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잔 밑이 어둡다 했던가. 진리는 의외로 가까운 데 있다.” “지식보다 중요한 건 깨달음이다. 그 깨달음은 우리의 주변에 우리 선조들의 삶과 역사 속에 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것을 찾아야 한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우리 선조들에게 느끼고 배워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일요서울]은 저자 김갑동이 쓴 ‘옛사람 72인에게 지혜를 구하다’를 통해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들을 다룸으로써 누가 옳은 길을 갔는지 생각하는 시간을 갖도록 한다.
또 인물들을 시대 순으로 배치해 자연스럽게 한국사의 전개과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그 열 번째로 ‘정도전과 하륜’편이다.

조선을 창업하는 데 힘을 모았던 정도전과 하륜은 우왕의 후계자 문제가 발생한 때부터 조금씩 갈라졌다. 이성계의 견해를 지지하던 이들은 최영의 요동 정벌을 반대했다. 그 대가로 하륜은 양주로 귀양을 가기도 했지만 결국 위화도 회군으로 그 뜻이 관철됐다. 우왕은 폐위되어 강화도로 귀양을 가고 이때 대두된 것이 우왕의 후계자 문제였다.
정도전을 비롯한 그 일파는 우왕의 아들이 아닌 다른 종실을 왕으로 세우려 했다. 그들은 이른바 ‘폐가입진’의 논리를 들고 나왔다. 우왕과 그 아들은 왕 씨가 아니라 신돈의 아들이란 것이었다. 따라서 가짜 왕씨를 폐하고 진짜 왕씨를 옹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진실 여부는 차치하고 이는 그들이 권력을 잡고 새로운 일을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 논리를 적극 주장한 사람이 바로 정도전이었다.
조선의 유방과 장량
그러나 하륜은 달랐다. 우왕이나 그 아들이 왕 씨가 아니라는 데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또한 정당한 왕위계승자가 있는데 이를 바꾸는 것은 백성들에게 호응도 받지 못할뿐더러 무리라고 생각해 그는 우왕의 아들을 후계자로 정하는 데 동조했다. 그리하여 결국 우왕의 아들이 창왕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우왕의 부탁을 받고 이성계를 제거하려 한 사건이 일어나 대간의 탁핵으로 유배됐다. 우왕을 음해했다는 죄목이었다. 이런 가운데 이성계는 창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공양왕을 내쫓고 역성혁명을 단행하였다. 새로운 국가, 조선을 건국하고 자신이 태조로서 왕위에 오른 것이다.
그런데 당시 중국에는 원나라를 멸하고 등장한 명나라가 있었다. 명과 원이 대립하고 있을 때 구세력들은 기존의 친원정책을 버리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성계를 비롯한 신진세력들은 새롭게 흥기한 명나라와 친교를 맺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라 명나라와 여러 번 외교사절을 교환하는 등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다가 태조 5년 이른바 표전문 문제가 발생했다. 태조가 명나라 황제에게 올린 표전의 내용이 정중치 못하고 대국을 희롱한 문구가 있다는 것이었다. 명에서는 이를 힐난하면서 이를 쓴 사람을 보내라고 위협하였다. 이 표전을 쓴 사람은 개국 공신인 정도전·권근·정탁 등이었다. 그러자 이 문제를 둘러싸고 정도전과 하륜이 대립했다.
하륜은 형편이 부득이하니 정도전이 직접 갈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도전은 병을 핑계로 가지 않으려했다. 그리고 이를 내정간섭이라 하면서 명나라를 정벌하자고 주장했다. 태조 이성계의 입장에서도 정도전을 보낼 수는 없었다. 나라를 세우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총애하던 신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정도전이 간다면 죄를 받을 것은 뻔한 이치였다. 이같은 상황에서 하륜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리 만무했다. 오히려 이성계는 하륜을 계품사로 삼아 명에 가서 무제를 해결토록 했다. 명을 받은 하륜은 본국의 사정을 잘 말하고 명의 양해를 얻어 무사히 돌아왔다. 그 결과 하륜은 중신들의 신임을 얻게 되었지만 정도전은 비겁하다는 오해를 받는 처지에 놓였다.
