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잔 밑이 어둡다 했던가. 진리는 의외로 가까운 데 있다.” “지식보다 중요한 건 깨달음이다. 그 깨달음은 우리의 주변에 우리 선조들의 삶과 역사 속에 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것을 찾아야 한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우리 선조들에게 느끼고 배워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일요서울]은 저자 김갑동이 쓴 ‘옛사람 72인에게 지혜를 구하다’를 통해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들을 다룸으로써 누가 옳은 길을 갔는지 생각하는 시간을 갖도록 한다. 또 인물들을 시대 순으로 배치해 자연스럽게 한국사의 전개과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그 열 번째로 ‘공민왕과 신돈’편이다.
왕비의 신뢰에 힘을 얻어 공민왕은 반원개혁정치를 할 수 있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불법적인 인사행정의 온상이었던 정방을 혁파하고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해 토지와 인민의 탈점을 시정토록 했다.
또한 변발과 호복을 풀고 고려식 복장을 하여 고려의 부흥을 꾀하였다. 당시의 국제정세도 공민왕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당시 원나라는 서서히 쇠망해갔고 각 지역에서 한족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공민왕 3년 반란의 토벌을 돕기 위해 충돌했던 최영·김용 등 고려군은 원나라의 쇠약한 내부정세를 목격하고 이를 공민왕에게 보고했다. 이에 용기를 얻은 공민왕은 재위 5년부터 본격적인 개혁에 착수해 기황후를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두르던 기철 등의 권문세족을 일망타진했다. 고려의 내정간섭기관이었던 정동행성을 혁파하고 동북면의 쌍성총관부를 수복했다. 원나라의 연호도 폐지하고 관제도 문종대의 것으로 복구하였다.
그러나 모든 것이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원과 권문세족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고, 홍건적이 고려로 침략해 들어와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특히 홍건적의 두 번째 침략에 개경이 함락되고 왕이 복주로 피난하기까지 했다. 환궁하던 공민왕은 흥왕사에 머무르다 원과 결탁한 김용 일당의 습격을 받기도 했다.
그 후에는 원이 일방적으로 공민왕을 폐위하고 덕흥군을 옹립하였다. 이 일은 최영과 경천홍 등 무장 세력의 활약으로 무사히 수습됐지만 공민왕의 개혁의지를 약화시켰다. 무엇보다도 공민왕 2월에는 사랑하던 왕비 노국공주가 애를 낳다가 죽고 말았다. 왕비를 잃은 공민왕의 슬픔은 너무도 커서 정사에 뜻을 잃고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는데 이때 등장한 사람이 바로 신돈이다.
신돈은 계성현의 옥천사에 있던 노비의 몸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편조이고 자는 요공이었다. 공민왕은 어느 날 누군가가 칼로 자신을 찌르려는 것을 중이 구해주는 꿈을 꾸었다. 그때 마침 김원명이 신돈을 왕에게 소개하였는데 꿈에 본 중과 모습이 흡사하였다.
이렇게 하여 인연을 맺게 된 공민왕과 신돈은 노국공주가 죽자 급격히 가까워졌다. 공민왕은 세상을 떠나 독립한 사람을 얻어 크게 써서 폐단을 고치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때에 신돈을 보니 득도하여 욕심이 적으며 또 미천하여 가까운 당이 없으니 큰일을 맡겨도 될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신돈에게 수행을 굽혀 세상을 구할 것을 청하였다.
짐(朕)은 사(師)를 도우라
권력을 잡은 신돈은 먼저 권문세족들의 관직을 빼앗고 그들의 전민을 몰수했다. 공민왕 14년에는 전권을 위임받아 국정을 총괄하는 첨의사의 우두머리가 되었을 뿐 아니라 관리들에 대한 감찰권까지 쥐었다. 또한 승려들을 총괄하고 앞날을 예언하는 관청의 책임자 역할도 하게 됐다.
이때부터 신돈의 본격적인 개혁이 시작됐다. 우선 개혁에 장애가 되는 인원을 파면해 축출했다. 한편으로 자신의 뜻에 맞는 재산과 추밀들을 가려 뽑아 내재추제를 실시해 이들이 국가의 중대사를 처결하도록 했다. 신돈은 공민왕의 교육방침을 이어 성균관을 중건했다. 공민왕의 교육 방침을 이어 성균관을 중건했다.
