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의 대반격 ‘쌍끌이 작전’
다시 커진 노무현 대통령의 목소리에 정국이 일대 혼란에 빠졌다. “바닥은 이미 쳤다. 이제는 올라갈 일만 남았다”는 친노그룹 핵심 인사의 말처럼 국정 후반기에 임하는 노 대통령의 의지는 그 어느 때보다 높아보인다.
한·미 FTA 협상은 ‘레임덕’ 위기에 처해있던 참여정부를 구해냄과 동시에 과거 노 대통령을 지지했던 진보세력에 딜레마를 던져주고 있다. 당장은 지지율을 만회한 청와대측에 상당한 정치적 실리를 안겨준 것으로 평가받는다.
정국 주도권을 쥔 노 대통령의 재부상은 동전의 양면처럼 한나라당 위기론과 맞물려 있다. 올 한 해 이어질 남북관계 관련 이벤트는 범여권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무기로 보인다.
한미 FTA 협상은 국내 이념 대결 구도에 상당한 후폭풍을 남겼다.
2002년 대선에서 노 대통령을 지지했던 진보진영에서는 엄청난 비판을 퍼부었고 “이 참에 결별하자”는 이야기까지 공공연하게 흘러나오고 있다. 이에 반해 노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워왔던 일부 언론들과 한나라당 등 보수 그룹들은 이구동성으로 환영의 뜻을 밝혔다.
이 사이에서 10%대까지 떨어졌던 노 대통령의 지지율은 FTA 바람을 타고 30%대로 치솟았다. 노 대통령의 승부사적 기질을 잘 아는 범여권과 한나라당은 이런 민심의 흐름이 대선 정국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를 놓고 신경을 곤두세우기 시작했다.
노, 미래 의제 선점
노 대통령의 ‘부활’에는 무엇보다 한미 FTA 타결이 일등공신이었다. 타결 직후인 지난 3일 청와대가 여론조사기관인 미디어리서치에 의뢰해 조사한 결과 노 대통령의 국정운영 지지도는 32%였다.
지금까지 청와대의 자체 조사가 언론사 조사에 비해 후하게 나온 경향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같은 날 MBC와 KBS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노 대통령 지지율은 각각 36%와 32%로 집계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FTA 타결과 관련, 시민단체 등 진보진영의 반발이 만만치 않은 만큼 노 대통령의 지지율이 상승한 것은 부동층과 보수층 일부가 좋은 평가를 내리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노 대통령의 국정지지도는 지난해 지방선거를 기점으로 날개를 잃은 듯 급격하게 추락해 10%대 초반까지 떨어졌었다. 지난해 말부터 11·15 부동산 대책, 개헌 제의 등으로 상승의 기미를 보이긴 했지만 FTA로 인한 지지율 만회를 예상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한나라당은 FTA타결에는 찬성하면서도 노 대통령의 정치력이 회복되고 있는 것에는 적지 않게 우려하는 분위기다.
한 당직자는 “차라리 열린우리당의 지지율이 오르는 게 마음이 더 편하다”면서 “노 대통령이 정국 주도권을 잡게 되면 앞으로 대선까지 쉽게 가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이번 FTA 후폭풍은 보수 세력 내부의 결속을 약화시키는 동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일시적 현상이라는 지적이 대다수지만 노 대통령이 결단을 내린 이후 보수층에서 아군 대 적이라는 전선 구도가 약해진 것은 사실이라는 게 여론조사 관계자의 평가다.
청와대는 FTA를 통해 일시적으로 진보진영의 외면을 받겠지만 큰 틀에선 여전히 같은 지향점을 갖고 있다며 자신감을 감추지 않는다. 한 관계자는 이와 관련 “FTA로 진보진영의 지지가 이탈하고 있지만 남북 관계가 급속도로 정상화되고 로드맵이 차질없이 추진되면 결국에는 다시 만날 것”이라고 말했다.
조기숙 전대통령 홍보수석도 “노 대통령이 미래 의제를 이미 선점해 버렸다”면서 “여든 야든 노 대통령을 밟고 가는 사람은 대선에서 성공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식상한 ‘빅2 경쟁’
FTA를 통해 회생한 노 대통령은 여세를 몰아 대선 정국의 주도권을 이어가려고 할 가능성이 높다.