또 정도전과 하륜은 지도자에 대한 역할이나 바람직한 국가상에 대해서도 시각차가 있었다. 정도전은 이성계야말로 창업과 수성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정도전은 신하들이 주체로서 국가를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군주 일인이 좌지우지하는 전체적인 체제는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는 일찍부터 자신의 뜻과 이상을 실현해줄 수 있는 인물을 찾고 있었다. 그 때 등장한 것이 이성계였다. 그야말로 무력과 권력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인물이었다. 이성계는 당시 흥건적과 왜구를 물리치는 과정에서 새롭게 떠오른 무장이었기 때문이다. 정도전과 이성계의 돈독한 관계는 세자를 책봉하는 문제에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 하륜을 외직으로 쫓아낸 이성계와 정도전은 세자 책봉을 서둘렀다. 그런데 세자로 책봉된 것은 태조의 여덟째아들 방석이었다. 나이 어린 방석이 후계자가 되면 신권 중심의 정치를 꿈꾸었던 그의 이상을 실현하기가 수월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한 씨 부인 소생의 형들이 상당한 불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다섯째 왕자인 방원의 불만이 제일 심했다. 조선 건국의 마지막 장애였던 정몽주를 제거한 이도 바로 이방원이었다. 이러한 이방원 편에는 하륜이 버티고 있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정도전은 하륜을 외직으로 쫓아내고 이방원을 제거하려 했다. 이른 눈치 챈 이방원 측은 선수 치기로 했다.
태조 7년 7월, 이방원은 안산군수 이숙번을 불러들이고 군사를 모아 방석과 방번 형제를 살해했다. 방석이 세자로 책봉된 것은 정도전의 책동 때문이었다. 하여 정도전·남은 등도 제거하였다. 조선 건국의 주역이었으며 이성계의 최초 측근이었던 정도전은 신권정치의 꿈을 못 이룬 채 이렇게 세상을 떠났다. 이 작전에는 하륜이 깊이 개입하고 있었다. 그는 몰래 한양으로 올라와 이방원의 곁에서 군사 작전을 지휘했던 것이다.
이방원의 오른팔로 활약
이성계에게 정도전이 있었다면 이방원에게는 하륜이 있었다. 하륜은 일찍이 이방원의 관상을 보고 그가 큰 인물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이성계의 역할은 창업에서 끝나야 하며 수성을 할 만한 인물은 이방원이라고 생각했다. 허약한 군주보다는 강한 추진력을 가진 군주가 어렵게 세운 나라를 지킬 수 있고 그래야만 신하도 그를 도와 일을 할 수 있다고 봤다. 그는 이방원의 장인 민제를 만나 비밀리에 만남을 주선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렇게 하여 이방원과 하륜 사이에 돈독한 관계가 성립됐다.
정도전과 하륜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한 주역들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갈라선 것은 국가와 지도자에 대한 생각의 차이 때문이었다. 바람직한 국가관에 대해 신하들이 중심이 되는 국가와 강력한 지도가 이끄는 국가로 의견이 갈렸다. 또 국제관계에서도 실리적인 이해관계에 따른 가변적인 관계가 중요한 것인가 변함없는 의리관계가 중요한 것인가에서 입장을 달리 했다.
강력한 추진력이 있는 지도자를 원했던 하륜이 결국 승리한 것은 당시의 시대상황과도 관련이 있었다. 어렵게 세운 나라를 지키는 데는 이방원 같은 인물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있었기에 조선이라는 나라는 기틀을 튼튼히 다지게 되었고 이를 통해 세종이나 문종대에 문화의 꽃이 필 수 있었던 것이다.
◆ 연재 종료 ◆
그동안 ‘옛사람72인에게 지혜를 구하다’를 애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범희 기자 skycros@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