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 ㅣ 이범희 기자] 현대상선이 매각됐다. 25일 산업은행이 최대주주로 올라섰다. 40여 년간 현대 품에서 항해하던 현대상선은 최근 불거진 해운업계의 경기침체와 모기업인 현대그룹의 연이은 악재에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다.
현정은 회장이 현대상선을 살리기 위해 300억 원대 사재출연에 이어 대주주 무상감자에 동의하며 회사 정상화를 위한 발판이 마련됐지만 결국 간판 계열사를 떠나보내게 됐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과거 가족 간 싸움으로 회사를 빼앗으려 했던 범현대가가 제 3자에게 매각되도록 한 배경에 대한 의문을 품기도 한다. 진짜 속내가 따로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정몽헌 타계 후 범현대가서 군침 흘리더니 결국 3자 매각
사업적 실속 없었다는 입장…범현대가 이미지 버렸다 빈축
현정은 회장은 2003년 남편 정몽헌 회장 타계 후 정상영 KCC 명예회장이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16.2%를 사들이면서 경영권 위기를 겪었다. 이어 2006년 현대중공업이 현대상선 지분 27.7%를 매입하면서 현 회장의 경영권을 위협했다.
그러나 현 회장이 경영권 방어에 성공하며 이후 탄탄대로를 걸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여장부’와 ‘현다르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범현대가는 현대그룹이 흔들릴 때마다 적통성을 강조하며 시시콜콜 현대그룹 경영권을 넘봤다. 현씨 집안이 아닌 정씨 집안이 경영에 참여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처음 현대상선과 현대증권 매각 소식이 알려졌을 때 업계는 범 현대가 중 누군가가 현대상선의 인수자로 나설 것이라 추측했다.
지난 3월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15주기를 맞아 현정은 회장이 한남동 정몽구 회장의 자택을 찾았을 때도 이날 만남은 남북관계 등으로 경영위기를 겪고 있는 현대그룹과 유동성 위기에 허덕이고 있는 현대상선에 대해 범 현대가의 지원 논의가 이뤄질지 여부에 관심이 쏠렸다. 그만큼 현대상선의 제 3자 매각은 엄두조차 내지 못했었다.
과거 현대건설 인수전 당시 현대그룹과 현대차그룹은 서로 자신들이 현대가의 적통임을 주장하며 첨예하게 맞선 전력이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특히 현대그룹의 경우 현대차그룹을 겨냥한 각종 광고 등을 선보이며 현대차그룹을 자극했다.
업계 관계자는 “현재도 현대차그룹 내에서는 현대건설 인수전 때의 서운함이 남아 있다”며 “그때의 감정 정리가 안 된 상황”라고 말했을 정도다.
업계도 현대차그룹이 현대글로비스를 통해 현대상선 인수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현대상선을 인수해 현대글로비스와 통합한다면 단숨에 국내 최대 해운업체를 보유할 수 있게 된다. 또 같은 범 현대가라는 점도 현대차그룹이 인수에 나설 것이라는 분석에 힘을 실어줬다.
재무적 부담…득보다 실이 많다
하지만 현대차그룹의 판단은 달랐다. 부실 덩어리를 떠안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 현대차그룹의 최종 결론이었다. 사실 현대차그룹은 상당기간 내부적으로 현대상선 인수에 대해 검토해 왔다. 특히 시너지를 낼 수 있는지에 대해 여러 가지 시뮬레이션을 진행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인수를 통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는 결론을 내렸다.
현대상선은 컨테이너선 사업과 벌크선 사업이 주축이다. 배출비중은 컨테이너선이 80%, 벌크선이 20%가량 된다. 자동차를 근간으로 하는 현대차그룹의 사업과는 접점이 없다. 현대차그룹으로서는 현대글로비스가 잘 하고 있는 만큼 굳이 현대상선을 인수할 이유가 없는 셈이다.
마찬가지로 KCC와 현대중공업그룹도 틈만 보이면 현대상선 인수에 군침을 흘렸던 만큼 이 중 한 곳이 인수할 것으로 전망했었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범 현대가의 손을 잡지 않았다. 오히려 현 회장은 그룹의 적통이었던 현대증권과 현대상선을 잇달아 잃으며 위상도 함께 추락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현대그룹도 최근 ‘현대상선 이후’를 준비하는 모습이다. 최근 현대그룹 출신 현대상선 임원들이 현대엘리베이터 등으로 소속을 변경하고 주식을 정리하는 한편 현대엘리베이터는 현대 상표권을 현대상선으로부터 사들였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지난 2일 “출자전환에 따라 일부 현대상선 임원들의 소속을 변경한 것”이라며 “이번 조치는 현대상선 이후의 현대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일환으로 봐도 무방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대상선이 대주주에 대한 차등 감자안을 확정함에 따라 대주주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에서 산업은행 등 채권단으로 바뀌게 됐다. 1976년 옛 현대그룹 계열사 아세아상선이 모태인 현대상선은 40년 만에 범 현대그룹의 품을 떠나게 됐다.
현대상선은 지난 15일 임시 주주총회를 열어 ‘대주주·특수관계인 차등 감자의 건’을 상정해 통과시켰다. 현 회장을 비롯해 현대엘리베이터, 현대글로벌 등 기존 대주주 지분율은 20.93%에서 7 대 1 감자를 당해 3.64%로 떨어진다. 대주주 감자의 효력 발생일은 오는 8월 19일이며 채권단의 출자전환 등을 거치면 지분율은 1% 미만으로 더 낮아진다.
현대상선 관계자는 “현 회장이 현대상선의 경영정상화를 위해 고통을 분담하고 책임지는 차원에서 대주주 감자를 수용했다”며 “현대상선 대주주는 25일부터 채권단으로 바뀌게 된다”고 말했다.
결국 남의 손에 맡겨진 현대상선
반면 간판 계열사를 떼어내야 하는 현대그룹 입장에서는 뒷맛이 씁쓸하게 됐다.
현대증권을 매각하고 현대상선까지 떠나보내면 현대그룹에는 사실상 현대엘리베이터, 현대아산, 현대유엔아이 정도만 남게 된다.
현대상선은 그동안 현대그룹 매출의 70% 정도를 책임졌던 핵심 계열사다. 현대상선이 계열 분리되면 현대그룹은 자산규모 2조 원대의 중견기업으로 위상이 바뀌게 된다.
2016년 기준 자산총액 12조3000억 원을 기록한 현대그룹은 재계 서열 30위에 해당되는 대기업집단이다. 범 현대가의 뿌리인 이 회사는 1987년 대기업집단 지정 도입 당시에는 재계 서열 1위에 이름을 올렸다.
고(故) 정주영 회장이 건재했을 때만 해도 재계를 호령했던 현대그룹이 30년도 못 돼 중견기업으로 격하한 것이다.
또 현대상선은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1976년 유조선 두 척으로 해운업에 뛰어들며 세운 회사다. 정주영 회장은 그리스 선주사 리바노스로부터 25만TEU급 유조선 2척을 수주했지만 당시 계약 조건이 형편없었다. 당시 임원들이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자 “이봐, 해봤어?”라는 말로 직원을 제압한 일화가 알려졌을 만큼 그의 정신이 훼손됐다는 일부 여론에서도 자유롭지 못하게 됐다.
이범희 기자 skycros@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