1,000만 관객은 숫자에 불과합니다.” 이준익 감독에게 1,000만 관객 돌파에 대한 소감을 물었더니 기자의 예상과는 정반대의 대답이 나왔다. “저는 (사람들이) 숫자를 염두에 두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왜냐하면, ‘성과’보다는 ‘성분’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죠. 자본주의 사회에서 ‘숫자’는 여러 가지 지표가 될 수 있지만, 로또와 비교되는 한탕주의 같아서 생업으로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허탈함을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1,000만’이라는 성과가 나오기까지 ‘성분’의 소중함을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어요.”
성과보다는 성분이 중요
솔직히 기자는 이 감독에게 1,000만 관객 돌파에 대해 요란을 떨며, 큰소리로 축하해주고 싶었는데, 이 감독은 전혀 기쁜 내색을 하지 않았다. 최근 쏟아지는 언론의 스포트라이트가 단지 ‘1,000만 관객’이라는 ‘숫자’에만 맞춰져 있는 것을 경계하는 눈치였다. “내가 영화를 처음 만들 때 ‘친구’와 ‘웰컴투 동막골’을 뛰어넘고 1,000만 관객을 넘어야겠다고 외치면서 시작했다면, 나름대로 목표달성의 성취감이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20년 동안 영화계에서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단지 생존을 위해 몸부림을 치며 영화를 만들기 위해 에너지를 쏟았어요. 누구를 이겨야겠다는 ‘경쟁심’이 아니라 눈앞의 절박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마지막 한 방울의 땀까지 짜냈죠. 내게 ‘왕의 남자’는 그런 영화예요.”
현재 한국 영화 역사상, 1,000만 관객을 넘은 영화는 실미도(1,108만명, 2003년, 82억원), 태극기를 휘날리며(1,174만명, 2004년, 147억원) 단 두 편뿐이다. 여기에 ‘왕의 남자’가 1,000만 대열에 합류하게 되면서, 이제 영화인들의 관심은 ‘왕의 남자’가 흥행 1위였던 ‘태극기를 휘날리며’를 뛰어 넘을 수 있을까 아닐까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지금의 기세로 볼 때는 충분히 뛰어 넘을 수 있다는 의견이 많은 상태다. 이에 대해 이 감독은 “처음부터 1등을 하는 것은 별로 반갑지 않다”며 또 다시 손사래를 쳤다. “이 영화를 마지막으로 영화를 그만둔다면, 시원하게 1등을 하고 끝내는 게 좋겠지요. 하지만 저는 앞으로 갈 길이 더 먼데, 처음부터 1등을 한다면 얼마나 부담스럽겠어요. 다음 작품 흥행성적이 부진하면, 소가 뒷걸음치다 쥐 잡았다고 할 것 아니에요. 그래서 지금의 3등이 좋아요. 앞으로 달려 나가기 위해 유리한 위치라고 생각해요.”
솔직함이 흥행성공의 비결
왕의 남자 흥행요인에 대해서는 이미 많이 보도됐지만, 이 감독이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흥행성공 이유는 바로 ‘솔직함’이었다.“극중에 나오는 모든 캐릭터가 솔직하지 않은 사람이 한 명도 없어요. 장생(감우성)은 누구 앞에서라도 하고 싶은 말은 다하죠. 연산(정진영)도 절대 숨기지 않으며, 모든 것에 솔직하고, 공길(이준기)은 처음에는 머뭇거리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솔직해집니다. 녹수(강성연) 역시 자신의 질투를 숨기지 않고, 심지어는 신하들까지도 죽어가면서까지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하고 죽죠. 관객들은 주인공의 내적갈등을 쫓아가면서 페이소스(연민)를 느끼는데, 솔직하지 않다면 공감할 수가 없죠.”
