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 72인에게 지혜를 구하다 21 - 최영과 이성계
옛사람 72인에게 지혜를 구하다 21 - 최영과 이성계
  • 이범희 기자
  • 입력 2016-07-18 09:25
  • 승인 2016.07.18 09:25
  • 호수 1159
  • 50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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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이냐 혁명이냐

“등잔 밑이 어둡다 했던가. 진리는 의외로 가까운 데 있다.” “지식보다 중요한 건 깨달음이다. 그 깨달음은 우리의 주변에 우리 선조들의 삶과 역사 속에 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것을 찾아야 한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우리 선조들에게 느끼고 배워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일요서울]은 저자 김갑동이 쓴 ‘옛사람 72인에게 지혜를 구하다’를 통해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들을 다룸으로써 누가 옳은 길을 갔는지 생각하는 시간을 갖도록 한다. 또 인물들을 시대 순으로 배치해 자연스럽게 한국사의 전개과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그 열 번째로 ‘최영과 이성계’편이다.


최영은 충숙왕 3년 사헌규정 최원직의 아들로 태어났다.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낸 철원 최씨 가문이다. 그의 5대손인 최유청은 무신 정권시대에 문반으로 활약해 중서시량평장사까지 지냈다.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기록이 미비해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16세 되던 해에 아버지가 남긴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유훈을 가슴에 깊이 새기면서 생활했다. 후에 그가 무신으로 출세한 점을 보면 젊은 시절부터 군인으로 활약하였을 것이다. 당시 고려는 원나라에게 많은 간섭을 받았고 훙건적과 왜구의 침입이 이어졌다. 군인이었던 최영은 양광도 도순문사 휘하에서 여러 번 왜구를 무찔러 우달치가 됐다. 우달치는 왕의 시위·숙위를 담당하는 특수부대다.

공민왕 원년 안우, 최원 등과 함께 조일신의 난을 진압해 정 4품의 호군이 됐고, 공민왕 3년에 대호군까지 올랐다. 이 무렵 원나라는 상당히 혼란기였다. 화우이 계승싸움과 귀족 간의 내부 싸움으로 시끄러웠고 마지막 황제 순제는 환락에 빠져 있었다. 그러자 각지에서 한인 반란군이 봉기하기 시작해 원에서는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고려에도 조정군 파견을 요청해왔다. 이에 고려에서는 원의 압력에 못 이겨 조정군 2000명 을 모집하고 장상 40여 명을 세웠다. 이 40여 명 가운데 유탁·염제신 등과 함께 최영도 들어가 있었다. 이때 최영은 항상 선두에서 싸웠으며 여러 번의 부상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공민왕 8년에는 약 4만 명에 달하는 홍건적이 고려의 국경을 넘어왔다. 홍건적은 원말의 혼란을 틈타 한산동·유복통 등이 하북성 영평에서 일으킨 도적떼로서 머리에 붉은 수건을 둘렀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들은 배력교라는 종교 결사를 중심으로 하였는데 원의 토벌군에 쫓겨 고려로 넘어 들어온 것이다.

대쪽같은 군인 정신의 소유자

홍건적을 격파한 직후 고려에는 김용의 난과 공민왕 피습 사건이 벌어졌다. 김용은 공민왕이 세자 시절 원에 있을 때 모셨던 공으로 대호군에 오른 인물이었으나 원의 기황후세력과 손을 잡고 공민왕의 임시행궁인 흥왕사를 습격했다. 이때 최영은 자신의 직속 군대를 거느리고 행궁으로 가 난을 진압했다.

당시 김용이 가지고 있던 금은보화를 압수했을 때 많은 대신들이 구경했으나 최영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처럼 그는 물욕이 없었고 개인의 이익을 꾀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곧이어 최유가 의주로 쳐들어오자 최영은 이성계 등과 힘을 합쳐 이들을 물리쳤다. 그러나 신돈이 막강한 권세를 부리던 시절에 최영은 많은 수난을 겪었다.

