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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을 개정하는 ‘개헌’의 필요성에 대해 우리 국민들은 대체로 긍정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 미디어오늘과 (주)에스티아이가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변화된 시대 상황을 반영해야 하므로 개헌 논의는 적절하다’는 응답이 52.9%로 ‘민생현안 해결과는 동떨어져 있으므로 개헌논의는 부적절하다’는 응답(29.3%)보다 높게 조사되었다. (‘잘 모름’ 17.8%) [6월 23일-25일 전국 만 19세 이상 성인 1,000명 대상 무선 ARS전화조사 100%, 표본오차 95% 신뢰구간에서 ±3.1%p, 응답률 3.5%]
또 한국갤럽이 실시한 자체 조사에서도 개헌 필요 의견이 46%로 불필요 의견(34%)보다 더 높았다. [6월 21일-23일 전국 만 19세 이상 성인 1,002명 대상 무선전화면접조사 85%+유선전화면접조사 15%, 표본오차 95% 신뢰구간에서 ±3.1%p, 응답률 22.8%]
특히 개헌 관련 여론조사는 ‘필요성’ 문항과 함께 선호하는 권력구조 형태 문항들이 한쌍처럼 늘 조사되어 왔다. 먼저 개헌의 범위에 대해서는 ‘국민 기본권 신장, 경제민주화 등도 포함하는 전면적 개헌’ 선호 의견이 61.1%로 절반을 넘었으며, ‘5년 단임 대통령제를 바꾸는, 권력구조에 한정한 개헌’ 의견은 20.8%였다. (‘잘 모름’ 18.1%) [미디어오늘-(주)에스티아이]
대통령 임기는 현행 '5년 단임제'(38%)보다는 ‘4년 중임제'(55%)를 선호하는 비율이 더 높았다. (‘잘 모름’ 8.0%) 권력구조는 ‘현행 대통령 중심제'(29%)보다는 ‘대통령이 국방, 외교 등 외치를 총리가 행정 등 내치를 맡는 분권형 대통령제'를 선호하는 응답(49%)이 더 높아 (‘잘 모름’ 22.0%) 지금의 대통령 1인에 집중된 권력을 분산할 필요가 있다는 선에 국민적 공감대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갤럽 6월 자체조사]
하지만 개헌에 대한 긍정적 여론이 개헌을 지지하고 원한다는 의미와 같은 것으로 볼 수 있을까. 제1야당 원내대표인 우상호 의원조차 “개헌은 필요하지만 어렵다”고 전망했다. “국회의원의 특권도 안 내려놓는데 임기를 내려놓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견해 때문이다. 박지원 국민의당 비대위원장 역시 “개헌은 국민정서를 등에 업고 추진해야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반대하는 한 물리적으로 불투명하다"는 입장을 보여 개헌의 성사 과정이 쉽지 않을 것임을 예단했다.
결국 개헌에 대해 우호적 여론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과 그것이 실제 동력을 갖고 추진되는 것에는 매우 큰 간극이 있다. 그래서 ‘개헌’은 ‘변화’라는 말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현재 개헌에 적극적인 인사들은 20대 국회 출범과 동시에 개헌을 하자고 공식제의한 정세균 국회의장을 비롯해 정의화 전 국회의장, 전 한나라당 윤리위원장을 지낸 인명진 목사,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 대표, 우윤근 국회 사무총장, 이상돈 국민의당 최고위원 등이다. 특히 이들은 향후 대선 정국에서 ‘킹메이커’ 역할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 개헌 이슈가 눈여겨봐야 할 주제임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개헌에 우호적인 의견을 피력하는 인사들은 차기 대선주자 후보들이다. 새누리당의 오세훈, 남경필, 유승민, 원희룡, 김무성,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인, 박원순, 안희정, 김부겸, 손학규 후보 등은 개헌의 최종 도착지에 대해선 약간씩 다른 의견을 갖고 있지만 그 필요성에 대해선 대체로 공감 의견을 보여 왔다. 다만 국민의당 안철수 전 대표는 정치와 국회 불신 그리고 분단 상황을 거론하면서 개헌에 대해 다소 조심스런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개헌이 실제 이뤄지기 위해서는 박지원 비대위원장의 말처럼 ‘현직 대통령’의 동의 여부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청와대의 기류는 ‘개헌 블랙홀’로 요약된다. 특히 개헌 논의 시작을 레임덕의 시작으로 인식하는 면이 엿보여 개헌의 ‘기역자’도 나오지 않는 상황이다.