이 영화의 가장 특이한 현상중의 하나는 영화를 수 십 번씩 보는 영화폐인들이 생겨났다는 점이다. 드라마나 DVD를 반복해서 보는 일은 흔하지만 극장을 다시 찾아가서 영화를 수 십 번씩 보는 일은 영화관계자들도 놀랄만큼 정말 보기 드문 현상이었다. 그리고 관객들은 영화를 볼 때마다 해석이 달라진다고 평했다. 이 감독은 “모든 캐릭터들이 솔직하기 때문에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자신의 눈높이에 맞는 인물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가 있었고, 이로 인해 보는 사람마다 해석이 달라질 수 있었다” 면서 “특히 공길이 가진 ‘정체성의 모호성’ 때문에 영화를 몇 십 번씩 보는 사람들이 나올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동성애 영화 아니다
장생의 공길에 대한 사랑, 연산의 공길에 대한 사랑, 공길의 장생과 연산에 대한 사랑. 왕의 남자를 두고 사람들은 흔히 ‘동성애적 로맨스를 다루었다’고 말한다. 또한 민감할 수 있는 주제에 대해 전 국민의 공감대를 이끌며 흥행신화를 이끌어 낸 것에 대해서 박수를 쳤다.하지만 이 감독은 “왕의 남자는 동성애를 다루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동성애가 아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공감할 수 있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형식적으로 보면 언뜻 동성애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동성애가 아니에요. 우선 대표적으로 연산과 공길의 키스신을 보고 그런 이야기가 나오죠. 키스란, 사랑하는 사람을 탐닉하는 행위죠. 그런데 연산과 공길의 ‘키스신’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탐닉이 아니었어요. 연산의 내면적 고통과 녹수에게서 채워지지 않는 ‘마더(어머니) 콤플렉스’에 대한 집착이 공길에게 ‘입술박치기’로 표현됐을 뿐이죠. 동성애의 ‘형식’을 빌렸지만, ‘내용’은 그게 아니었다는 거죠. 그걸 관객들도 느낌으로 알았을 거예요.”
‘왕의 남자’가 가지는 1,000만의 숫자는 그 의미가 과거 영화들과는 좀 다르게 평가된다. 지난해 말 150억원을 들이며 ‘장동건과 이정재’라는 스타급 배우를 동원한 영화 ‘태풍’과 100억원의 제작비를 투입한 ‘청연’, 2,000억원의 제작비를 들인 화제작 ‘킹콩’을 누르고 전국민 4명중 1명이 영화를 보게 만든 영화 ‘왕의 남자’는 제작비 42억원에 스타급 배우 한명 없는 저예산 영화였다. 하지만 영화는 관객 1,000만을 넘으면서 ‘자동차 3,000대’를 생산한 것과 맞먹고, 1,800여개의 일자리 창출 효과를 거뒀다고 한다. 이렇게 영화가 대박을 터뜨리면서 영화의 순이익은 몇 백 억에 해당한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차기작에 부담감 느껴
현재 이 감독은 차기작, 안성기와 박중훈 주연의 영화 ‘라디오 스타’를 4월에 크랭크인(촬영시작) 할 예정이다. 하지만 왕의 남자의 여파(?)로 인해 일을 도대체 할 수가 없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그런데 아무리 바빠도 요즘… 정말 행복하시죠”라고 물었더니 이 감독은 “불행하지는 않다”고 답한다. 또 너무 조심스러운 대답이 아닌가하는 생각에 “원래 지금 너무 행복해야 정상 아닌가요”라고 반문했다. “기뻐도 기뻐하지 말고, 슬퍼도 슬퍼하지 말라는 말이 있죠. ‘왕의 남자’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의 만족감이 더 클 수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 준비중인 ‘라디오 스타’는 기대감이 그만큼 커졌기 때문에 부담감도 커졌어요. 그래서 저는 지금 행복할 수 없어요.”이 감독이 ‘왕의 남자’를 촬영하면서 가장 중점을 뒀던 부분은 ‘우리 문화의 전달’ 이었다고 한다.