공민왕의 교육진행책은 그 이전의 개혁안에도 교육 기능의 강화와 인재육성을 천명했었다. 성균관의 학생 수를 증가시키고 교육 과정을 오경사서재로 편성했으며 과거삼층법을 실시해 과거시험제도도 강화했다. 이로써 새로운 인재를 등용해 개혁의 받침돌로 사용하고자 하였다. 실제로 이 시기에 이색을 비롯해 정몽주·정도전·이존오·권근 같은 신진문신세력이 조정의 일각에 대두하고 있음은 주목할 일이다.
속속 드러나는 부작용
이러한 개혁의 뒷받침이 되었던 군사적 기반은 충용위였다. 충용위는 공민왕 5년 무렵 왕실을 수호하고 개혁에 반대하는 자들을 무력으로 제압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었다. 신돈의 개혁기에는 충용위 250명을 시켜 항상 신돈을 호위케 하였다.
이러한 신돈의 개혁으로 민생이 어느 정도 안정되고 국가 재정이 확보됐으며 정치질서도 자리를 잡아가는 듯했다. 그러나 여기저기서 개혁에 따른 부작용이 속출했다. 신돈을 제거하려는 거사도 모의됐다. 공민왕과 신돈 사이도 조금씩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인간은 권력을 쥐면 누구나 마음껏 휘두르고 싶어지는 법이다.
신돈도 예외는 아니었다. 왕이 각처의 왕릉에 배알할 때 백관들은 왕을 따라 절했으나 신돈은 배례하지 않았다. 또 평양으로 천도하자는 건의에 공민왕이 찬성하지 않자 평양에서 돌아온 후로 왕에게 보고하지도 않았다. 이러한 신돈의 오만불손한 행동에 공민왕도 점차 불만을 갖게 됐다. 그들 사이가 본격적인 대립관계로 들어간 것은 공민왕 18년이었다.신돈은 자신이 5도의 사심관이 되어보고자 삼사의 관원을 시켜 그 제도를 부활시킬 것을 건의하게 했다.
그러자 공민왕은 “나의 선친 충숙왕이 심한 가뭄을 당했을 때 각 도의 사심관을 폐지했더니 하늘에서 비가 내렸다 한다. 그런데 내가 어찌 선왕의 뜻을 잊겠는가?”하고는 상소문을 불태웠다. 그 뒤에도 계속 건의가 올라오자 공민왕은 “무슨 도적 무슨 도적해도 제일 큰 도적은 각 고을의 사심관이다”라며 일축하였다.
사심관의 폐혜가 컸음을 공민왕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또 신돈이 충주로 천도할 것을 건의했으나 공민왕의 반응은 냉담하였다. 450여 년간 지속된 왕실의 근거지를 함부로 옮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신돈은 공민왕을 제거하려 했다. 공민왕 19년 왕이 헌릉과 경릉을 배알할 때 부하들을 매복시켜 살해하려 했으나 호위가 엄해 실패했다.
그러나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 이 사건이 이인과 김속명의 밀고로 탄로나자 공민왕은 신돈을 수원으로 귀양보냈고 이듬해 7월 결국 처형했다. 공민왕도 왕위에 오른 지 23년 만에 내시 최만생에게 살해당했다.
신돈의 이야기는 지금 ‘고려사’ 반역 전에 실려 있다.
나름대로 개혁정치를 추진하려 애쓴 신돈이었지만 그에게 내려진 역사적 평가는 결국 반역자였다. 어째서 그의 개혁은 실패하였는가? 그를 지지해 주는 세력이 강하지 못했고 공민왕의 신뢰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또 그 역시 성인은 아닌지라 권력의 맛에 길들여져 함부로 권력을 휘둘렀다. 역시 이상과 현실은 달랐다. 개혁이란 꿈과 환상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충분한 뒷받침이 없는 권력이나 개혁은 오히려 화를 부를 뿐이다.
이범희 기자 skycros@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