신돈이 집권하던 초기에 계림부윤으로 좌천한 것을 비롯해 신돈의 모함으로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러나 왕에 대한 충섬심은 변함이 없어 공민왕 20년, 신돈이 제거되자 그는 다시 찬성사에 올랐다. 공민왕 23년에는 제주도의 묵호들이 명나라에 바칠 말을 내놓지 않자 최영은 왕명을 받고 탐라를 정벌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영은 늙었고 우왕의 장인이었기 때문에 평양에 머물렀고 이성계와 조민수만 출정해 압록강 위화도에 이르렀다. 여기서 이성계가 조민수를 설득해 회군함으로써 최영은 고붕에 유배됐다가 창왕 즉위년 12월에 참수됐다.

이성계는 충숙왕 전주 이씨 가문에서 태어나 전주에서 살았다. 이성계는 어려서부터 활을 잘 쏘았다. 이성계가 처음 고려 조정에서 활약한 것은 공민왕 10년 박의 반란을 진압한 일이다. 곧이어 홍건적이 침입해 개경이 함락되자 정세운 등과 함께 개경을 되찾는 데 크게 활약했다.

공민왕 13년 최유가 덕흥군을 세우고 고려를 침입했을 때에는 최영과 더불어 이들을 격퇴했다. 그러나 이 전투 때문에 이성계가 동북면을 비운 사이 삼선·삼개 등이 이끈 여진족이 침입해 함주까지 함락당했다. 이에 이성계는 군사를 돌이켜 한방신 등과 함께 이들을 크게 무찔렀다. 이 공으로 이성계는 밀직부사에 올랐으며 단성양절익대공신호를 받았다.

뛰어난 무예로 이름을 떨친 이성계

우왕 14년 이성계는 그의 인생에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이른바 철령위 설치 문제와 관련해 최영과 우영은 요동을 정벌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반대했다. 하지만 최영과 우영은 그의 의견을 묵살하고 출정을 명령했다. 병력은 대략 10만 명. 상황은 이성계가 우려하던 바와 같았다. 비가 많이 와 물에 빠져 죽는 자가 속출했고 진군하지 못해 군량만 허비했다. 이러한 상황을 왕에게 보고하면서 군사를 되돌릴 것을 건의했지만 이마저도 묵살됐다.

처음에 최영과 이성계는 고려왕조의 무장으로 같은 길을 걸었다.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을 격퇴하는 데 공을 세우고 우왕 때 불법을 자행하던 이인임 일파를 제거하는 데에도 뜻을 같이했다. 그러나 곧 전혀 다른 길을 갔다. 최영이 대체로 권문세족의 이익을 대변하는 쪽으로 갔다면 이성계는 신진사류들과 뜻을 같이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첫째는 나이 때문이었다. 이성계는 최영보다 나이가 19년 아래였기에 최영보다는 휠씬 진보한 생각을 가졌고 덕분에 새롭게 떠오르던 신진사류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
둘째는 그들의 출신배경이었다. 최영은 고려 전기부터 문벌을 형성한 철원 최씨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이성계는 토착적인 기반 없이 정계에 진출한 인물이었다. 때문에 이성계는 중앙에 큰 기반이 없던 신진사류들과 뜻을 같이 할 수 있었다. 또 군사적인 면에서도 최영의 군사력은 주로 국왕의 친위군대인 우달치가 중심이었던 반면 이성계는 그의 선대가 동북면 지방에서 거느려왔던 가별초와 지방민들을 주요 기반으로 했다. 따라서 최영은 근왕적인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이성계는 왕들을 폐위하면서까지 자신을 옹호했던 것이라 생각한다.

최영은 국가를 유지하고 보호해야 하는 임무를 띤 군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충실한 무장이었다. 또 성공 여부는 둘째 치고라도 명나라에 굽히지 않고 오히려 정벌하고자 했다는 면에서는 그의 확고한 자주성과 용맹성을 높이 살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부패하고 모순된 현실을 개혁하려 하지 않았으며 앞날을 내다보는 혜안을 갖지 못했다는 측면에서는 비판받을 소지가 있다.

마찬가지로 이성계의 경우 하극상을 일으킨 반역자로 볼 수 있지만 당시의 모순된 현실을 개혁하고 나름대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다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다. 내부적인 안정이 있어야 밖으로도 뻗을 수 있는 법. 그래서 예로부터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 했다.

 

이범희 기자 skycros@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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