지난 2·13 합의를 통해 화해무드로 돌아선 한반도 정세는 ‘대선용 아니냐’는 한나라당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범여권에 호재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조만간 남북 경추위가 평양에서 열릴 예정이고 남북장관급 회담도 서울에서 개최될 계획이다.
남북열차 시범운행과 이를 통한 김대중 전대통령의 방북, 남북정상회담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노 대통령과 미국 부시 대통령의 정상회담 다음 수순은 남북, 미, 중 정상이 만나는 4개국 정상회담이 될 것이라는 얘기도 회자된다.
이 과정에서 ‘한반도 평화선언’을 통해 평화체제로의 전환이 시작되면 한나라당으로선 더욱 입지가 좁아질 수밖에 없다. 더욱이 청와대와 범여권 일각에선 보수 그룹이 오랫동안 주장해온 국군포로 및 납북자 문제 등을 북한 정부의 협조를 받아 이 기회에 해결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되고
있다.
FTA에 이어 보수 그룹들의 주장이 노 대통령의 정책에 반영돼 결과물을 내 놓는다면 이는 보수 그룹을 뒤흔들 수도 있다.
한나라당 전여옥 최고위원이 “두 대선주자(이명박 전서울시장, 박근혜 전대표)의 시시콜콜한 싸움에 국민이 싫증나기에 이르렀다”면서 “두 후보가 받고 있는 70%의 지지율이 착시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경고음을 울린 것도 이 같은 우려를 반영한다.
‘8월 경선 후유증’ 우려
무엇보다 참여정부의 후반기 사업이 여름 이후 대규모로 계획돼 있다는 점은 한나라당의 마음을 떨떠름하게 만든다. ‘가을 위기설’도 여기에 기인한 바가 크다.
노 대통령의 최대 공약이었던 행정수도 이전 사업의 첫 삽은 7월로 계획돼 있다. 남북정상회담 혹은 4개국 정상회담 날짜로는 정전협정 체결일인 7월 27일과 8월 15일, 그리고 10월 설이 나돈다.
가을에는 새판짜기와 오픈 프라이머리를 통해 범여권의 대선 주자도 등장하게 된다. 9월 정기국회 또한 FTA 비준과 개헌안 논란이 최대 화두로 자리잡을 가능성이 높아 한나라당이 주도권을 쥐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한나라당은 이미 대권 후보 경선을 8월에 치르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손 전지사의 탈당 이후 빅2간의 싸움으로 굳어진 터라 경선 흥행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8월 경선이 끝난 후에는 그 후유증도 극복해야 하지만 이 또한 성공을 장담할 수는 없다.
노 대통령의 지지율 회복과 함께 가시화된 한나라당의 ‘추풍 위기설’은 올 대선 정국을 가름하는 주요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남북 정부, 함께 한나라당 겨눈다”
한나라당 내부에선 연말 대선이 임박할수록 남북 정부가 공동으로 한나라당 후보를 겨냥할 것으로 보는 시각이 팽배해 있다.
북한은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해 “반보수대연합을 형성, 친미보수세력을 매장해야 한다”, “대선은 민족문제다. 강 건너 불 보듯 할 수 없다”며 이 같은 의중을 내비친 상황이다.
당내 최고 정보통인 정형근 의원은 참여정부가 보수세력의 요구를 가로챌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오는 6월 남북 군사당국간 회담 개최를 통한 서해 NLL 문제 해결과 국군 포로 및 납북자 문제 해결 등이 대표적인 것들이다. 6·15 평양행사를 앞두고 김대중 전대통령이 방북할 경우 납북자와 국군포로를 대동하고 올 것이라는 안도 제기됐다.
정 의원은 또 “대선에 임박, 한나라당 후보의 패배를 의도해 북한이 핵 포기 용의를 전격 표명할 가능성도 있다”면서 “평화 대 전쟁이라는 선거공학적 전략에 따라 통일, 평화가 주요 아젠다로 등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편, 한나라당 고진화 의원은 이 같은 우려를 막기 위한 방안으로 “대선 예비주자 4인이 참여하는 ‘평화특사’를 구성, 평양을 방문하자”고 제안한 바 있다.
김승현 okkdoll@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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