다만 일부에서 개헌 논의가 임기말에 정국 주도권을 쥐는 카드가 될 수 있다는 시각과 함께 청와대 내에 기류 변화가 있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오고 있다. 친박 핵심인사인 홍문종 의원은 ‘지금은 상황이 아니다’라는 의미심장한 말로 선을 긋긴 했지만 이미 지난해 말부터 이원집정부제 개헌을 거론한 바 있고 또 반기문 총장의 방한이 대선후보 출정식과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유력한 대권후보군이 없는 친박계가 ‘반기문 대통령’을 띄우고 실세 총리를 가져가려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퍼져나가고 있다.
때를 맞춰 데일리안-알앤써치가 실시한 6월 다섯째 주 정례조사에 따르면, ‘박 대통령이 개헌 논의에 적극 협조해야 한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과반이 넘는 52.5%가 ‘동의한다’는 반응을 보여 때가 되면 청와대도 개헌 논의에 동참할 수 있는 명분이 만들어지고 있다. [6월 26-27일 전국 성인 남녀 1030명을 대상 조사. 유·무선 RDD 자동응답 방식. 95% 신뢰수준에서 표본오차 ±3.0%p. 응답률 2.9%]
더구나 박원순, 안희정, 이재명, 염태영 등 지방자치단체장을 중심으로 분권형 개헌이 거세게 제기되고 있어 그동안 ‘대통령 임기’와 ‘권력구조 형태’ 중심으로 논의되던 개헌 담론에 새로운 시각이 더해지고 있다. 이는 지난해 내내 중앙과 지방정부간 갈등을 야기시켰던 누리과정 재원 주체 문제와 지방재정 개편과 관련해 중앙정부가 지방정부의 자율성을 침해한다는 목소리가 커졌기 때문이다. 또한 지방정부의 복지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더 이상 중앙정부의 지침이나 간섭이 현장에서 실효성을 갖기 힘든 상황의 반영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저런 여러 이유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은 개헌을 나의 문제, 내 삶에 직결되는 문제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개헌 논의가 무성하다가도 쉽게 가라앉아 추동력이 잘 생기지 않는다. 개헌전도사라 불리는 이재오 전 의원이 국민의 기본권 개선을 중심으로 하는 개헌운동을 정당을 만들어 추진하겠다고 선언해도 친이계를 위한 정당만들기 명분으로 개헌을 이용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이 따라붙는다.
특히 대선을 앞두고 정치인들 중심으로 개헌 논의가 만개(滿開)하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개헌이 우리 사회의 변화를 담아내는 큰 그릇이라고 해도 추진 동력을 만들 수 없다. 국민들 입장에서는 개헌 명분인 ‘권력 나누기’야말로 최고 통치자가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국민의 뜻을 읽고자 노력해야 할 문제이고, 또 현재의 정당 구조 내에서 여야가 서로 대화하고 협력하는 정치문화가 갖춰져 있다면 굳이 의원내각제나 이원집정부제로 정치제도를 개선하는 것이 필요한가 하는 의문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국민들은 정당들의 정치행태나 국정운영이 맘에 들지 않을 때에는 이번 총선처럼 양당 심판이나 제3당 키우기 등을 통해 정치권의 변화를 촉구했었고 또 대통령에 힘을 실어줘야 할 때는 여당을 밀어줌으로써 힘의 균형을 맞춰 주었다. 때문에 개헌이 우리나라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터널이라면, 개헌 논의의 내용들이 특정 정치세력의 유불리를 도모할 것이란 오해를 불식시키는 것이야말로 가장 먼저 개선해야 할 일이다.
이미 87년 체제를 극복하자는 ‘개헌 레퍼토리’가 십수년째 있어 왔지만 언제나 같은 자리를 맴도는 이유는 정치인 어느 누구도 순수하지 않다는 국민적 의구심과 불신이 그 안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은영 KSOI(한국사회여론연구소) 소장>
일요서울 ilyo@ilyoseoul.co.kr