서양문화가 이 땅에서 주류가 된지 불과 100여년 밖에 안됐는데, 5,000년이나 이어져 오던 우리의 문화가 사라져 가고 있는 게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용불용설(자주 사용하면 발달하고, 사용하지 않으면 퇴화한다)이라는 말이 있지요. 우리가 우리 것을 자꾸 쓰면 결국 외국에서도 따라하게 되어 있거든요. 피아노를 먼저 배우고, 대학에 가서야 꽹과리를 만져보는 우리사회의 잘못된 인식이 바뀌기를 바랍니다. 적어도 후손들은 서양의 지배를 받지 않아야 되지 않겠어요”이 감독은 마지막으로 “우리의 전통문화를 우리가 아끼고 사랑해야 서양에서도 인정받는다”면서 “우리 문화가 앞으로 100년 안에 이 땅에서 주류가 되기를 바란다”며 인터뷰를 마쳤다.
# 이준익 감독이 말하는명대사 & 명장면
명대사- 장생(감우성) “이 징한 놈의 세상, 한판 신나게 놀다 가면 그뿐~!”명장면- 연산(정진영)이 복도를 걸어가 녹수(강성연)의 치마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엄마의 자궁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연산의 회귀 본능)
이준익 감독이 말하는4인4색
감우성- 기존에는 도시적인 이미지였는데, 정반대의 이미지인 조선시대 광대역을 맡았다. 그러나 모두가 깜짝 놀랄만큼 소리, 몸짓, 줄타기 등 다양한 광대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가 가진 잠재력은 정말 어마어마했다. 정진영- 그가 가지고 있는 느낌은 지극히 이성적인 캐릭터였다. 하지만 연산을 맡으면서 기존의 이미지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미쳐야 미친다’는 말처럼, 그의 연기는 미쳐서 도달할 수 있는 경지였다. 강성연- TV 드라마에서 보여준 현대적인 모습이었던 성연씨는 ‘녹수’라는 역할을 하면서 ‘이 배우가 그 배우 맞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새로운 모습을 보여줬다. 특히 분량도 많지 않은데, 강렬한 여성의 캐릭터를 구현해 냈다. 잠재력이 많다고 생각한다.이준기-‘공길’역에는 기존의 이미지가 강한 배우가 맡았다면 선입견이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준기는 ‘흰 도화지’ 같은 신인이었기 때문에 공길이 가진 정체성의 모호성을 잘 표현할 수 있었다.
# 이준익 감독과 이준기의 1인 시위“밥만 나오면 뭐든지 다 팔아”
영화 ‘왕의 남자’의 두 주역, 이준익 감독과 신예 스타 이준기가 지난 11일과 12일 각각 ‘스크린쿼터 반대’ 1인 시위를 가졌다. 특히 이 감독은 지난 11일, 왕의 남자가 관람객 1,000만명을 넘는 순간에 거리에 나와 1인 시위를 하면서 ‘관객 1,000만명 돌파 자축 행사’라고 말하며 아이러니한 상황을 연출했다.
이 감독은 “스크린쿼터가 왕의 남자를 만들었습니다”라는 문구의 피켓을 들고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를 외쳤다. 이 감독은 기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영화 왕의 남자, 장생의 대사 “밥만 나오면 뭐든지 다 팔아”라는 말을 예로 들며, “21세기는 문화 전쟁의 시대라며, 문화는 미국의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고 강조했다. 하루 뒤인 지난 12일에는 공길 역을 맡았던 이준기의 1인 시위가 있었다. 이날 광화문에는 이준기를 보기 위한 팬들과 시민, 취재진들까지 1,000여명이 모여들어 북새통을 이뤘다. 이준기는 “이제 시작입니다. 여기서 멈출 수는 없습니다”라는 문구의 피켓을들고 “스크린쿼터가 축소되면, 할리우드의 물량공세로 한국 영화는 극장에서 보지 못하게 될 것”이라며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김민주 kimmj@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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